제 9편 자한(子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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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9편 자한(子罕)
  • 이우재
  • 승인 2010.06.01 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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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9편 자한(子罕)

1, 子罕言利 與命與仁
  공자께서는 이(利)에 대해서는 좀처럼 말씀하시지 않으셨으나, 말씀하실 때에는 명(命), 인(仁)과 함께 하셨다.

  <해설> 불과 여덟 자의 간결한 문장이지만, 옛부터 해석이 분분한 대목이다.
  한(罕)은 희(希)로 드문 것이다.
  하안의 고주나 주자의 신주 모두 이 문장을 하나로 읽어 “공자께서는 이와 명과 인에 대해서는 좀처럼 말씀하시지 않으셨다.”라고 해석한다. 다산도 같은 입장이다. 그러나 이렇게 해석하는 데는 명백히 무리가 있다. 우선 논어는 비록 체계적인 저술이 아니라 하더라도 명백히 인(仁)을 주제로 한 대화록이다. 공자 사상의 핵심이 인(仁)이라는 것은, 인(仁)이라는 글자가 논어 안에 무려 105번이나 나오고 있다는 데서도 쉽게 확인이 된다. 그런데도 공자가 인(仁)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고 해석하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다.
  그리고 이(利)와 명(命), 인(仁)은 서로 대치되는 개념이다. 이(利)가 남을 고려하지 않고 자기 자신만을 위한 것이라면, 명(命)은 천도(天道)가 행해지는 것이요, 인(仁)은 이기심을 버리고 남과 어울려 살아가는 것이다. 이렇게 이(利)와 명(命), 인(仁)이 서로 대치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셋을 똑같이 취급하여 논한다는 것은 분명히 모순이 아닐 수 없다.
  하안은 이 셋을 능히 행하는 자가 드물기 때문에 좀처럼 언급하지 않은 것이라고 부연하고 있으나, 구구할 뿐이다. 주자 또한 정자(程子)를 인용하여 이(利)는 의(義)를 해치고, 명(命)은 그 이치가 은미하며, 인(仁)은 그 도(道)가 크기 때문이라고 하나, 석연치 않다.
  원(元)의 진천상(陳天祥)은 『사서변의(四書辨疑)』에서 이 문장을 子罕言利 與命與仁로 끊어 읽을 것을 주장한다. 여(與)를 종(從)으로 읽으면 “공자께서는 이(利)에 대해서는 좀처럼 말씀하시지 않으셨고, 명(命)과 인(仁)을 따르셨다.”로 풀이된다. 청(淸)의 사승조(史繩祖)도 『학재점필(學齋佔畢)』에서 이와 같이 주장하면서, 여(與)는 선진 25의 吾與點也, 술이 10의 吾不與也의 경우와 같이 함께 한다는 뜻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하고 있다.
  청(淸)의 초순(焦循)은 『논어보소(論語補疏)』에서 위와 같이 끊어 읽을 것을 주장하면서도 조금 다른 주장을 펴고 있다. 즉 여(與)를 이(利)에 대해 언급한 것과 연관시키고 있는 것이다. 초순에 따르면 이 문장은 “공자께서는 이(利)에 대해서는 좀처럼 말씀하시지 않으셨으나, 말씀하실 때에는 명(命), 인(仁)과 함께 하셨다.”가 된다. 그에 의하면 옛말에 이(利)라고 할 때는 모두 물(物)에 미치는 것을 말한 것이라 한다(古所謂利皆以及物言). 즉 남을 이롭게 한다는 뜻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춘추(春秋) 시대에 이르러 이 글자의 뜻이 전화되어 자기를 이롭게 한다는 뜻이 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그 이(利)를 명(命), 인(仁)과 관련지어 말할 때만이 의(義)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利)에 관한 초순의 주장의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가 어렵지만, 하안이나 주자의 주장보다는 훨씬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여기서는 초순의 주장을 따랐다.       
      
2, 達巷黨人曰 大哉孔子. 博學而無所成名. 子聞之. 謂門弟子曰 吾何執 執御乎 執射乎. 吾執御矣.
  달항당 사람이 말하길 “위대하도다, 공자는. 널리 공부하였으나 무어라 이름을 이룬 것이 없구나.”
  공자께서 그 말을 듣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길 “내가 무엇을 잡을까? 말고삐를 잡을까? 아니면 활을 잡을까? 나는 말고삐를 잡겠노라.”

  <해설> 달항당(達巷黨)은 지명이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無所成名은 무어라 이름을 이룬 것이 없는 것이다. 태백 19에서 요(堯)임금의 공적에 대해 백성들이 무어라 형용조차 하지 못한 것(民無能名焉)과 같은 뜻이다. 달항당 사람이 공자가 무언가 특정하게 형용하지 못할 정도로 널리 공부한 것을 기린 말이다.
  그 말에 대해 공자는 겸손함으로 일관하고 있다. 자기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말고삐나 잡을 수 있을 뿐이라고. 그러나 공자의 겸손함의 이면에는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 내재되어 있다.
  주자는 無所成名을 달항당 사람이 공자가 널리 공부하였으면서도 무언가 이름을 이루지 못한 것을 애석히 여겨 한 말로 보고 있다.

3, 子曰 麻冕禮也. 今也純 儉 吾從衆. 拜下禮也. 今拜乎上 泰也 雖違衆 吾從下.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삼실로 짠 관을 쓰는 것이 예이지만, 지금은 명주실로 짠 것을 쓰고 있으니, 이것은 검소함이다. 나도 뭇사람들을 따르리라. 당 아래에서 절을 하는 것이 예인데, 지금은 당 위에서 절을 하니, 이것은 교만함이다. 나는 비록 여러 사람들과 어긋나더라도, 당 아래에서 절을 하겠다.”

