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지?'는 무슨 뜻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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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는 무슨 뜻일까
  • 박흥열
  • 승인 2010.01.07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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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이 강화로 간 까닭은?] 박흥열②
강화 평화전망대 전경  강화 북단 양사면 철산리 제적봉에 평화전망대가 있다.

 제적봉은 군사지역으로 수십 년 동안 민간인의 출입이 통제된 곳이었는데, 평화전망대가 들어선 뒤 일반인들에게 개방되었다. 평화전망대 앞은 개풍군 삼달리 마을이다. 삼달리는 강화의 마을처럼 너른 들판을 소유하고 있는데, 간척한 농토로 짐작된다.

 평화전망대가 있는 철산리는 한국전쟁이 터지기 전만 하더라도 강화에서 제일 번성했던 포구이다. 염하수로를 따라 올라온 배들의 정박지가 바로 철산리 포구였다. 배들은 여기에서 머문 뒤 다시 예성강, 임진강, 한강으로 빠져 나갔던 것이다. 교동 여자가 마포에 시집가고, 개성 총각이 남쪽 양도면 처녀를 사귈 수 있었던 것은 철산리 포구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온갖 물산을 실은 배들이 철산리 포구 앞바다를 왕래하였는데, 특히 새우를 잡을 때는 러시아워의 도로처럼 배들이 가득했고, 통통거리는 뱃소리 때문에 밤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철산리는 뱃사람과 상인들을 상대로 장사하던 여관, 객주집은 물론 기와집이 꽤 있었을 정도로 번성했는데, 한국전쟁 와중에 군인들이 모두 허물어버려 사람들이 망연자실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곳에서 농사를 짓던 분들이 땅에서 숱한 기와를 캐내었다 하고 지금도 철책선 밑으로 집터의 흔적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평화전망대는 이름에 어울리지 않게 내용물은 안보, 반공 이념을 토대로 반북의식을 조장하는 것 일색이기에 내부에는 볼 게 없다. 그럼에도 나는 누구에게나 꼭 한 번 가보기를 권한다.
 평화전망대에서 바라본 한강, 임진강, 예성강 합수머리
 왜냐하면 전망대에서는 모래무지와 갯벌을 품고 있는 한강, 임진강, 예성강의 합수머리를 한 눈에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강화가 황해, 경기를 아우르는 교통과 물산 교류의 중심지였음을 단박에 알아차릴 것이다. 그리고 역사 지식을 갖추고 있는 이라면 역사적 고비마다 왜 강화가 등장할 수밖에 없는지 필연적인 이유를 유추하도록 해준다.

 내가 강화가 갖는 역사적 무게를 실감한 것은 이태 전 인천의 역사를 만화로 꾸미는 작업을 하면서이다. 만약 강화가 없었다면 인천의 역사를 구성하기 어려울 정도로 강화가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었다. 이뿐만 아니다. 피상적으로 알고 있던 강화가 상상력을 자극하는 대단히 매력적인 곳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 이후 나는 강화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었다.

 강화는 고려시대에는 대몽항쟁 40년을 이끈 임시수도로 都(도읍 도)를 써서 강도(江都)라고 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수도 한양의 최전방 방어선이자 육지에서 난이 터질 경우 신속히 옮겨 올 수 있었던 피난처였다. 물살이 세고, 갯벌이 넓어서 방어가 용이하고, 넓은 벌판에서 식량을 충분히 확보하고 해운을 이용하여 서해안 일대를 왕래하기 수월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근대에는 병인양요, 신미양요, 강화도조약등 조선의 명운을 결정짓는 중요한 정치적 사건이 잇따라 벌어졌다. 그러므로 군청이나 강화사람들이 강화를 ‘호국의 땅’이니 ‘역사문화의 고장’이라고 칭하는 것도 전혀 낯설지 않다.

