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편 선진(先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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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1편 선진(先進)
  • 이우재
  • 승인 2010.06.28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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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1편 선진(先進)

  선진 편에는 다른 데서는 거의 언급되지 않았던 민자건(閔子騫)에 대한 기록이 4장이나 실려 있다. 주자는 이 사실에 근거하여 혹 민자건의 제자들이 기록한 것이 아닐까 의심하고 있다.
  또한 인(仁)이라는 글자가 한 번도 나타나지 않고 있는 것도 이 편의 특징이다.

1, 子曰 先進於禮樂 野人也. 後進於禮樂 君子也. 如用之則吾從先進.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옛 선비의 예와 악은 야인처럼 질박하고, 요즈음 선비의 예와 악은 군자처럼 그 꾸밈이 아름답다. 만일 어느 한 쪽을 쓴다면, 나는 옛 선비를 따를 것이다.”

  <해설> 선진(先進), 후진(後進)은 옛 선비와 지금 선비를 말한다. 야인(野人)은 그 꾸밈(文)이 본바탕(質)보다 적어 소박한 것이다. 군자(君子)는 여기서는 그 꾸밈(文)이 본바탕(質)보다 많은 것이다.
  옹야 16에 “본바탕이 꾸밈을 누르면 야인처럼 거칠고, 그 꾸밈이 본바탕을 누르면 문서나 다루는 사관과 같을 것이니, 꾸밈과 본바탕이 고루 어울려야만 군자답다고 할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본바탕이나 꾸밈 모두 한쪽으로 치우쳐서는 안 될 것이나, 당시의 선비들이 너무 꾸밈에 치우쳐 있으므로 그것을 경계한 말로 생각된다.
  신주를 따랐다. 고주에서는 선진, 후진을 벼슬의 선배, 후배로 보고 있다. 형병(邢昺)의 『논어주소』는 고주를 부연하여 말하길 선진은 공자의 제자 중 양공(襄公), 소공(昭公) 시대에 벼슬한 사람, 후진은 정공(定公), 애공(哀公) 시대에 벼슬한 사람이라고 하고 있다.
  그러나 청의 유보남(劉宝楠)은 『논어정의』에서 전혀 다른 해석을 내놓고 있다. 그에 의하면 先進於禮樂은 먼저 예악을 배운 후 벼슬에 나아가는 것이고, 後進於禮樂은 먼저 벼슬에 오르고 난 후 예악을 배우는 것이다. 상고(上古) 시대의 사람을 쓰는 법은 먼저 예악을 공부하게 한 후 그 중 출중한 자를 뽑아 벼슬길에 나아가게 하는 것이었다. 야인(野人)이라 함은 그렇게 아직 벼슬길에 이르지 못하고 있는 자를 말한다. 그러나 춘추 시대에 이르게 되면 경대부(卿大夫)의 지위가 세습되었기 때문에 그 자식들은 학문을 익히지 않고서도 벼슬길에 오를 수 있었다. 군자(君子)란 바로 그런 경대부의 자식을 일컫는 말이다. 그들은 벼슬길에 오르고 나서야 필요한 학문(예악)을 공부하였다. 공자는 당시의 이러한 세태를 개탄하고, 상고 시대의 법제로 돌아갈 것을 주장한 것이다. 상고 시대 사람을 쓰는 법이라고 유보남이 주장한 것이 과연 얼마나 역사적 사실에 입각한 것인지는 심히 불분명하나, 아무튼 재미있는 해석이라고 생각된다.

2, 子曰 從我於陳蔡者 皆不及門也. 德行 顔淵閔子騫冉伯牛仲弓. 言語 宰我子貢. 政事 冉有季路. 文學 子游子夏.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진나라와 채나라에서 나를 따랐던 제자들은 모두 벼슬길에 나아가지 못하였다.”
  덕행에는 안연․민자건․염백우․중궁이요, 언어에는 재아․자공, 정사에는 염유․계로, 문학에는 자유․자하이다.