  <해설> 마면(麻冕)은 검은 삼실로 만든 관이다. 순(純)은 명주실이다. 주자에 의하면, 삼실로 만든 관은 2천 4백 가닥의 낱실(縷)을 쓰기 때문에, 그 제작이 명주실보다 훨씬 힘들다고 한다. 당 아래에서 절을 한다는 것은, 임금과 신하가 공식적인 예를 행할 때, 신하가 먼저 당 아래에서 절을 한 뒤, 당 위에 오르는 것을 말한다.
  예와 풍습(風習)에 대한 공자의 자세를 알 수 있는 말이다. 예의 기본 정신에 어긋나지 않는다면 공자도 풍습을 거부하지 않는다. 그러나 예의 정신에 어긋난다면 홀로 외톨박이가 되더라도 풍습을 따르지 않고 예를 지킨다. 시세(時勢)의 변화를 수용하면서도 어디까지나 예의 기본 정신을 잃지 않으려고 하는 자세이다.
   
4, 子絶四 毋意 毋必 毋固 毋我.
  공자께서는 억측하는 것, 기필코 하고자 하는 것, 고집하는 것, 자아에 집착하는 것, 이 네 가지를 하지 않으셨다.

  <해설> 의(意)는 억(臆)으로 억측하는 것이다. 필(必)은 기필코 하고자 함이요, 고(固)는 고집하는 것, 아(我)는 자아에 집착하는 것이다.
  송(宋)의 정여해(鄭汝諧)는 『논어의원(論語意原)』에서 공자가 끊은(絶) 것은 의(意), 필(必), 고(固), 아(我)가 아니라, 그것들을 금지하려는 마음(毋), 그것이라는 정반대의 주장을 펴고 있다.

5, 子畏於匡. 曰 文王旣沒 文不在茲乎. 天之將喪斯文也 後死者不得與於斯文也. 天之未喪斯文也 匡人其如予何.
  공자께서 광 땅에서 두려운 일을 당하시자, 말씀하시길 “문왕께서 이미 돌아가시고 난 후, 이제 그분의 도가 내게 있지 아니한가? 하늘이 이 도를 없애려 하였다면, 후세의 내가 어찌 그 도에 관여할 수 있었겠는가? 하늘이 이 도를 없애려 하지 않는데, 광 땅의 사람들이 나를 어찌하겠는가?”

  <해설> 외(畏)는 두려운 일이다. 청(淸)의 유월(兪樾)은 『군경평의(羣經平議)』에서 외(畏)를 구금(拘禁)되는 것이라고 하고 있다. 광(匡)은 지명으로, 위(衛)의 한 읍(邑)이라는 설과 송(宋)의 한 읍이라는 설 등 여러 설이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공자가 광 땅에서 당한 어려운 일에 대해서는 『사기』 「공자세가」에 다음의 내용이 전한다. 일찍이 노나라의 장수 양호(陽虎)가 광 땅을 침략하여, 난폭한 짓을 자행하고 물러난 일이 있었다. 공자가 광 땅에 도착하였을 때, 광의 사람들은 공자의 외모가 양호와 비슷한 까닭에, 그를 양호로 잘못 알고, 닷새나 붙잡아 놓았다.
  문왕은 주나라의 기초를 쌓은 임금으로, 공자는 자신의 학문이 이 문왕의 도를 이어받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문(文)은 문왕이 세운 문물 제도로, 공자가 말하는 선왕의 도(道)이다. 그러나 다산은 문(文)이 주역(周易) 중 문왕이 짓고 공자가 후세에 전했다고 전해지는 단(彖)과 상(象)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하고 있다. 後死者는 문왕보다 후대에 죽을 사람을 말하니, 공자 자신을 일컬은 말이다.    
  스스로 옛 선왕의 도를 이었다고 생각하는 공자 자신의 자긍심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참고> 공자가 광 땅에서 두려운 일을 당한 것에 대해서는 선진 22에서도 언급하고 있다.

6, 大宰問於子貢曰 夫子聖者與 何其多能也. 子貢曰 固天縱之將聖 又多能也. 子聞之曰 大宰知我乎. 吾少也賤 故多能鄙事. 君子多乎哉 不多也.
  窂曰 子云 吾不試 故藝.
  태재가 자공에게 묻기를 “그대의 선생님께서는 성인이신가? 어찌 그렇게도 재주가 많으신가?”
  자공이 말하길 “선생님께서는 하늘이 내신 큰 성인이신지라, 또한 재주도 많으십니다.”
  공자께서 그 말을 듣고 말씀하시길 “태재가 나를 잘 알고 있구나. 나는 어렸을 때에 빈천하였다. 그런 까닭에 하찮은 일에 많이 능하였다. 군자는 재능이 많아야 할까? 그렇지 않다.” 
  금로가 말하길 “선생님께선 말씀하시길 ‘나는 세상에 쓰이지 못한 까닭으로, 여러 가지 기예를 익혔다.’라고 하셨다.”

  <해설> 태재(大宰)는 벼슬 이름으로, 재상(宰相)이다. 오(吳)나라, 혹은 송(宋)나라 사람이라고 하나 확실하지 않다. 한(漢)의 정현은 오나라의 태재 비(嚭)로 추정하고 있다.
  태재는 공자가 재주 많은 것을 궁금히 여겨, 혹시 하늘이 낸 성인이 아닌가 의심하였다.
  장(將)은 주자에 의하면 태(殆), 고주의 공안국(孔安國)에 의하면 대(大)이다. 주자가 공자를 성인이라 단언하지 않고 성인에 가까운(殆) 사람으로 표현하고 있는 데 반해, 공안국은 직접 대성인(大聖人)이라고 말하고 있다. 자공은 공자가 재주가 많은 이유를 하늘이 낸 성인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였다.
  그러나 공자는 달랐다. 그는 자기가 재주 많은 것이, 어렸을 때 가난하여, 먹고사느라 할 수 없이 그랬던 것이라고 변명하고 있다. 겸손함이다. 한술 더 떠, 공자는 말하길 군자는 재주가 많을 필요가 없다고까지 하고 있다. 공자의 생각은, 군자는 그 근본에 힘 쓸 것이지, 지엽말단에 연연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리라.   
  노(窂)는 공자의 제자로 성은 금(琴), 자는 자개(子開)라 한다. 시(試)는 용(用)이다. 금로의 말은 앞의 말과 뜻을 같이 하고 있다. 신주의 오역(吳棫)의 주장에 의하면, 공자의 제자들이 이 장(章)을 기록할 때, 금로가 예전에 들은 바도 이와 같아 그 뜻이 서로 가깝기 때문에, 함께 기록한 것이라고 한다.  
  고주에서는 窂曰 이하를 별개의 장으로 나누고 있다.
 
