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미산마을, 고향을 눈앞에 두고도 62년째 돌아가지 못하고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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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미산마을, 고향을 눈앞에 두고도 62년째 돌아가지 못하고 있죠"
  • 김영숙 기자
  • 승인 2014.05.09 07:21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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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미도원주민귀향대책위원회 위원장 한인덕씨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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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상륙작전을 한 날은 우리나라를 찾아준 날이지만, 월미도에 살던 우리에겐 아픔의 날이고 62년이 넘도록 고생한 날이죠. 6.25가 끝나면서 다들 피난 갔다가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우리는 피난을 안 갔는데 폭격으로 자다가 한밤중에 고향에서 내쫓긴 사람들이에요. 그러고는 그날부터 지금까지 고향을 바로 눈앞에 두고도 돌아가지 못하고 있어요.”

월미도 원주민 귀향대책위원회 위원장 한인덕씨(70) 말이다. 5월 2일에 ‘시 주민 생활안정지원금 지원에 관한 조례안’이 215회 임시회 2차 본회의를 통과했다. 물론 인천시 조례규칙 심의위, 안행부 보고 등의 절차가 남아 있지만, 오랫동안 강제로 빼앗긴 고향을 되찾기 위한 월미도 원주민 귀향대책위원회 사람들은 한시름을 놓았다. 피해보상금이 얼마가 나오든 그것보다는 법을 통과했다는 자체가 기나긴 싸움에서 놓여놨다는 안도감이 들기 때문이다.

젊은 세대들에게는 문화의 거리, 낭만의 거리로 알려진 월미도. 인천시민은 물론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 사람들이 바다를 보기 위해 쉽게 찾는 월미도에는 62년이 넘도록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월미도 사람들이 있다. 인천상륙작전이 개시되면서 살던 곳에 대규모 폭격이 이뤄지면서 맨발로 뛰쳐나와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그곳은 한국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미군이 주둔해 있다가, 전쟁 후 다시 미군이 20년, 한국군이 30년 주둔해 있었고, 현재는 월미공원으로 바뀌어 있다. 고향이 바로 앞인데 고향으로 돌아가 살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현재, 인천시립박물관에서는 잊혀진 기억을 찾아 ‘월미도, 기억 너머의 기억’ 전시회를 7월 30일까지 열고 있다.
 
월미도 원주민 귀향대책위원회 위원장 한인덕씨를 만나 그들이 고향을 찾기 위해 어떻게 애썼는지 들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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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미도 월미공원 입구에 있는 농성장 모습.

 
-시립박물관에서 ‘월미도, 기억 너머의 기억’ 전시회를 하고 있습니다. 전시회를 둘러본 소감이 어떠신가요.

“정말 좋죠. 우리가 전하는 데는 한계가 있잖아요. 그런데 박물관에서 우리의 생각을 전해준다는 게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요. 그것도 석 달 동안이나 전시회를 한다니 참 고맙죠. ‘기억 너머의 기억’, 제목도 잘 정했어요. 보여지는 것 뒤에 '너머' 무슨 일이 있었나, 사람들이 그 뒤까지 생각할 수 있게 돼서 다행이죠. ”


-본회의를 통과해서 한시름 놓으셨겠습니다. 일을 해결하느라 애 많이 쓰셨습니다.

“울기도 많이 울었어요. 여자가 다니니까 좀 깔보는 것 같더라구. 우리 회원들은 배운 사람이 없어요. 처음에는 우리 회원이 서른명이 넘었는데, 다들 연세가 있으셔서 그동안 열분이 돌아가시더라구. 자식들은 먹고 살아야 하니까 회비는 내도 참여는 못하거든요. 고향을 찾겠다고, 한을 풀겠다고 마음을 잡수셨는데 건강이 안 따라주니까 세상을 떠나게 되고… 그게 참 속상했어요. 그래도 힘을 낼 수 있었던 건, 도와주는 분들이 계셔서 버틸 수 있었어요. 박사님들, 국회의원, 시의원 님들이 신경 많이 써주셨어요.”
 