 하지만 뒤집어 생각하면 그만큼 중요한 곳이었기에 백성들의 희생은 다른 지역에 비해 더 했을 것으로 보인다. 대몽항쟁 40년이란 허울뿐인 명분 아래 백성들이 얼마나 핍박받아야 했는지, 무능한 왕과 기생관료들, 정치군사집단의 대몽항쟁이란 이데올로기는 백성들의 목숨을 담보로 한 것이었고, 전쟁 수행에 동원되었던 백성들은 지배층이 떠난 뒤 몽골군의 살육에 아무런 방비책도 없이 노출되었다.

 조선시대의 병자호란 역시 마찬가지였다. 서인들의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했던 인조는 취약한 정치기반을 다지기 위해 망조가 든 명나라를 섬긴다는 의리와 명분을 내세움으로써 화를 자초하였고, 그로 인해 또 얼마나 많은 백성들이 목숨을 잃었던가. 백성들의 안위와 아무런 상관없이 일족의 부귀영화만을 추구했던 행위가 호국을 위한 것이었노라고 비분강개하는 것은 낯 간지러운 일이다. 그래서 강화도가 함락될 당시 자결한 선원 김상용의 기개는 높이 사야 마땅하지만, 그렇다고 서인들의 맹목적인 친명사대주의가 빚은 비극의 책임을 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아직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한국전쟁 기간 벌어졌던 민간인 학살과 보복, 또한 서해안 최전방으로서 분단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롭지 않은 강화. 1970년대 중반 북에서 내려온 친척을 알리지 않았다 하여 모자간첩단으로 누명을 썼던 이도 있고, 북에 있는 형제 때문에 옥살이를 했던 이도 있었다. 입술을 파르르 떨며 살아서는 맺힌 피멍울이 지워지지 않고 죽어서야 잊혀질 거라던 노인의 모습이 지금도 선명하다.

 예나 지금이나 지배층은 이념과 명분을 내세우지만 뒷감당은 오로지 힘없는 백성의 몫이었다. 전쟁에 동원되고, 식량을 공출해야 했고, 극단적인 대립의 시기에는 어느 한편에 설 것을 강요당했다. 이런 와중에 힘없는 일개 백성이 자신의 의견을 소신껏 밝힌다는 것은 화를 자초하는 일이 아니겠는가. 중요한 요충지였기에 더 많이 시달리고, 생명의 위협을 느껴야 했던 역사의 고단한 흐름 속에서 강화 사람들의 두려움에 대한 기억은 아직도 그들 의식 안에 잠재되어 있지 않을까.

 나는 강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이런 내재된 두려움을 표현하는 듯한 말투를 듣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것은 “그렇지?”라는 말이다. “그렇지?”는 말의 뒤꼬리를 살짝 치켜들며 발음하는데, 주로 대답하기 난처한 질문을 받았을 때의 대답이나 아니면 상대방이 자신의 말을 부정하여 반박할 때 대답으로 많이 사용한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한잔 받으시우” “어제 술을 너무 먹어서 오늘은 안 되겠어.”
 “거참, 누군 술 안먹었나? 한잔 하시우.” “그렇지?”

 또 이런 경우도 있다.

 “북한에 쌀 주면 죄다 무기 만들고 김정일 좋은 일만 시킨다고.”
 “무슨 말씀을…. 그래도 한 동포인데 도와야지요. 올해 쌀값이 내린 것도 북한에 쌀을 안 주니까 많이 쌓여 있어서 그렇대요.” “그렇지?”

 통상적으로 “그렇지”라는 것은 맞다, 동의한다는 긍정의 표현이고, “그렇지?”라고 하는 것은 내 말에 동의하는가를 묻는 표현인데 비해, 강화 사람들의 “그렇지?”는 긍정인지 부정인지 알아차리기 애매하다. 처음에는 내 말에 동의하는 것처럼 들렸는데, 뒤늦게야 동의하지 않지만 거부의사를 밝히기도 어려운 처지를 적당히 넘기는 처세의 답변인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렇지?”라는 말을 듣게 되면 국에 물을 확 부어버린 듯 맹맹하고 김빠지는 느낌이 들고, 또 어렸을 적 술래잡기를 할 때 분명히 봤는데도 슬쩍 나무 뒤로 숨어서 안 들킨 척 시치미를 떼고 있는 동무를 볼 때처럼 얄밉고 얍삽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용례의 말투가 빈번하게 사용되는 까닭은 앞에서 말한 그런 강화의 처지 때문이 아닐까 하고 짐작한다.