7, 子曰 吾有知乎哉 無知也. 有鄙夫問於我 空空如也. 我叩其兩端而竭焉.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내가 아는 것이 있느냐? 나는 아는 것이 없다. 하찮은 사람이라도 내게  물어온다면, 비록 그 질문이 어리석다 하더라도, 나는 그 양끝을 두드려 다 밝혀 준다.”

  <해설> 지(知)는 아는 것으로, 공자가 아는 것이 없다고 한 것은 겸손의 말이다. 공공(空空)은 공공(悾悾)으로 고지식하고 어리석은 것을 말한다. 고(叩)는 두드리는 것이다. 양단(兩端)은 시종(始終), 본말(本末)을 가리킨다.
  공자가 아무리 하찮은 질문이라도 결코 소홀히 하지 않고 성의를 다해 가르쳐 주었음을 이야기하고 있는 말이다.

8, 子曰 鳳鳥不至 河不出圖 吾已矣夫.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봉황새도 오지 않고, 황하에서 그림도 나오지 않으니, 나도 이제 그만인가?”

  <해설> 봉황새는 전설 상의 신비로운 새로, 성왕(聖王)이 천하를 다스릴 때, 나타난다고 한다. 순(舜) 임금 때 의(儀)에 나타났고, 문왕 때에 기산(岐山)에서 울었다고 한다. 하도(河圖)는 복희(伏羲)씨 때 황하의 용마(龍馬)가 등에 지고 나왔다는 그림으로, 또한 성왕을 상징하는 길조(吉兆)이다.
  공자가 성왕을 상징하는 상서(祥瑞)가 나타나지 않음을 한탄한 말이나, 고래로부터 두 가지 해석이 있어 왔다. 하나는 공자 자신이 상서가 없어 왕이 되지 못함을 한탄한 말이라고 보는 설(說)로, 한(漢)의 동중서(董仲舒) 등이 주장하였다. 또 하나는 공자를 이해하고 등용할 만한 성왕이 나타나지 않음을 한탄한 말이라는 설이다. 『한서(漢書)』 「유림전(儒林傳)」에 보이며, 후한(後漢)의 왕충(王充)이 쓴 『논형(論衡)』이란 책에도 혹자(或者)의 말로 소개되어 있다. 공자의 겸손함으로 볼 때 후자가 더 적합하지 않나 생각된다.
  그러나 논어에 보이는 공자가 인간의 일에 충실하고, 인간을 벗어나는 운명이라든가, 기타 초자연적인 것에 대해 언급하기를 회피해 왔음(子不語怪力亂神―술이 20)에 비추어 볼 때, 과연 진짜 공자의 말일까 의심이 드는 대목이기도 하다. 크릴(H. G. Creel)은 후세의 위작(僞作)으로 보고 있다.
 
9, 子見齊衰者 冕衣裳者與瞽者 見之 雖少必作 過之必趨.
  공자께서는 상복을 입은 자와 관복을 입은 자, 소경을 만났을 때는, 비록 상대가 어리더라도, 반드시 자리에서 일어나셨으며, 지나쳐 가실 때에는 종종걸음으로 지나치셨다.

  <해설> 자최(齊衰)는 상복이다. 면의상(冕衣裳)은 신분이 고귀한 자가 입는 관복이다. 고(瞽)는 소경이다. 작(作)은 일어나는 것이요, 추(趨)는 빠른 걸음으로 지나가는 것이다.
  자리에서 일어나고, 종종걸음으로 지나친다는 것은, 상복을 입은 자에게는 그 슬픔을 함께 하고자 함이요, 관복을 입은 자에게는 경의를 나타내고, 소경에게는 동정을 나타내고자 함이다. 공자의 마음씀이 사소한 일 하나 하나에도 소홀히 지나치지 않았음을 나타낸 말이다.
 
10, 顔淵喟然歎曰 仰之彌高 鑽之彌堅. 瞻之在前 忽焉在後. 夫子循循然善誘人 博我以文 約我以禮 欲罷不能. 旣竭吾才 如有所立卓爾. 雖欲從之 末由也已.
  안연이 탄식하며 말하길 “우러러볼수록 더욱 높으시며, 뚫을수록 더욱 단단하시다. 바라보면 앞에 계시더니, 홀연 뒤에 계시도다. 선생님께서는 차근차근히 사람을 잘 인도하시어, 글로써 나를 넓혀 주시고, 예로써 나를 단속해 주시니, 그만두려 해도 그만둘 수가 없다. 이미 나의 능력을 다하였는데도, 다시 앞에 우뚝 서 계시는 것 같으니, 비록 좇고자 하지만, 좇지 못하겠노라.”