  <해설> 고국인 노나라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자, 공자는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하여 기나긴 방랑의 길에 나선다. 『사기』에 의하면, BC 497년, 노나라 정공(定公) 13년으로, 공자의 나이 55세 때의 일이다. 이후 아무런 성과도 없는 13년 간의 긴 방랑 생활을 마치고, 노나라로 돌아온 것은 BC 484년, 노나라 애공(哀公) 11년, 공자 나이 68세 때였다. 진나라와 채나라에 들른 것은 이 긴 여행이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다. 그곳에서 공자 일행이 겪은 고초는 이루 형용할 수 없을 정도였다. 위령공 1에서는 공자 일행이 진나라에서 양식이 떨어지고, 수행원들은 병에 걸렸었다고 기록하고 있다(在陳絶糧 從者病莫能興). 또한 맹자(孟子)는 「진심(盡心)하」편 18에서 “군자(공자)가 진나라와 채나라 사이에서 액(厄)을 당하신 것은 상하 간에 사귐이 없었기 때문이다.”라고 하고 있다. 자세한 이야기는 『사기』 「공자세가」에 실려 있다.
  不及門의 문(門)은 고주의 정현에 의하면 벼슬에 이르는 문이다. 주자의 신주(新注)에서는 지금 자신의 문하(門下)에 있지 않다는 뜻으로 풀이한다. 다산은 공자의 제자들이 공자를 호위하느라 뒤에 처져 아직 성문에 도착하지 못한 것이라고 보고 있다. 진나라와 채나라에서 공자를 수행했던 제자들이 구체적으로 누구누구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덕행(德行), 언어(言語), 정사(政事), 문학(文學)을 공문의 사과(孔門四科)라고 한다. 그리고 여기에 언급된 열 명을 공문의 십철(孔門十哲)이라고 부른다.
  덕행(德行)이라 함은 도덕적인 실천을 의미한다. 언어, 정사, 문학과 더불어 넷으로 분류되고 있으나, 실상에 있어서는 나머지 셋 위에 군림하는 개념일 것이다. 안연은 공자 자신이 가장 아꼈던 제자였던 만큼 그 덕행도 뛰어났다. 옹야 9에도 보이듯이 가난에도 불구하고 학문을 하는 즐거움을 결코 버리지 않았던 안연에 대해서는 새삼 설명할 필요도 없으리라.
  민자건은 옹야 7에서 비(費)의 읍재(邑宰)가 되는 것을 사양하고 있다. 또한 그 효행이 뛰어났음을 선진 4에서 알 수 있다. 선진 13에도 백성을 위하여 옛 창고를 그대로 쓰자고 한 민자건의 일이 기록되어 있다.
  염백우는 옹야 8에 몹쓸 병에 걸렸다는 기록이 있을 뿐으로, 그 자세한 행적은 논어에 나타나 있지 않다.
  중궁은 옹야 1에 가히 임금을 삼을 만하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 덕행이 뛰어났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또 공야장 4에 말재주는 없으나 어질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옹야 4에서는 비록 신분은 천하나 산천의 신이 아낄 정도로 인덕이 훌륭하다고 하였다.
  언어(言語)는 말솜씨로, 황간의 『논어의소』에 인용된 범녕(范甯)의 해설에 의하면 외교상의 언사(言辭)를 뜻한다. 재아는 팔일 21에서 주나라의 사(社)가 밤나무인 사실을 갖고 말하기를 백성을 전율케하기 위한 것이라는 궤변을 전개했다가, 공자에게 꾸중을 들은 바 있다. 또 옹야 24에서는 어진 자라면 사람이 우물에 빠졌을 때 그 우물 속까지 따라 들어가야 하느냐고 공자에게 묻고 있다. 그리고 양화 21에서는 삼년상은 너무 길어 일년상으로 해야 한다고 나름대로의 정연한 논리로 주장하고 있다. 그 말재주가 궤변에 가까울 정도로 빼어났음을 알 수 있다.
  자공은 논어에 자주 나오는 인물로 안회와 더불어 그 재주를 다툴 정도였다. 그리하여 공자는 공야장 3에서 그를 종묘에서 제사를 지낼 때 쓰는 그릇인 호련(瑚璉)에 비유했으며, 공야장 8에서는 그가 아직 안회만 못함을 깨우쳐 주면서 더욱 정진할 것을 독려하고 있다. 술이 14에서 자공은 공자가 위나라 임금을 도울지 여부를 백이숙제의 고사를 빗대어 묻고 있다. 또 자한 12에서는 공자가 높은 학덕을 갖고 있음에도 초야에 묻혀 지내는 것을, 좋은 옥에 비유하여 그 옥을 팔 것을 은근히 권유하고 있다. 모두 그 말재주의 일단이리라. 『사기』 「중니제자열전」에는 자공의 말재주를 극명하게 나타낸 일화가 하나 기록되어 있다. 거기에서 자공은 노나라의 사자로 활동하여, 그 교묘한 변설로 노나라를 제나라의 침략으로부터 구출함은 물론, 오(吳), 월(越), 진(晉), 제(齊) 간에 일대 파란을 야기하고 있다.
  정사(政事)는 정치다. 염유는 노나라 계씨를 섬겼다. 그러나 염유의 정치에 대해 공자는 그리 기꺼워하지 않았다. 팔일 6에서는 계씨가 태산에 여제(旅祭)를 지내는 것을 염유가 막지 못한 데 대해 비판하고 있다. 또 선진 16에서도 공자는 염유가 계씨를 위해 세금을 지나치게 많이 걷는 것을 비난하며, 제자들에게 그를 공격하라고까지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자가 공야장 7에서 염유가 천 호의 읍과 백승(百乘)의 가문을 맡아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정사에 어느 정도 재질이 있었던 것은 분명한 듯하다.    
  계로(季路)는 자로이다. 공야장 7에서 천승(千乘)의 나라의 군사 문제를 맡을 능력이 있다고 공자로부터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계로의 정치 또한 공자에게 그리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선진 23에서 공자는 염유와 계로가 그저 자리나 차지하고 있는 그런 신하에 불과하다고 한 바 있다. 또 선진 24에서 자로는 어찌 학문을 하고 난 이후에만 백성을 다스릴 수 있느냐고 항변하다가 공자로부터 망령되이 궤변을 늘어놓는다고 꾸중을 듣고 있다. 또 자로 3에서는 정치의 요체가 이름을 바로하는 것(正눍 정치는 공자의 주장을 우원하다고 비판하고 있다. 계로는 결국 위나라 출공(出公) 부자의 권력 투쟁에 휘말려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다.
  문학(文學)은 오늘날의 문학(Literature)이 아니라, 고전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뜻한다. 자유가 고전에 해박했음을 말해주는 기록은 논어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예기(禮記)』 「단궁(檀弓)상」편에 증자와 자유가 예에 관한 논쟁을 벌이다, 결국 증자가 자유에게 손들고 말았다는 기록이 있다.
  자하는 자장 12에서 그 문하 제자들이 자잘한 예의범절에는 밝으나, 근본이 없다고 자유로부터 비판받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예에 관한 고전에 통달하고 있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德行 顔淵閔子騫 … 文學 子游子夏가 누구의 말인지는 불분명하다. 또한 공자의 다른 제자들, 즉 유자나 증자, 자장과 같이 논어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들이 왜 빠졌는지도 분명하지 않다. 생각하건대 이 구절은 공자의 말이 아니라, 후대에 전해오던 말이 논어의 편찬 과정에서 끼어 들어간 것이리라. 따라서 별도의 장으로 분리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된다. 고주에서는 德行 顔淵閔子騫 이하를 별도의 장으로 분리하고 있다. 그러나 주자는 이 말을 從我於陳蔡者 皆不及門也와 연결시켜 하나의 장으로 만들면서, 공문십철(孔門十哲)이 당시 공자의 문하에 있었던 사람들만을 지칭한 것이라고 하고 있으나 수긍하기 어렵다.
 
3, 子曰 回也 非助我者也. 於吾言無所不說.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안회는 내게 도움이 안되는 사람이다. 나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없도다.”