 또 다른 지역의 사람들은 강화사람들이 속내를 쉽게 드러내지 않고, 배타적이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자기 삶의 울타리를 위험으로부터 지키려는 강한 방어본능이 배타성으로 드러난 것은 아닐까? 물론 강화는 아직도 집성촌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을 만큼 마을공동체의 유대가 강한 편이다. 그러다 보니 낯선 이가 들어섰을 때 아무런 경계없이 받아들일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백화점의 점원처럼 무한 서비스정신을 발휘하라는 일과 진배없다. 어딜 가나 통과의례가 있는 법. 배타성이라는 것은 어떤 처지에서 보는가에 따라 많이 다르다.
봉천산에서 바라본 하점면 일대 전경
 강화 여자들이 생활력이 강하다고 하는 속설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다. 끊임없이 징발되고 동원되었던 남정네를 바라보기보다 스스로 삶을 꾸리고 개척해야 했기에 강화 여자들은 강해질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내 멋대로 내린 해석이 정답은 아니겠지만 아무튼 나는 그랬다.
 
 내가 강화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영웅호걸이나 불세출의 용사가 지킨 땅이 아니라 온갖 희생과 핍박 아래서도 면면히 살아남았던 이름없는 백성들이 끈질기게 가꾸고 지켜온 땅이기 때문이다. 파편화한 채 점으로만 존재하는 역사문화의 현장에 숨결을 불어넣는 것은 결국 지금 여기에서 살아가는 강화사람들의 삶이다. 그들에겐 강화의 땅과 바다가 바로 생명이었으며 세상의 중심이었다. 강화사람들이 때로는 답답하고 자기 주장이 없는 듯 보일지라도 시냇물의 얼음장 밑으로 여전히 물이 흘러가듯 그들의 삶도 깊게 묵묵히 흐른다. 

 나는 먹고 사는 일이 얼마나 거룩한 것인지 그들에게서 보았다. 결코 경제 논리로 파악할 수 없고, 자본의 눈으로 보기에 비효율적으로 비치는 그들의 노동이 바로 강화를 지켜온 힘이다. 그런 점에서 동네 어르신들에게서 듣는 재미있는 여러 이야기들, 이를테면 배고프고 힘든 시절의 추억이나 어렸을 적 마을 이야기, 그리고 농사짓던 이야기는 물론 개인의 살아온 이력조차 그대로 한편의 강화사가 되는 것이다. 나는 그들을 통해 진짜 강화의 속살을 들여다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뿐만 아니다. 가끔 동네에 초상이 났을 때 일손을 보태고, 화톳불 근처에서 술잔을 돌릴 때, 추수 때 마을 사람들이 술 한잔 하라고 권할 때, 며칠 전 2009년 마을 총회에 갔다가 돌아올 때, 생활의 리듬이 그들과 다르긴 해도 나름대로 방식으로 그들과 섞이고 있다는 것을 자각할 때마다 ‘이 곳을 사랑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요즘에는 나도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대답하기 애매할 때는 어느새 “그렇지?”라는 말투를 사용하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스스로 대견스러워(?)하기도 한다. 또 말의 끝에는 짐짓 “…했시다.” “…하시껴?” “우정(일부러)…” “이 발레(근처)…”와 같은 강화 사투리를 사용하기도 한다. 10년이란 시간이 흘렀으나 동네 사람들에게 아직 우리는 외지에서 온 사람일 뿐이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조금씩 강화사람이 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간다. 착각은 자유이고 내가 그렇게 생각하니까 마음이 편하고 즐겁다.

 박흥렬은 누구?  

 강화군 하점면 이강리 하점들판 가운데에 집을 짓고 산다. 배나무를 기르고 있으며 식구들 먹을거리는 자급자족한다. 오전에는 농사를 포함한 바깥일을 주로 하고 오후, 저녁시간에 주로 만화를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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