  <해설> 위연(喟然)은 탄식하는 소리이다. 앙(仰)은 바라보는 것, 찬(鑽)은 뚫는 것이다. 미(彌)는 익(益)으로 더욱이라는 뜻이다. 仰之彌高 鑽之彌堅은 도저히 상대에게 다가갈 수 없는 것을 나타낸 말이다. 瞻之在前 忽然在後는 상대를 파악할 수 없음을 나타내고 있다. 모두 공자의 도가 높고 무궁하여, 다가갈 수도, 파악할 수도 없음을 말하고 있다.
  循循然은 순서대로 차근차근한 모양이다. 欲罷不能은 마치 배고픈 자가 음식 먹는 것을 그만둘 수 없는 것과 같이, 이제 지쳐 그만두고자 하여도 배움을 그만둘 수 없는 것이다. 탁(卓)은 높이 우뚝 선 모양이다. 旣竭吾才 如有所立卓爾 雖欲從之 末由也已는 이미 힘이 다 빠져 더는 못 갈 것 같은데, 다시 앞에 우뚝 나타나 따라올 것을 손짓하니, 이에 또 따라 나서려 하지만, 가도가도 이르지 못할 뿐임을 나타낸 말이다. 공자가 사람을 잘 인도하여, 끊임없이 학문의 길로 나아가게 하나, 가도가도 끝이 없음을 형용한 것이다.
  과연 그 스승에, 그 제자라는 생각이 절로 나는 대목이다. 음미할수록 문장의 맛이 깊으며, 안연의 죽음을 공자가 왜 그토록 애석해 했는지 충분히 짐작케 한다.

  <참고> 博我以文 約我以禮는 옹야 25, 안연 15에도 보인다.

11, 子疾病 子路使門人爲臣. 病間. 曰 久矣哉 由之行詐也. 無臣而爲有臣 吾誰欺 欺天乎. 且予與其死於臣之手也 無寧死於二三子之手乎. 且予縱不得大葬 予死於道路乎.
  공자께서 병이 위중하시자, 자로가 문인들로 하여금 신하 노릇을 하게 하였다.
  병이 차도가 있자, 말씀하시길 “오래 되었느냐? 유가 속인 것이. 내게 신하가 없는데도 신하가 있는 것처럼 꾸몄으니, 나더러 누구를 속이라는 말이냐? 하늘을 속이란 말이냐? 또 나는 그런 신하의 손에 죽는 것보다는 차라리 너희들의 손에 죽는 것이 낫다. 또 비록 내가 성대한 장례는 받지 못한다 하더라도, 설마 길에서 죽기야 하겠느냐?”

  <해설> 질병(疾病)은 병이 위중한 것이다. 子路使門人爲臣의 신(臣)은 다산의 『논어고금주』, 명(明)의 왕부지(王夫之)의 『사서패소(四書稗疏)』에 의하면 『예기』 「상대기(喪大記)」편에 보이는 소신(小臣)이다. 소신은 임금의 근신(近臣)으로 임금이 임종할 때 임금의 사지(四肢)를 붙잡는 사람이다. 원래 제후에게만 허용되는 것이나, 자로가 스승을 공경한 나머지 문인들로 하여금 소신의 역을 맡게 한 것이다. 그러나 자로의 행위는 명백히 예에 어긋난 것이었다.
  간(間)은 병에 차도가 있는 것이다. 無寧死於二三子之手乎의 무령(無寧)은 녕(寧)과 같다.
  자로는 공자의 문하 중 가장 나이가 많으면서도, 성격은 직선적이고 솔직한 사람이었다. 일찍부터 공자를 따랐던 관계로, 공자의 임종을 눈앞에 두고 여러 가지 상념이 교차하였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가슴이 아픈 것은, 스승이 그 높은 학덕을 갖추고서도, 그 경륜을 제대로 펴 볼 기회조차 갖지 못했던 것이리라. 자로는 스승의 장례만큼은 성대하게 하고 싶은 마음에 이러한 무리를 범했다.
  그러나 공자는 자로의 참례를 단호히 거절한다. 공자가 자로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을 리 없지만, 자로의 행위는 무엇보다 자신의 평생의 소신과 위배되는 것이다. 거짓되고, 분수에 맞지 않는 예절은, 그 동기가 무엇이던간에 참례이다. 공자는 거짓된 호화 장례보다는, 자로의 그 애절한 사랑을 가슴에 안고 가는 것이 더 행복했으리라. 나를 그렇게 사랑하는 너희들이 있는데 설마 내가 길가에서 죽기야 하겠느냐? 스승과 제자간의 사랑이 가슴에 와 닿게 절절하다.

  <보충> 문인을 거짓 신하로라도 삼아, 그토록 스승의 장례를 성대하게 치르고 싶어한 자로이지만, 그는 결국 스승의 장례를 모시지 못하고, 스승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고 만다. 『사기』 「중니제자열전」에서 전하는 바에 의하면, BC 480년의 일로, 자로는 위나라 괴외(蒯聵)와 첩(輒), 부자 간의 왕권 싸움에 휘말려 애석하게 목숨을 잃는다. 공자는 그 소식을 듣고 “내가 유를 제자로 얻고 난 뒤부터는 악한 말이 내 귀에 들리지 않았다.”고 하며 슬퍼했다고 한다.
   
12, 子貢曰 有美玉於斯. 韞匵而藏諸 求善賈而沽諸. 子曰 沽之哉 沽之哉. 我待賈者也.
  자공이 말하길 “여기에 좋은 옥이 있다면, 궤 속에 감추어 두겠습니까? 아니면 좋은 장사치를 찾아 팔겠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팔아야지, 팔아야 하고 말고. 나는 사 갈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