  <해설> 설(說)은 조기빈(趙紀彬)의 『논어신탐(論語新探)』에 의하면 이해하는 것(解)이다. 고주(古注)의 공안국(孔安國)이나 황간(皇侃)의 『논어의소』에서도 그렇게 풀이하고 있다.
  남을 가르치는 사람은 가르치는 과정에서, 자기가 이미 알고 있던 것을 더 깊게 이해할 수 있고, 또 새로운 것들을 찾아내어 지식이 더 풍부해질 수 있다. 즉 가르친다는 것은 일방적인 지식의 주입이 아니라, 가르치는 자와 가르침을 받는 자와의 변증법적인 상호 관계를 통한 지식의 확대, 심화 과정이다. 그런데 안회는 공자의 가르침을 모두 이해하고, 묵묵부답으로 있으니, 변증법적인 상호 관계가 이루어질 수 없다. 안회의 뛰어남을 칭찬한 말이다.
  팔일 8에서 巧笑倩兮 美目盼兮 素以爲絢兮의 뜻을 묻는 자하와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서 공자는 “나를 일깨워 주는구나, 상이. 비로소 더불어 시를 말할 만하다.”라고 하고 있다. 즉 자하와의 대화 속에서 공자 자신도 얻은 바가 있었던 것이리라. 안회와는 대비되는 모습이다.
      
4, 子曰 孝哉 閔子騫. 人不間於其父母昆弟之言.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효자로다, 민자건은’이라고 하더니, 사람들은 부모 형제의 그 말에 무어라 끼어 들지를 못하는구나.”

  <해설> 孝哉 閔子騫은 공자의 말이 아니라, 당시 세상 사람들의 말이며, 또한 동시에 민자건의 부모형제의 말이기도 하다. 간(間)은 틈 사이로 끼어 드는 것이다. 곤제(昆弟)는 형제이다. 민자건의 부모형제가 “효자로구나, 민자건은”이라고 하고 다니고, 또 당시 사람들도 그렇게 말하고 다녔음에도 불구하고, 누구 한사람 그 말에 대해 무어라 다른 말로 끼어 들지 못했다는 뜻이다. 민자건의 효행이 널리 세상으로부터 인정받고 있음을 칭찬한 말이다. 다산의 해설에 의거했다.
  한(漢)의 한영(韓嬰)이 쓴 『한시외전(韓詩外傳)』에는 민자건의 효(孝)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일화가 소개되어 있다. 민자건의 친어머니가 일찍 죽어 아버지는 후처를 맞이하였다. 민자건의 새어머니는 자식을 둘을 낳았으나 민자건을 몹시 박대하였다. 어느 날 아버지는 민자건이 갈대꽃으로 만든 얇은 옷을 입고 추숄을 떨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새어머니가 낳은 두 자식은 모두 두터운 옷을 입고 있었다. 아버지는 화가 나서 새어머니를 내쫓으려고 하였다. 민자건이 말하길 “어머니가 계시면 한 자식이 추숄을 떨지만, 어머니가 안 계시면 세 자식이 추숄을 떱니다.”라고 하였다. 아버지는 민자건의 말이 옳다고 생각하여 새어머니를 내쫓지 않았다. 이 말을 전해 들은 새어머니도 회개하여 이윽고 자애로운 어머니가 되었다.

5, 南容三復白圭. 孔子以其兄之子妻之.
  남용이 백규의 시를 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외고 있음에, 공자께서 형의 따님과 결혼시키셨다.

  <해설> 백규는 『시경』 대아(大雅) 탕지습(蕩之什)의 억(抑)에 나오는 시구이다. 그 부분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백성을 바로 이끌고 제후의 법도를 삼가 지키며
    뜻밖의 환난에 대비하고 말을 삼가
    공경하고 위의를 지킨다면 화평하지 않을 리 없네 
    흰 구슬의 흠은 다시 갈면 되지만
    말을 잘못해서 생긴 허물은 어쩔 도리가 없네
    質爾人民 謹爾侯度
    用戒不虞 愼爾出話
    敬爾威儀 無不柔嘉
    白圭之玷 尙可磨也
    斯言之玷 不可爲也

  삼복(三復)은 여러 번 되풀이하는 것이다.
  남용이 백규의 시를 여러 번 되풀이하여 왼 것은 말의 허물을 적게 하기 위해서이다. 공야장 1에서 공자가 남용을 평하여 말하길 “나라에 도가 있으면 들어 쓰일 것이요, 나라에 도가 없더라도 형벌은 면할 것이다.”라고 했으니, 그 말이 신중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참고> 공야장 1에도 남용에게 형의 딸을 시집보냈다는 내용이 있다.

6, 季康子問 弟子孰爲好學. 孔子對曰 有顔回者 好學. 不幸短命死矣. 今也則亡.
  계강자가 묻기를 “제자들 중에 누가 학문을 좋아합니까?”
  공자께서 대답하시기를 “안회라는 자가 있어 학문을 좋아했습니다만, 불행하게도 명이 짧아 일찍 죽었기 때문에 지금은 없습니다.”

  <참고> 옹야 2에도 같은 내용의 문답이 있다. 

7, 顔淵死. 顔路請子之車以爲之槨. 子曰 才不才 亦各言其子也. 鯉也死 有棺而無槨. 吾不徒行以爲之槨. 以吾從大夫之後 不可徒行也.
  안연이 죽자, 그의 아비 안로가 공자의 수레로 초빈(草殯)에 쓸 덧널을 만들겠다고 청하였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재주가 있거나 없거나 각자 자기 자식이오. 내 아들 이가 죽었을 때도, 관은 있었으나 덧널은 없었소. 나는 걸어다니면서까지 덧널을 만들지는 않았소. 내가 대부의 말석에라도 있는 이상, 걸어다닐 수는 없었기 때문이오.”