“회원들은 연세 때문에 어디를 돌아다니지 못하고 마음으로만 하시지. 한밤중에 폭격으로 고향을 떠날 때 30~40대였던 분들은 벌써 돌아가셨어요. 지금 살아계시면 100세잖아요. 그 당시에 10대들이 지금 70살 넘고 80살인 거지. 우리가 고향을 찾겠다고 하면 변호사나 시나 다 토지대장을 내놓으라고, 살았던 증거를 대라는 거예요. 증거가 없다고 하면 거기서 그만이고. 토지대장은 우리가 없을 수밖에 없어요. 6.25 전에는 일본사람한테 빼앗겼고, 6.25 나기 직전에 하랬는데, 바로 전쟁이 났어요. 한국전쟁이 끝나고 바로 우리가 들어갔으면 됐어요. 이북에서 온 사람들이 살고 있으면 내 땅으로 만들어줬거든요. 하지만 월미도 사람들은 막아서 못 들어갔어요. 그래서 토지대장이 없는 거죠. 근데 그건 묻지 않고, 현재로선 증거가 있어야 해결한다고만 말했어요. 예전 가구 행정을 다들 모르죠. 그걸 갖고 싸운 거예요. 없는 이유는 있을 경험이 있었는데 상륙 때문에 못 들어가서 없는 거다…. 월미도 입구에 가건물을 지어놓고 농성한 지 10월 7일이 되면 딱 10년째야. 2004년에 시작했어요. 월미도 입구라 오가는 사람들이 뭔가 하면서 관심을 갖기도 했죠.”


-‘인천상륙작전’하면 다들 미군이 우리나라를 도와줬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작전으로 피해를 본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도 많습니다. 고향을 바로 눈앞에 두고 갈 수 없는 마음이 오죽하셨을까 싶습니다.

“맞아요. 하지만 그동안 내가 하도 떠들고 다녀서 이제 좀 아는 사람이 있어요.(웃음) 기관에 있는 사람들은 좀 알아요. 어떤 사람은 한국전쟁 때 폭격 안 당한 데가 어딨어, 사람 안 죽은 데가 어딨어, 해요. 물론 전쟁터니까 사람이 죽는 건 당연한데, 우리는 계획적인 거잖아요. ‘작전’이잖아요. 민간을 보호하지 않고, 피신하라는 말도 하지 않고 자는 사람들한테 폭격하는 게 어딨어요? 1949년 제네바협상에 민간인보호라는 게 있더구먼. 인민군은 땅굴 파는 것 때문에 산 꼭대기에 살았대요. 밤에는 불러다 땅굴 파게 하고 쌀 한 됫박 줬대요. 월미도에 사는 사람들은 피난을 간 사람도 있고, 안 간 사람도 있어요. 피난을 갔다가 돌아온 사람도 많구요.”


-예전에는 인천역에서 월미도를 어떻게 다녔나요. 한때 해수욕장을 비롯해 휴양 시설도 많았습니다. 그 흔적들이 아직 있나요.

“월미도는 섬이고, 그 옆이 하인천이잖아. 예전에는 배로 다녔지만 1922년도에 일본 사람들이 와서 돌다리를 놨대. 만조가 되면 다리 위로 물이 찰랑거리고, 물이 빠지면 다리가 됐대. 나중에는 더 높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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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미도 야외 해수욕장에서 사람들이 더위를 식히며 물놀이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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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궁각은 물이 빠지면 기둥이 다 보였고, 마을 사람들은 기둥이 몇 개인지 다 알았다.

 
“해수욕하고, 놀러오는 사람이 참 많았대요. 나는 전쟁 때 이북에서 금촌으로 넘어와 살다가, 남편 만나 결혼해서 이리로 와서 들은 얘기지. 지금 월미도는 아무것도 아니래요. 용궁각이라는 데가 있었는데 기둥을 세워 기와집을 지었대요. 어르신들은 기둥이 몇 개인지도 알아요. 물이 빠지면 기둥 있는 집이 되고, 물이 들어오면 바다 위에 집이 되는데 아주 멋있었대요. 지금 GS칼텍스 자리래요. 또 지금 연안부두에 있는 해수탕처럼, 조탕이 있었대요. 근데 해수탕이 아니고, 온천마냥 물을 걸러서 온천물을 만들어서 물이 아주 좋았대요. 전국에 사는 사람들이 월미도 한 번 다녀가는 게 꿈이고, 신혼여행지로 꼭 가고 싶은 곳이었대요.”