  <해설> 온(韞)은 장(藏)으로 감추는 것이고, 독(匵)은 궤(匱)로 물건을 담아두는 상자이다. 고(賈)는 장사치다. 한(漢)의 반고(班固)의 『백호통(白虎通)』에 의하면,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며 물건을 파는 사람을 상(商)이라 하고, 한 곳에 있으면서 고객이 오기를 기다려 물건을 파는 사람을 고(賈)라고 한다. 고(沽)는 매(賣)로 파는 것이다.
  언어에 뛰어난 자공다운 말솜씨이다. 자공은 공자가 높은 학덕을 지니고서도, 초야에 머물러 있는 것을 보고, 세상에 나아가 벼슬할 생각이 없는 것인지 물었다.
  공자는 자신도 세상에 나아가고 싶으나, 진실로 자신을 이해하고 등용해 줄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라고 대답한다. 신주의 범(范)씨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군자가 벼슬길에 나아가길 원하지 않는 것은 아니나, 그 도(道)에 의하지 않는 것을 싫어할 뿐이다. 선비가 예를 기다리는 것은 마치 옥이 장사치를 기다리는 것과 같다. 만약 이윤(伊尹)이 초야에서 농사를 짓고, 백이(伯夷)와 태공(太公)이 바닷가에 살고 있더라도, 세상에 탕왕(湯王)과 무왕(武王)이 없었더라면, 그것으로 끝나고 말았을 뿐이다. 도(道)를 굽히면서까지 사람을 따르지는 말아야 하며, 옥을 자랑하면서까지 팔려고 하지도 말아야 할 것이다.”
  은(殷)의 탕왕(湯王)이 이윤(伊尹)을 초치(招致)하고, 주(周)의 무왕(武王)이 태공(太公)을 맞이하며, 유비(劉備)가 공명(孔明)을 삼고초려(三顧草廬)한 것을 연상시키는 말이다. 
 
13, 子欲居九夷. 或曰 陋 如之何. 子曰 君子居之 何陋之有.
  공자께서 구이의 땅에 가서 살고 싶어 하니, 어떤 사람이 말하길 “누추할 텐데, 어쩌시겠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군자가 사는데, 어찌 누추하겠습니까?”

  <해설> 구이(九夷)는 중원 동쪽의 오랑캐로, 그 종족이 아홉이라 구이라 부른다. 지금의 산동성(山東省) 남부와 강소성(江蘇省) 북부 지역인 사하(泗河)와 회하(淮河) 사이에 거주하고 있었다고 한다.
  도가 실행되지 않는 중원에 대한 실망감의 표현이다. 팔일 5에서 오랑캐 땅에 임금이 있는 것이 중국의 없는 것보다 낫다(夷狄之有君 不如諸夏之亡也)고 한 것이나, 공야장 6에서 뗏목을 타고 바다에 나아가고 싶다(道不行 乘桴浮於海)고 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14, 子曰 吾自衛反魯 然後樂正 雅頌各得其所.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내가 위나라에서 노나라로 돌아온 연후에, 비로소 음악이 바로잡히고, 아와 송도 각각 제자리를 잡았다.”

  <해설> 아(雅)는 조정에서 공식 연회 때 연주하던 노래이고, 송(頌)은 종묘에서 조상을 제사지낼 때 연주하던 노래이다.
  고주의 정현(鄭玄)에 의하면, 공자가 위나라에서 노나라로 돌아온 것은 노나라 애공(哀公) 11년 겨울로 BC 484년이라고 한다. 『사기』 「공자세가」에 의하면 공자는 그 해 13년 간의 주유(周遊)를 마치고 노나라로 돌아와 73세로 사망할 때까지 쭉 노나라에 머물러 있었다.
  樂正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說)이 있다. 하나는 『시경』의 악장(樂章)을 바로잡았다는 것으로 모기령(毛奇齡) 등이 주장하였고, 또 다른 설은 그 음(音)을 바로잡았다는 것으로 포신언(包愼言) 등의 주장이다.

15, 子曰 出則事公卿 入則事父兄 喪事不敢不勉 不爲酒困 何有於我哉.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밖에 나아가면 공경(公卿)을 잘 섬기고, 집에 들어와서는 부형(父兄)을 잘 섬긴다. 초상 일에는 열심히 힘쓰고, 술을 마시더라도 실수를 하지 않는다. 이런 일들이라면 내게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해설> 곤(困)은 난(亂)으로 몸가짐이 어지러운 것이다. 何有於我哉에 대해서는 술이 2에서 이미 설명한 바 있다.
  스스로에 대한 겸손의 말이다.

16, 子在川上曰 逝者如斯夫 不舍晝夜.
  공자께서 냇가에서 말씀하시길 “흘러가는 것은 이와 같아서 밤낮으로 쉬지를 않는구나.”

  <해설> 공자의 그 유명한 천상지탄(川上之歎)이다. 고래로 두 가지 엇갈린 해석이 있어 왔다.
  황간(皇侃)은 『논어의소』에서 공자가 끊임없이 흘러가는 시냇물을 바라보면서, 덧없이 흘러간  자신의 인생을 한탄한 것으로 풀이하고 있다.
  그러나 주자를 위시한 송대의 유학자들은 달리 해석한다. 송대의 유학자들은 시냇물이 끊임없이 흘러가는 것이, 우주의 섭리, 즉 도(道)가 한 시도 쉬지 않고 활동하는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리하여 우리 인간도 저 시냇물과 같이, 촌음(寸陰)도 함부로 낭비하지 말고, 부지런히 학문 연마에 노력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송대 유학자들의 견해는 분명 지나치게 도학(道學)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그러나 황간의 해석과 크게 배치된다고도 볼 수 없다. 왜냐하면 흘러간 세월의 허망함을 알게 되면, 남은 시간의 귀중함을 알 수 있으며, 따라서 그 남은 기간 동안 최선을 다해야 함은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맹자』 「이루(離婁)하」 18에 “원천(源泉)의 샘물이 끊임없이 솟아 나와 밤낮으로 그치지 아니하고, 웅덩이를 채운 후 나아가 사해(四海)에 이르니, 근본이 있는 자는 이와 같다(原泉混混 不舍晝夜 盈科而後 進放乎四海 有本者如是).”는 말이 있다. 생각하건대 아마 주자의 해설은 맹자의 이 말에서 연유한 것 같다.
 
17, 子曰 吾未見好德如好色者也.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나는 덕을 좋아하기를, 미녀를 좋아하듯 하는 사람을 아직 보지 못하였다.”

  <해설> 이 세상에 미색을 좋아하는 사람은 많으나, 덕을 좋아하는 사람은 적다. 공자의 한탄이지만, 어느 시대에나 통용될 수 있는 말일 것이다.