  <해설> 안로(顔路)는 안연의 아버지로, 이름은 무요(無繇)이다. 곽(槨)은 관(棺)을 넣는 바깥관, 즉 덧널이다. 請子之車以爲之槨에 대해서 고주(古注), 신주(新注) 모두 안로가 집이 가난하여, 공자의 수레를 얻어다 그것을 팔아 장례 때 쓸 덧널을 장만하려고 한 것으로 해설하고 있다.
  그러나 청(淸)의 환무용(宦懋庸)의 『논어계(論語稽)』의 설명은 다르다. 환무용은 공자가 고급 가죽옷(裘)도 있는 등 그렇게 곤궁하지 않았는데, 안로가 수많은 것들 중 하필이면 공자가 몸소 타고 다니는 수레를 청했는가에 주의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대부가 타고 다니는 수레는 시장에서 사고 팔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따라서 안로가 공자의 수레를 청한 것은, 그것을 팔아 장례 때 쓸 덧널을 장만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그 수레를 꾸며 초빈(草殯)할 때 쓸 덧널을 만들려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초빈할 때 수레로 덧널을 꾸미는 것은 천자나 제후의 예로, 사(士)의 신분인 안연에게 해당되는 것은 아니있는 것그래서 공자가 안로의 청을 거절한 것이라고. 고증이 문제가 되나, 수레를 팔아 장례 때 쓸 덧널을 장만하려고 했다는 고주(古注), 신주(新注)의 주장보다는 덜 어색해 보인다.       
  이(鯉)는 공자의 아들로, 자는 백어(伯魚)이다. 50세의 나이로 공자보다 일찍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대부는 도보로 걷지 아니하고, 수레를 타는 것이 당시의 법도였다. 공자가 아무리 안연을 사랑했다 하더라도 예를 어기면서까지 안연의 장례를 치를 수는 없었다. 큰 슬픔 속에서도 예를 어기지 않으려고 하는 공자의 마음가짐이 여실히 나타나고 있다.
  안연의 죽음에 대하여 『공자가어(孔子家語)』는 31세 때라고 하였으나, 청의 학자들은 고증을 통해 41세 때라고 밝히고 있다.
  이하 10장까지 모두 顔淵死로 시작하고 있다. 전부 안연의 죽음과 관계되는 내용을 다룬 것이다. 

8, 顔淵死. 子曰 噫 天喪予. 天喪予.
  안연이 죽자,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아아! 하늘이 나를 버리는구나! 하늘이 나를 버리는구나!”

  <해설> 희(噫)는 상심하여 통탄하는 소리이다.
  안연은 공자에게 똑똑한 제자 이상의 존재였던 것 같다. 자신은 이제 저 흘러가는 세월에 묻혀 조만간 이 세상을 떠날 수밖에 없지만, 안연이 있음으로 인해 자신의 도(道)는 세상에 이어져 갈 것이다. 그리고 비록 자신은 꿈을 실현하는 데 실패했지만, 저 안연을 통해 언젠가 나의 꿈은 실현될 수 있으리라. 공자가 안연에게 이러한 기대를 가졌던 것은 아닐까? 그러한 기대가 안연의 돌연한 죽음으로 인해 산산이 부서지게 되자, 하늘이 자신을 버린다고 비통해 한 것은 아닐까? 바로 뒤의 장과 더불어 안연의 죽음에 대한 공자의 비통함이 절절하게 와 닿고 있다.
  한(漢) 대의 학자들은 이 장을 해석할 때 자한 8의 “봉황새도 오지 않고, 황하에서 그림도 나오지 않으니, 나도 이제 그만인가?”와 연관지어 해석한다. 한(漢) 대 초기에 성립된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이나, 『사기』의 저자인 사마천(司馬遷), 동중서(董仲舒), 유흠(劉歆) 등 한(漢) 대의 학자들에 의하면, 공자는 하늘로부터 성인(聖人)의 덕은 부여받았으나, 새로운 천자의 등극을 예고하는 상서(祥瑞)를 초치(招致)할 수 있는 능력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천자가 될 수 없었다. 그런데 천자가 될 사람에게는 그를 보좌할 인재가 함께 따라 온다. 은(殷)나라 탕왕(湯王)에게 이윤(伊尹)이 있었고, 주(周)나라 무왕에게 태공(太公)이 있었듯이 말이다. 안연은 공자에게 있어서 자신을 보좌해 천자의 업(業)을 이루게 할 이윤이나 태공과 같은 존재였다. 그런데 이제 그 안연이 죽고, 또 천자의 업(業)을 예고하는 봉황이나 황하의 그림 같은 상서(祥瑞)마저 나타나지 않게 되자, 공자는 하늘이 자신의 꿈을 이루어 주지 않을 것이라고 믿게 된다. 그리하여 마침내 성인(聖人)을 상징하는 상서로운 짐승인 기린(麒麟)이 잡힌 것을 보고는 이제 자신은 완전히 끝났다고 판단한다. 그리고 멀지않아 공자는 이 세상을 떠나고 만다.
  동중서를 위시한 한(漢) 대 학자들의 이러한 주장은 유교(儒敎)가 한(漢) 대에 국가의 공인 이데올로기가 되는 과정 속에서 얼마나 공자의 원래 가르침으로부터 멀어졌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공자가 비록 천(天)을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인간사는 인간의 책임 하에 있다고 생각한 합리주의자로서, 일체의 신비주의를 배격하였음은 새삼 다시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런 공자가 봉황이나 기린 같은 현실에 존재하지도 않는 상서(祥瑞)가 없어 자신이 천자가 되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운운함은 공자를 모욕하는 것이다. 이러한 한 대 학자들의 주장은 덕(德)이 있는 자가 임금이 되어야 한다는 공자, 맹자 이래의 가르침과 현실의 군주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아니 적극적으로 인정하여 현실의 권력 세계에 참여하고자 한 한(漢) 대 유가(儒家)들의 현실적 필요성이 상호 절충된 결과이다. 그리고 그러한 절충의 결과 유가는 비록 현실의 권력 세계에는 참여할 수 있게 되었으나, 그만큼 공자로부터는 멀어지고 말았다.

9, 顔淵死. 子哭之慟. 從者曰 子慟矣. 曰 有慟乎. 非夫人之爲慟而誰爲.
  안연이 죽자, 공자께서 통곡을 하셨다. 따라간 사람이 말하길 “선생님께서 통곡을 하셨습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내가 통곡을 했더란 말이냐? 이 사람을 위하여 통곡하지 않으면 누구를 위하여 통곡한단 말이냐?”

  <해설> 통(慟)은 슬픔이 지나쳐 통곡하는 것이다.
  평소의 공자의 가르침에 의하면 슬픔도 절제하여 나타내야 한다. 그런데 공자 자신이 안연의 죽음에 슬픔을 못 이겨 통곡을 하고 말았다. 그것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함께 따라간 제자가 그 사실을 지적하자 “내가 안연을 위해 통곡하지 않으면 누구를 위해 통곡하겠느냐?”고 하고 있다. 공자가 얼마나 깊이 안연을 사랑했는가가 눈앞에 보듯 선하다.