“외국 사람들도 많이 들어와서 월미도 사람들이 빨리 깨였대요. 1945년 해방되고 미군기지가 월미도에 들어왔다가 1949년도에 나갔어요. 그러고 나서 몇 달 있다가 전쟁이 난 거지. 그러고 나서 인천상륙작전으로 미군이 다시 원주민을 내쫓고 차지했어요. 상륙작전으로 들어오면서 원주민부터 때렸잖아요. 한번에 몰살시키려고 한 거야. 윗동네 사는 사람들은 저기로 도망가고, 아랫동네 사는 사람들은 바다로 뛰어들고… 그러는 사람들을 기관총으로 쐈대요. 물론 공산군도 있다고 생각했겠지만, 어린애를 데리고 할머니가 뛰는 데도 쐈다는 거야. 아침에 때리고 점심 저녁에 때리고, 11일에는 날이 흐려서 중단하고, 먹을 게 있나 하고 미군이 들어와보니 아무것도 없더래. 그래서 시체를 가매장시키고, 12일부터 또 폭격한 거야. 그 다음부터는 온 산을 폭격해서 쑥대밭을 만들어놨지. 그리고 15일은 한 시간도 안 걸리고 45분 걸려서 그냥 들어왔대. 미군은 자기 부대를 그대로 찾았지. 근데 자기네가 살던 집은 하나도 안 건드렸어. 그래서 고의적이라는 거야. ‘작전’이라는 거지. 뭐, 거기는 공산군이 안 들어갔나, 들어갔지.”


-미군이 1945년에 들어왔다가 1949년에 나갔고, 한국전쟁이 끝나면서 다시 들어와 20년 동안 월미산에 있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한국군이 30년을 있었구요. 그후로 월미공원으로 된 지 10년이 넘었습니다. 고향이 바로 눈앞인데도 월미도 사람들은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셨네요.

“사람들이 부모를 그리워하는 건 엄마 뱃속에 나와서 그래. 엄마 뱃속이 고향이야, 품이야. 태어나 자란 곳도 부모 품 같은 거거든. 그래서 그리워하는 거거든. 그 품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는 거지. 평생 나그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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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미도 미군폭격희생자 위령제를 지내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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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미도 사람들이 살던 마을은 이제 공원으로 바뀌어 있다.


-기나긴 싸움이 끝나서 한시름 놓으셨겠습니다. 이제는 어떻게 지내실 건가요.

“우리 영감님 도와줘야 돼요. 농성장 지키면서 운동 못하고, 거기서 자고 밥 잘 챙겨먹지 못해서 병이 나 쓰러졌어. 조금씩 나빠지다가 3년 전에 넘어졌어. 누가 농성장을 떼어가나, 집이 가까운데도 라면 끓여먹으면서 농성장을 지켰어. 내가 여기저기 돌아다니느라 영감님을 잘 돌보지 못했어. 집에 있었으면 휠체어에 태워 돌아다녔을 텐데. 오늘 목욕 시키느라 보니까 먼젓번만큼도 못 걸어. 예전에는 붙들고 다녔는데…. 이젠 돌아다니는 일은 끝났으니까, 당신하고만 있겠다고 하니까 고맙대. 미안한 마음에 “여보, 내가 당신을 만나서 이렇게 돌아다닌 거야. 왜 월미도에 살아서 나를 돌아다니게 해” 하면 웃어. 나는 미안하니까 그래서 돌아다닌다고 말하는 거지.”

“노점 장사는 토, 일요일 주말만 해. 다른 날은 하고 싶어도 사람이 없어서 못해. 요새는 저녁에 돌아다니는 사람은 다 중국 사람이야. 중국 사람들은 뭘 하나 사도 싸 달래. 숙소에 가서 먹나봐. 핫도그 하나를 사도, 닭고치를 사도 다 싸 달래. 말이 안 통해도 다 팔 수 있어. 서로 뭘 달라고 하는지 다 안다구.(웃음) 중국말을 나도 못 알아듣지, 그 사람들은 한국말을 못 알아듣지, 그래도 다 알아들어.(웃음) 군밤, 핫도그, 닭고치, 문어발, 소시지, 옥수수… 여름에는 소시지… 다 팔아.(웃음)”


월미도는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지니고 있는 곳이다. 인천상륙작전으로 대한민국을 되찾았지만, 그 뒤에는 아직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자다가 한밤중에 뛰쳐나온 사람들. 그들은 하인천에서 원목 껍질을 벗겨 내다팔고, 석탄기차에서 떨어지는 석탄을 주워 팔면서 생계를 이었다. 아무런 토대 없이 세상을 살아온 사람들이다. 월미도에 갈 일이 있거든, 꽃이 흐드러지게 핀 월미공원을 거닐 일이 있거든, 새우깡을 던지며 바다를 바라볼 일이 있다면, 그러한 즐거움 뒤에는 고향을 지척에 두고 돌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도 함께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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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필 2014-05-10 09:24:19
반드시 돌려드려야지요 이런 사실을 몰랐네요
할머니들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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