  <보충> 공자는 부귀나 미색(美色) 등 인간의 욕망에 대해서 어떠한 입장을 갖고 있었을까? 우리의 선입관으로는 공자는 금욕주의자로서 인간의 모든 욕망을 부정한 사람처럼 생각될 것이다. 그러나 공자는 결코 인간의 모든 욕망을 일방적으로 부정한 사람은 아니다. 
  공자는 부귀는 인간 모두가 바라는 것이며, 빈천은 인간 모두가 싫어하는 것이라고 인정한다(富與貴 是人之所欲也 … 貧與賤 是人之所惡也―이인 5). 문제는 그것을 추구하는 방법이다. 부귀를 얻기 위해 도를 어기면 안 되는 것이다. 공자가 또한 경계한 것은 부유하다고 해서 분수를 잊고 방자해지는 것이다. 그러기에 공자는 부유하면서도 교만하지 말아야 하며, 더 나아가 예를 잊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학이 15). 문제는 부귀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얻는 방법과 그 이후의 처신인 것이다.
  논어에서 공자가 미색에 대해 언급한 것은, 이곳 외에 학이 7에서 어진 이를 어질게 대하기를 아름다운 여인을 대하듯 하라(賢賢易色)는 것 정도이다. 이 두 대목만 갖고 판단하는 것은 좀 무리가 있으나, 앞의 부귀의 예에서와 같이, 미색에 대해서도 공자가 그것을 일단 인간의 자연스러운 욕망으로 인정한 후, 그 마음과 같은 자세로 어진 이나 덕 있는 이를 대하라고 하고 있음에는 틀림없다. 만일 공자가 미색을 인간의 자연스러운 욕망으로 인정하지 않았다면, 미색을 경계하라는 말이 논어에 자주 나왔을 것이나, 논어에서 공자가 미색에 대해 경계한 말은 젊어 혈기가 넘칠 때 미색을 조심하라는 것 뿐이다(少之時血氣未定 戒之在色―계씨 7).
  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공자는 술에 대해 알아서 자기 양껏 마시되, 술로 인해서 실수를 하거나, 추태를 부려서는 안된다(不爲酒困―자한 15 唯酒無量 不及亂― 향당 8)고만 할 뿐이다.  
  부귀나 미색, 음주 등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욕망이다. 그러나 그것은 일정한 규범(道)을 어기지 않는 속에서 추구되어야 한다. 그리고 군자라면 그러한 것에 대한 욕망보다는, 도를 추구하고, 자신의 학덕을 높이며, 나아가 천하 만민의 행복을 추구하는 일에 더욱 관심이 있을 것이고, 그 속에서 더 큰 만족을 느낄 것이다. 아마 이런 것이 공자의 생각은 아니었을는지.
 
  <참고> 위령공 12에 같은 구절이 있다.

18, 子曰 譬如爲山 未成一簣 止 吾止也. 譬如平地 雖覆一簣 進 吾往也.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비유하건대, 산을 만드는데 비록 한 삼태기가 모자란다 하더라도, 그만두었다면, 내가 그만둔 것이다. 비유컨대 땅을 고르는데 비록 한 삼태기만 덮었다 하더라도, 나아가면, 내가 나아간 것이다.”

  <해설> 궤(簣)는 흙을 담는 삼태기이다.
  공을 이루고 못 이룸은 모두 자기의 책임이다. 비록 다 이루었으나 한 삼태기가 빠졌다면, 그것은 자기가 그만둔 것이요, 비록 한 삼태기 밖에 이룬 것이 없어도, 이루었으면 자기가 이룬 것이다. 배우는 자가 항상 쉬지 않고 연마해야 함(自强不息)을 강조한 말이다. 주자의 해설을 따랐다. 다산도 같은 입장이다.
  고주(古注)의 포함(包咸)이나 마융(馬融)은 “비유컨대, 산을 만드는데 비록 한 삼태기가 모자란다 하더라도, 그만두는 자는, 나도 그만둔다. 비유컨대, 땅을 고르는데 비록 한 삼태기만 덮었다 하더라도, 나아가는 자는, 나도 함께 가 준다.”라고 해석한다. 즉 그 전의 공이 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중도에서 그만두는 자와는 나도 함께 하지 않으며, 그 전의 공이 아무리 작다 하더라도 계속 나아가는 자와는 나도 함께 나아간다는 뜻이다.      

19, 子曰 語之而不惰者 其回也與.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가르쳐 줄 때, 게으름 피지 않고 실행하는 자는 안회일 것이다.”

  <해설> 타(惰)는 실행하는 것을 게을리하는 것이다.
  안회의 배우는 자세가 진지함을 칭찬한 말이다.
 
20, 子謂顔淵曰 惜乎 吾見其進也 未見其止也.
  공자께서 안연에 대해 말씀하시길 “애석하도다! 나는 그가 나아가는 것은 보았지만, 멈추는 것은 보지 못하였다.”

  <해설> 애석한 것은 그가 이미 죽고 세상에 없기 때문이다.
  안연이 평생을 쉬지 않고 학문 연마에 충실했던 것을 칭찬한 말이다.

21, 子曰 苗而不秀者有矣夫 秀而不實者有矣夫.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싹은 텄으나 이삭이 패지 못하는 것도 있고, 이삭은 팼으나 낟알이 영글지 못하는 것도 있다.”

  <해설> 묘(苗)는 곡식이 처음 싹이 트는 것이요, 수(秀)는 이삭이 패는 것, 실(實)은 낟알이 영그는 것이다. 有矣夫는 청(淸)의 환무용(宦懋庸)의 『논어계(論語稽)』에 의하면 항상 있는 것이 아님을 나타내는 말이라고 한다. 즉 어쩌다 간혹 그런 일이 있다는 것이다.
  전도(前途)가 촉망되던 사람이 피치 못할 사정으로 결실을 맺지 못하고 중도에 쓰러지게 될 때 하는 말이다. 주로 수재가 학문을 이루지 못하고 요절할 때 쓰인다. 황간은 『논어의소』에서 앞의 말과 연관지어 공자가 안연의 요절(夭折)을 애석하게 여겨 한 말이라고 한다.
    