10, 顔淵死 門人欲厚葬之. 子曰 不可. 門人厚葬之. 子曰 回也視予猶父也 予不得視猶子也. 非我也 夫二三者也.
  안연이 죽자, 문인들이 그의 장례를 성대하게 치르려고 하였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아니 된다.”고 하였으나, 문인들이 성대하게 장례를 치렀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회는 나를 보기를 아비처럼 하였는데, 나는 그를 자식처럼 대해 주지 못하였구나. 내가 그런 것이 아니라, 너희들이 그런 것이다.”

  <해설> 문인은 공자의 문인들이다. 안연의 높은 덕행은 동문들로부터도 존경받고 있었다. 그러기에 그들은 안연의 장례를 성대히 치르기를 원했다. 그러나 공자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가난하면 가난한 대로 정성을 다하여 장례를 치르면 되지, 억지로 성대히 치르려고 하는 것은 허례(虛禮)로 예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인들은 공자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 장례에 공자는 무어라 직접 나설 수 있는 입장이 아닌 제삼자였기 때문이다. 문인들은 안연의 아비인 안로의 뜻에 따라 성대히 장례를 치렀다.
  予不得視猶子也는 안연에게 자신의 자식인 이(鯉)처럼 형편에 맞는 합당한 장례를 치러 주지 못했음을 말한다. 이가 피를 이어간 친자식이라면, 안연도 비록 피는 다르지만, 자신의 도(道)를 이어간 정신적 자식이다. 안연도 자신을 아비 대하듯 하였지만, 자신도 또한 안연을 자식처럼 생각하였다. 만일 안연을 자식처럼 대했다면 이 분에 넘친 장례는 막았어야 했다. 그런데도 안연의 친아비인 안로의 뜻에만 맡겨 안연의 장례는 이 지경이 되고 말았다. 그것에 대한 탄식이다.
  二三者는 안로의 뜻에 동조한 몇몇 제자들을 일컬은 말이다.
   
11, 季路問事鬼神. 子曰 未能事人 焉能事鬼. 敢問死. 曰 未知生 焉知死.
  계로가 귀신을 섬기는 것에 대해 물었다. 공자께서 대답해 말씀하시길 “사람도 섬기지 못하면서, 어찌 귀신을 섬길 수 있겠느냐?”
  “감히 죽음에 대해 묻겠습니다.”
  “아직 삶에 대해서도 알지 못하는데, 어찌 죽음에 대해 알겠느냐?”

  <해설> 귀신에 대한 문제, 그리고 죽고 난 뒤의 문제는 인간이면 누구나 숙명적으로 갖고 고민하는 문제이다. 자로 또한 이 문제가 매우 궁금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먼저 귀신을 섬기는 문제부터 물어 보았다. 제사를 지내는 것 자체가 귀신을 섬기는 것이니, 그것으로부터 실마리를 찾아, 사후의 문제까지 차근차근 물어보려 했던 것이리라. 그러나 공자는 자로의 질문이 제사를 지내는 것에 있지 않고, 사후의 문제에 있음을 깨닫고, 인간을 섬기는 것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귀신을 섬길 수 있겠느냐고 잘라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인 성격의 자로는 물러서지 않고,  계속하여 감히 죽음에 대해 물었다. 공자의 대답은 역시 같았다. 삶도 모르면서 어찌 죽음을 알 수 있겠느냐고. 공자는 인간이 이 세상을 살면서 어떻게 하면 올바르게 살아갈 수 있느냐에 관심이 있었지, 귀신, 죽음 등 인간 너머에 있는 알 수 없는 세계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합리주의자로서의 공자의 진면목이 잘 나타나 있는 대목이다.
 
  <보충> 공자의 사상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그가 신이나 사후 세계 등 종교적인 문제에 거의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귀신이나 사후 세계를 부정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러기에 그는 죽은 선조들의 혼령을 모시는 제사나, 기타 산천초목 등에 바치는 제사를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그러한 제사들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그것을 격식대로 치를 것을 주장하면서, 양 한 마리가 아까워 고삭(告朔)의 제사를 폐지하려고 하는 자공을 꾸짖고 있다(팔일 17).
  그러나 그것은 종교적인 이유에서라기보다는 정치적인 이유에서였다. 제사는 공동체 구성원 사이의 공동체 의식을 고양하고, 내부의 질서를 바로잡기 위한 정치적 행사였다. 공동의 조상에 대한 제사는 혈연공동체 내부의 동질성을 고취시키며, 제례의 구분은 공동체 내부의 질서 의식을 공고히 한다. 공동체적 삶으로의 복귀를 염원한 공자의 입장에서 볼 때, 제사는 그것을 달성할 수 있게 하는 매우 유용한 수단이었다.
  또한 공자가 보기에 귀신의 일은 인간으로서는 알 수도, 도달할 수도 없는 미지의 세계였다. 생사의 문제 또한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死生有命 富貴在天―안연 5). 공자는 인간이 알 수 있고, 그에 따라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는 세계에만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러기에 인간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귀신, 생사의 문제는 일단 젖혀두고, 인간 세상의 일에만 관심을 가졌던 것이다. 그러한 공자이기에 귀신의 일은 제례의 대상으로서 공경은 했으되, 멀리했으며(敬鬼神而遠之―옹야 20), 그에 대해 언급하지 않은 것이다(子不語怪力亂神―술이 20).
  한편으로 공자가 이렇게 귀신의 일을 멀리한 것은 춘추 시대 이후의 사회적 변화를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각 혈연공동체는 의연 그 보호자로서 조상신을 모시고 있었다. 조상신에 대한 제사는 구성원간의 동질성을 확인시켜주는 정치적 의미뿐만 아니라, 공동체를 외부의 위험으로부터 지켜달라는 주술적 의미도 함께 갖고 있었다. 그러나 현실의 세계에서 공동체는 와해되어 갔고, 그 과정에서 수호자인 조상신은 아무런 보호도 하지 못하였다. 또한 공동체로부터 방기(放棄)된 각 개인에게 있어 공동체의 조상신이라는 것은 이제 관습적인 것 외에 아무런 의미도 없는 그런 존재에 불과했다. 또한 제후들 사이의 빈번한 맹약(盟約)의 보증인도 이들 귀신들이었다. 그러나 현실의 세계에서 이들 귀신들은 맹약을 지키는 아무런 방패막이가 되지 못했다. 귀신이 있는지 없는지는 알 수 없으나, 현실 세계에서의 존재 의미는 이제 사라지고 말았다. 이러한 저간의 사회적 변화가 공자로 하여금 귀신에 대해 거리를 두게 만든 것이다. 시대가 지나 순자에 이르면 우주를 주재하는 최고신인 천(天)마저 단순한 자연 현상으로 인식하게 된다. 주술적 신으로부터의 인간의 해방은 이러한 사회적 변화의 과정 속에서 이루어졌다.    

  <참고> 옹야 20, 술이 20

12, 閔子侍側 誾誾如也. 子路行行如也. 冉有子貢侃侃如也. 子樂. 若有也 不得其死然.
  민자건은 공자를 모실 때 그 몸가짐이 바르고 곧았으며, 자로는 강직했고, 염유와 자공은 온화하였다. 공자께서는 즐거워하셨다.
  자로 같은 사람은 제 명을 다하지 못할 것이다.

  <해설> 민자(閔子)는 민자건이다. 은은(誾誾)은 곧고 바른(中正) 모양이고, 행행(行行)은 굳고 강직한(剛强) 모양, 간간(侃侃)은 화락(和樂)한 모양이다. 不得其死然은 제 명(命)대로 살지 못하는 것을 뜻한다.
  민자건이나, 자로, 염유, 자공 같은 훌륭한 제자들에게 둘러싸인 공자는 자못 흐뭇했으리라. 공자가 즐거워했다는 것은 그것을 나타낸 말이다.
  자로의 급하고, 강직한 성격은 공자에게 근심거리였다. 어느 시대나 그런 성격의 사람은 항상 어려운 일을 많이 자초하기 마련이다. 공자는 자로가 그 성격 때문에 옳게 제 명대로 살다 가지 못할 것을 근심하였다. 若有也 不得其死然은 그것을 걱정한 말이다. 공자의 걱정대로 결국 자로는 위나라 출공(出公) 부자의 왕위 다툼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비극적인 최후를 맞고 만다. 『사기』 「중니제자열전」에 의하면, 자로는 죽음에 즈음하여 “군자는 죽을 때에도 관을 벗지는 않는다”고 하며 관의 끈을 고쳐 매고 죽어 갔다고 한다. 한편 공자는 위나라에 난이 일어났다는 말을 전해 듣고, 자로가 거기에 휘말려 목숨을 잃게 될 것이라고 예상했었는데, 그 뒤 과연 자로의 죽음이 전해졌다. 자로의 나이 64세 때라고 한다.
  황간(皇侃)의 『논어의소』에는 若有也 앞에 왈(曰) 자가 더 있다. 또 주자는 子樂의 낙(樂)이 왈(曰)의 오자(誤字)가 아닌가 의심하고 있다.

13, 魯人爲長府. 閔子騫曰 仍舊貫 如之何. 何必改作. 子曰 夫人不言 言必有中.
  노나라가 장부를 다시 짓자, 민자건이 말하길 “옛것을 그대로 쓰는 것이 어떠한가? 꼭 다시 지어야 하는가?”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그 사람이 말은 없지만, 말을 하면 반드시 이치에 맞는다.”

  <해설> 장부(長府)는 창고의 이름이고, 위(爲)는 다시 짓는 것이다. 잉(仍)은 인(因)이니, 그대로 따르는 것이다. 구관(舊貫)은 옛것이다.
  노나라가 왜 장부를 다시 지었는지 그 이유는 불분명하나, 아마 백성의 부담이 컸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민자건이 옛것을 그대로 쓰자고 주장한 것이다.
  고주, 신주 모두 장부(長府)를 창고의 이름으로 풀이하고 있으나, 유보남(劉宝楠)은 『논어정의』에서 다른 해설을 내놓고 있다. 『춘추좌씨전』 소공(昭公) 25년을 보면 노(魯)나라 소공이 장부(長府)에 머물면서 당시 노나라의 정권을 독단하던 계씨(季氏)를 쳤다는 기록이 나온다. 유보남은 이 기록과 연관지어, 노나라 사람이 장부를 다시 지은 것은 장차 소공이 계씨를 칠 때 그 거점으로 삼으려고 했기 때문이라 하고 있다. 있다. 당시 계씨가 정권을 잡은 지 이미 오래춘추, 물리적인 힘으로 그를 정벌하기는 어려운 실정이었다. 따라서 민자건이 그것을 만류한 것이고, 공자 또한 민자건과 같은 견해였다는 것이다.
  한편 다산은 더욱 색다른 해설을 내놓고 있다. 다산에 의하면 장부(長府)는 화폐(貨幣)의 이름이고, 관(貫)은 동전을 꿰는 줄이다. 노나라에서 당시 화폐를 새로 주조하였는데 옛것보다 가치를 더 크게 하였다. 민자건은 그것을 보고 장차 새 화폐로 세금을 거두면서, 그 양을 옛 화폐대로 할 경우(仍舊貫), 백성의 부담이 늘어나 노나라에 장차 환란이 생기지 않을까 걱정하였다. 그래서 이렇게 말한 것이라고. 재미있는 해설이기는 하나, 당시 화폐로 세금을 거둘 정도로 화폐유통이 보편화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심히 의문이 든다.

14, 子曰 由之瑟奚爲於丘之門. 門人不敬子路. 子曰 由也升堂矣 未入於室也.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유는 어찌하여 내 집에서 거문고를 타는가?”
  문인들이 자로를 공경하지 않으니,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유는 대청에는 올라와 있다. 아직 안방에 들어가지 못했을 뿐이다.”