22, 子曰 後生可畏 焉知來者之不如今也. 四十五十而無聞焉 斯亦不足畏也已.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젊은이는 두려운 존재이니, 어찌 뒤에 오는 자가 오늘의 우리만 못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사십, 오십이 되도록 세상에 이름이 없다면, 이는 역시 두려워 할 만한 사람이 아니다.”

  <해설> 후생(後生)은 자기보다 뒤에 태어난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젊은이를 뜻한다. 문(聞)은 세상에 이름이 나는 것이다.
  청년의 가능성을 존중하는 말로 널리 쓰이는 후생가외(後生可畏)가 여기서 유래했다. 젊은이의 가능성을 존중하나, 그것은 부단히 자기 연마에 힘쓰는 자에게만 국한된다. 젊은이라도 자기 연마를 게을리 하면, 나이 사십, 오십이 되어도 이룬 것이 없게 될 것이니, 세상에 이름이 나지 않는다. 그런 자라면 족히 두려워할 것이 없다.
  문(聞)은 문자 그대로 꼭 세상에 이름이 나는 것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군자는 남이 자기를 알아주지 않아도 화를 내지 않으며(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학이 1), 또 학문은 남에게 보이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하여 하는 것인데(古之學者爲己 今之學者爲人―헌문 25), 어찌 세상에 이름이 나는 것(聞)이 중요하겠는가? 문(聞)은 학문이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르러, 마치 과일이 익으면 저절로 향기가 나듯이, 의도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세상에 소문이 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학문이 완숙한 경지에 이르는 것이지, 소문이 나는 것 그 자체는 아니다. 다만 여기서는 공자가 제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편의상 세상에 이름이 나는 것(聞)이라고 표현했을 뿐이다.
 
23, 子曰 法語之言 能無從乎 改之爲貴. 巽與之言 能無說乎 繹之爲貴. 說而不繹 從而不改 吾末如之何也已矣.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옳은 말로 하는 이야기를 능히 따르지 않겠는가마는, 그 잘못을 고치는 것이 중요하다. 부드럽고 유순한 말로 하는 이야기를 능히 기뻐하지 않겠는가마는, 그 연유를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기뻐하면서도 그 연유를 찾아내지 않고, 따르면서도 그 잘못을 고치지 않는다면, 나로서도 어찌할 방도가 없다.”

  <해설> 법어지언(法語之言)은 바른 이치로써 하는 이야기이며, 손여지언(巽與之言)은 듣기 좋게 부드럽고 유순한 말로 하는 이야기이다. 역(繹)은 그 연유를 찾아내는 것이다.
  누구나 옳은 이야기에는 수긍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러나 그 잘못을 고치지 않는다면, 그것은 겉으로만 듣는 것일 뿐이다. 듣기 좋은 부드럽고 유순한 이야기를 싫어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왜 그런 이야기를 하는가 그 연유를 찾아내지 못한다면, 그 말 속에 숨은 깊은 뜻을 알지 못하고 넘어가는 것이다. 그런 사람이라면 공자와 같은 성인이라도 어찌할 방도가 없으리라.  
  
24, 子曰 主忠信 毋友不如己者 過則勿憚改.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충성과 신의를 중심으로 행동하며, 자기만 못한 자를 벗으로 사귀지 말고, 허물이 있으면 고치기를 꺼리지 말 것이다.”

  <참고> 학이 8에서 나온 말이다. 다만 다른 것은 학이 8에서는 毋 대신 無가 쓰였을 뿐이다.
 
25, 子曰 三軍可奪帥也 匹夫不可奪志也.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삼군의 장수는 빼앗을 수 있지만, 한 필부의 뜻을 빼앗을 수는 없다.”

  <해설> 삼군(三軍)은 큰 제후국의 군대로, 병사가 37,500명이다. 필부(匹夫)는 평범한 사나이다.
  인간의 불굴의 신념을 이야기할 때, 흔히 인용되는 말이다.

26, 子曰 衣敝縕袍 與衣狐貉者立 而不恥者 其由也與. 不忮不求 何用不臧. 子路終身誦之. 子曰 是道也 何足以臧.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해어진 모시 도포를 입고서도, 여우나 담비의 털가죽으로 만든 갖옷을 입은 사람과 함께 서서, 부끄러워하지 않는 자는 유일 것이다.”
  “해치지 않고, 탐하지 않는다면, 어찌 착하지 않겠는가?”
  자로는 이 말을 항상 외우고 있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그 말이 옳기는 하나, 그것만으로야 어찌 족히 좋다고 하겠느냐?” 

  <해설> 폐(敝)는 해어진 것이고, 온포(縕袍)는 모시로 만든 도포이다. 호(狐)는 여우, 학(貉)은 담비이다.
  기(忮)는 남을 해치는 것이요, 구(求)는 지나치게 탐욕을 부리는 것이다. 송(宋)의 보광(輔廣)의 『사서찬소(四書纂疏)』에 의하면 기(忮)는 남이 가진 것을 질투하여 해치려고 하는 것이고, 구(求)는 자기가 없는 것을 부끄러워하여 가지려고 하는 것이다. 장(臧)은 선(善)이다. 종신(終身)은 항상, 늘의 뜻이다.
  不忮不求 何用不臧은 『시경』 패풍(邶風) 웅치(雄雉)의 마지막 장의 마지막 구절이다. 그 마지막 장은 다음과 같다.

    세상 모든 남정네여, 덕행을 모르는가
    해치지 않고 탐하지 않는다면, 어찌 착하지 않겠는가
    百爾君子 不知德行
    不忮不求 何用不臧

  자로가 不忮不求 何用不臧을 종신토록 외운 것은 거기에 만족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다만 악(惡)을 물리칠 수 있을 뿐이지, 선(善)으로 나아가는 것은 아니다. 그런 까닭에 공자가 그를 깨우쳐 더 나아가게 하고자 한 것이다.
 
27, 子曰 歲寒然後 知松柏之後彫也.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날씨가 추워진 후에야, 비로소 소나무와 잣나무가 더디 시드는 것을 알 수 있다.”

  <해설> 세한(歲寒)은 날씨가 추워지는 것이다. 조(彫)는 시드는 것이다.  
  선비는 어려운 처지에 처해 봐야 그 절의를 알 수 있고, 세상이 어지러워야 충신을 알 수 있는 법이다.
 
28, 子曰 知者不惑 仁者不憂 勇者不懼.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지혜로운 자는 의혹이 없으며, 어진 자는 근심이 없고, 용기가 있는 자는 두려움이 없다.”

  <해설> 지혜로운 자는 이치에 밝으므로 사물에 미혹됨이 없다.
  어진 자는 이기적인 욕심을 버리고 남과 더불어 살고자 하므로 남을 속이거나, 빼앗거나, 질투하거나, 미워하는 마음이 없다. 그 마음은 항상 넓고 너그러우며(君子坦蕩蕩―술이 36), 남이 자기를 알아주지 않아도 화내거나 근심하지 않는다(不患人之不己知―학이 16). 하늘을 원망하는 일도 없으며, 인간을 탓하는 일도 없다(不怨天 不尤人―헌문 37). 자기 몸 안의 것, 즉 자기 자신의 학덕을 쌓는 데 노력을 다하다가, 도(道)가 있으면 나아가고 없으면 물러날 뿐이다(邦有道則仕 邦無道則可券而懷之―위령공 6). 그러니 무엇을 근심하겠는가?
  용기 있는 자는 오직 의(義)를 쫓아 행동할 뿐이다. 두려움이 있을 리 없다.

  <참고> 헌문 30에서도 君子道者三이라고 하면서 같은 내용을 말하고 있다.
 
29, 子曰 可與共學 未可與適道. 可與適道 未可與立. 可與立 未可與權.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함께 학문을 할 수는 있으나 같은 길을 갈 수는 없으며, 같은 길을 갈 수는 있으나 같은 입장에 설 수는 없으며, 같은 입장에 설 수는 있으나 함께 권(權)을 행할 수는 없다.”

  <해설> 권(權)이란 상황에 맞게 적절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다. 세상의 일이 항상 변화무쌍하므로, 한 가지 원칙만으로 만사를 다 처리할 수는 없다. 상황에 대응하여 사물의 경중을 헤아리고, 그에 따라 시의적절한 조치를 취함으로써 의(義)에 합치되게 하는 것을 권(權)이라 한다. 신주의 정자(程子)는 권(權)은 추(錘)로 저울질하는 것으로, 可與權은 사물의 경중(輕重)을 헤아려 의(義)에 합치되게 하는 것(權輕重使合義)이라고 한다. 그러나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 환공(桓公) 11년 조(條)에서는 권을 경상(經常)에 반(反)한 연후에 선(善)함이 있는 것(反乎經 然後有善者)이라고 한다. 즉 일시적으로 원칙에 어긋나지만 나중에 좋은 결과를 낳는 것이다.
  학문을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갈고 닦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함께 학문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 나아가야 할 바가 같지 않으면, 함께 같은 길을 갈 수 없다. 같이 선(善)한 길을 간다고 하더라도, 그 믿고 의지하는 것이 같지 않으면, 같은 입장에 서기 어렵다. 같은 입장에 설 수 있더라도, 때에 따라 변하는 상황 속에서 시의적절한 조치를 함께 취하기란 쉽지 않다.

30, 唐棣之華 偏其反而. 豈不爾思 室是遠而. 子曰 未之思也 夫何遠之有.
  “산앵도 꽃이 나부껴 흩날리는구나.
  어찌 너를 생각하지 않으리오마는 집이 너무 멀구나.“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생각하지 않는 것이지, 생각한다면 어찌 멀겠느냐?”

  <해설> 당체(唐棣)는 산앵도이다. 화(華)는 꽃(花)이다. 편(偏)은 꽃잎이 나부끼는 것(翩)이요, 반(反)은 흩날리는 것(翻)이다. 唐棣之華 偏其反而 豈不爾思 室是遠而는 현존 『시경』에는 없는 일시(逸詩)다. 앞의 두 귀는 별다른 뜻은 없고, 뒤의 두 귀를 이끌어내기 위한 것이다.
  위의 시는 남녀간의 사랑의 시이다. 그러나 공자는 여기서도 특유의 단장취의(斷章取義)를 하고 있다. 인(仁)을 생각하지 않아서 그렇지, 생각만 한다면 어찌 먼 곳에 있겠느냐? 술이 29의 “인(仁)이 먼 것이냐? 내가 인을 하려고만 하면, 인이 내게 이른다(仁遠乎哉, 我欲仁 斯仁至矣).”와 같은 뜻이다. 주자의 해설을 따랐다.
  고주에서는 이 장을 권(權)을 말한 위의 장(章)과 합하여 하나의 장으로 하고 있다. 보통 꽃들은 먼저 꽃봉우리가 나온 후 꽃잎이 벌어진다. 그러나 산앵도는 먼저 꽃잎이 벌어지고 나중에 하나로 합쳐진다. 하안은 산앵도 꽃의 이러한 모습이, 처음에는 원칙에 어긋나지만 결국 도에 합치하는(反經合道) 권(權)을 나타내는 것으로 본다. 즉 唐棣之華 偏其反而를 “산앵도 꽃은 외곬으로 반대이구나”로 해석한다. 따라서 뒤의 공자의 말도 인(仁)이 아니라 권(權)에 대해서 한 말로 본다. 즉 권도(權道)라는 것이 생각을 하지 않아서 그렇지, 생각만 한다면 그렇게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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