  <해설> 슬(瑟)은 현(弦)이 여럿 있는 현악기다. 당(堂)은 우리 식으로 말하면 대청에 해당하고 실(室)은 안방이다. 음악에 비유한다면 실(室)은 음악의 깊고 오묘한 경지까지 이른 것을 말하고, 당(堂)은 거기에 이르기 바로 전 단계이다.
  음악은 조화를 기반으로 한다. 자로는 그 성격이 급하고 거칠어, 조화와는 거리가 멀다. 자연 그의 거문고 소리 또한 귀에 거슬리는 것이었으리라. 그래서 공자는 자로에게 “내 집에서 거문고를 타지 말라”고 한마디했다. 이 말을 듣고 문인들이 자로를 깔보고 공경하지 않았다. 이에 공자가 자로의 음악이 아직 심오한 경지까지는 이르지 못하였으나, 이미 상당한 경지에 올라 와 있다고 하면서, 문인들에게 자로를 함부로 대하지 말라고 타이른 것이다.
  주자는 『공자가어(孔子家語)』를 인용하여 “자로의 거문고 소리에는 거칠고 살벌한 기운이 있다.”고 하고 있다. 아마 자로의 성격이 급하고 용맹스러워 그런 말이 나온 듯하다. 그러나 소위 『공자가어』라는 책은 AD 3세기경 위(魏)나라 왕숙(王肅)의 위작(僞作)임이 거의 확실한 책이다. 재미있는 이야깃거리 이상의 의미는 없다.

15, 子貢問師與商也熟賢. 子曰 師也過 商也不及. 曰 然則師愈與. 子曰 過猶不及.
  자공이 묻기를 “사와 상은 누가 더 낫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사는 지나치고, 상은 미치지 못한다.”
  “그러면 사가 더 낫습니까?”
  “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하는 것과 같다.”

  <해설> 사(師)는 자장, 상(商)은 자하이다.
  같은 스승으로부터 같은 것을 배워도 사람마다 차이가 나기 마련이다. 각자가 타고난 재능이 다르고, 노력하는 정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도 학생 시절 누가 공부를 더 잘하는지 무척 궁금해  했던 것처럼, 공자의 제자들도 서로 누가 더 나은지 퍽이나 궁금했던 것 같다. 자공의 질문은 그런 일면을 보여 준다.
  자장의 어떤 모습 때문에 공자가 그를 지나치다고 했는지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자유의 말에 자장과 벗을 하기에는 재주가 모자라 아직 그의 인(仁)에는 미치지 못한다(子游曰 吾友張也爲難能也 然而未仁―자장 15)고 하고 있고, 증삼도 그를 당당하여 그의 인(仁)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가 어렵다(堂堂乎張也 難與並爲仁矣―자장 16)고 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재주가 뛰어나고 기개나 포부도 컸음은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자장은 일상적인 일에 성실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러기에 공자는 그에게 평소에 게으름피우지 말 것이며, 일을 할 때 성실히 하라(居之無倦 行之以忠―안연 14)고 가르치고 있다.
  자하는 고전에 밝은 사람으로(文學 子游子夏―선진 2), 그 문인들이 예의범절에 밝은 것(子夏之門人小子 當洒掃應對進退則可矣―자장 12)으로 미루어 볼 때, 상당히 돈독한 성격의 소유자로 생각된다. 또한 작은 일에 얽매이는 경향도 있었던 것 같다. 그러기에 공자는 그에게 작은 이익에 얽매이지 말라(無見小利―자로 17)고 가르친 바 있다. 아마 그런 면이 공자에게는 그 규모나 포부가 작고 소극적인 것으로 보인 모양이다.
  자장 3을 보면 벗을 사귀는 것에 관해, 자하가 좋은 사람과 사귀고, 좋지 못한 사람과는 사귀지 말라고 한 데 대해, 자장은 그것은 본인의 문제로 본인이 어질다면 어찌 그렇게 구별할 필요가 있겠느냐고 말하고 있다. 자장의 진취적이고 방탕한 성격과 자하의 소극적이면서 원칙에 집착하는 성격이 잘 대비되고 있다.
  지나친 것이나, 미치지 못하는 것이나 모두 중용(中庸)의 덕에 어긋난다. 중용의 덕을 최고로 치는 공자의 가르침(中庸之爲德也其至矣乎―옹야 27)이 “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하는 것과 같다(過猶不及)”는 이 말 한마디에 잘 나타나 있다.

  <참고> 자공은 인물평에 유난히 관심이 많았다. 헌문 31에는 자공이 인물을 비교하다 공자로부터 꾸중을 듣는 장면이 있다.

16, 季氏富於周公 而求也爲之聚斂而附益之. 子曰 非吾徒也. 小子鳴鼓而攻之可也.
  계씨가 주공보다 부유했는데도, 염구는 그를 위해 많은 세금을 거두어 더욱 그의 재산을 늘려 주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우리 사람이 아니다. 너희들은 북을 울려 그의 죄를 다스리도록 해라.”

  <해설> 계씨(季氏)는 노나라를 실질적으로 다스리고 있던 삼환(三桓)의 하나인 계손(季孫)씨다. 염구가 모신 계씨는 계강자(季康子)이다. 주공(周公)은 황간의 『논어의소』에 의하면 주왕실의 재상으로 그 식읍(食邑)이 주나라에 있었기 때문에 주공(周公)이라고 한다. 노나라의 시조인 주공(周公) 단(旦)이 노나라의 제후로 책봉되었을 때, 주공은 자신이 주나라의 재상을 겸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신 아들인 백금(伯禽)을 노나라에 부임시켰다. 여기서 말하는 주공(周公)이란 아마 그때 노나라에 따라가지 않고 주왕실에 남아 대대로 재상의 지위를 세습한 주공(周公) 단(旦)의 또 다른 후예를 가리키는 말 같다.  
  계씨가 제후국인 노나라의 일개 대부에 불과한 자임에도 불구하고, 그 부가 주공보다 많은 것은 지나친 것이다. 염구가 그런 계씨를 위해 백성으로부터 많은 세금을 거두어, 더욱 그의 재산을 늘려 준 것은 백성을 착취한 것일 수밖에 없다. 그는 백성을 사랑하라는(樊遲問仁 子曰 愛人―안연 22) 공자의 가르침을 정면으로 위배한 것이다.
  분노한 공자는 보기 드물게 강경한 어조로 염구를 비난한다. 우리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사문(師門)에서 파문한다는 뜻이다. 사제간에서는 최고로 무거운 벌이다. 백성을 사랑하는 공자의 마음을 잘 느낄 수 있다. 이후 염구가 정말 공자의 문하에서 쫓겨났었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

17, 柴也愚, 參也魯, 師也辟, 由也喭.
  시는 우직하고, 삼은 우둔하며, 사는 꾸밈이 심하고, 유는 거칠다.

  <해설> 시(柴)는 공자의 제자로 성은 고(高), 자는 자고(子羔), 시(柴)는 이름이다. 『사기』 「중니제자열전」에 의하면 공자보다 30세 연하라 한다. 자로가 비(費)의 재(宰)로 추천했다는 기록이 선진 24에 보인다. 그 외에는 아무런 행적도 논어에 보이지 않는다. 우(愚)는 우직한 것이다.
  삼(參)은 증삼(曾參)이다. 노(魯)는 노둔, 즉 우둔한 것이다. 황간의 『논어의소』에 인용된 왕필(王弼)의 설명에 의하면 우(愚)는 인(仁)을 좋아함이 지나친 것이고, 노(魯)는 바탕이 꾸밈보다 나은 것이라고 한다.
  사(師)는 자장(子張)이고, 벽(辟)은 그 꾸밈이 심한 것이다.
  유(有)는 자로(子路)로, 언(喭)은 거칠고 사나운 것을 말한다.
  누가 무엇을 근거로 이런 말을 했는지는 불분명하다. 공자의 말로 보기에는 제자에 대한 평가가 너무 각박한 것 같다.

18, 子曰 回也其庶乎 屢空. 賜不受命而貨殖焉 億則屢中.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회는 도(道)에 거의 다가갔으나, 번번이 양식이 떨어졌다. 사는 천명을 받지 않았는데도, 재산이 많았다. 예측하면 잘 맞기 때문이다.”

  <해설> 서(庶)는 주자에 의하면, 근(近)으로, 도에 가까움을 말한다. 누(屢)는 번번이, 공(空)은 고주, 신주 모두 공궤(空匱), 즉 양식을 담을 독이 비었다는 뜻으로 풀이한다. 그러나 하안(何晏)의 고주는 공(空)을 허중(虛中), 즉 안회의 도(道)가 높아 자주 그 마음이 허정(虛靜)한 상태에 가까웠다고 풀이하는 일설(一說)도 함께 소개하고 있다. 아마 고주의 편집자인 하안 자신이 노장(老莊) 철학의 애호가였기 때문이리라. 하안의 고주에는 이렇게 노장의 사상에 입각하여 풀이하고 있는 대목이 간혹 눈에 뜨인다. 아무튼 안회는 가난 속에서도 도를 추구하는 즐거움을 버리지는 않았지만(一簞食一瓢飮 在陋巷 人不堪其憂 回也不改其樂―옹야 9), 평생 가난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사(賜)는 자공이다. 명(命)은 천명(天命)이다. 천명을 받지 않았다는 것은 다산에 의하면 귀(貴)한 신분이 아니라는 뜻이다. 옛날의 부는 귀(貴, 신분)에서 나왔다. 자공이 천명을 받지 않고서도 재산을 늘렸다는 것은, 그가 특별한 지위도 없으면서, 자력으로 많은 부를 쌓았다는 뜻이다. 億則屢中의 억(億)은 예측하는 것이고, 중(中)은 맞춘다는 뜻이다. 즉 어떤 물건의 시세 변동을 예측하여 잘 맞추었다는 말이다.
  자공은 재주가 많은 사람이다. 말솜씨도 좋았지만, 안회와 비교될 정도로 재주도 뛰어났던 모양이다. 그리하여 공야장 8에서 공자는 그가 아직 안회만 못함을 지적하고 있다. 이 장(章)도 안회와 자공을 비교한 말이다. 빈곤에 연연해 하지 않는 안회, 놀라운 재주로 부를 쌓은 자공, 공자의 입장에서는 안회가 더욱 사랑스러웠으리라. 그러나 공자가 자공을 비난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공자는 부(富)를 부정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 「화식열전(貨殖列傳)」을 보면 자공은 조(曹)나라와 노(魯)나라 사이에서 장사를 하여 많은 재물을 모았다. 자공은 공자의 70여 제자들 중에서 가장 부유하였으며, 공자의 이름이 천하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도 자공이 음양으로 도운 바에 힘입은 게 크다고 한다.
 
  <보충> 주 봉건제 하에서 부는 신분과 직결된 문제였다. 부의 근원은 토지였고, 토지는 신분과 바로 표리의 관계를 이루고 있었다. 인민은 토지에 부속되었다. 토지에 부속된 인민이 생산한 부는 신분의 계층 질서를 따라 순차적으로 위로 집중되었다. 가장 신분이 고귀한 자가 가장 많은 인민과 토지를 지배즈서를 가장 많은 부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거주 이전의 자유와 직업 선택의 자유가 없었던 일반 인민이 부를 축적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공자가 부를 하늘이 결정하는 것이라고 한 것은 바로 이러한 현실을 말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부는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탄생(운명)과 직결된 문제라는.
  그러나 철기의 도입에 따라 생산력이 발달하면서 상황은 변하기 시작했다. 공동 경작이 가족 경작으로 바뀌었고 토지 사유제가 발전하였다. 공동체 내부에서는 계층 분화가 진행되어, 한편에서는 몇몇 소수에게로 토지가 집중되었고, 그 이면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토지로부터 방출되었다. 공동체가 붕괴하기 시작하면서, 인민에 대한 전통적인 통제는 힘을 잃어갔다. 신분제도 덩달아 붕괴해갔다. 집중된 부는 교역을 촉진했고 그에 따라 신흥 상인 계급이 출현했다. 안회의 적빈(赤貧), 자공의 장사를 통한 부의 축적 등은 바로 이러한 사회상을 반영하는 것이 아닐까?   

19, 子張問善人之道. 子曰 不踐迹 亦不入於室.
  자장이 선인(善人)의 도(道)에 대해 물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성인의 발자취를 밟지 않고서는, 또한 방에 들어갈 수 없다.”

  <해설> 적(迹)은 성인의 발자취이다. 방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은 깊은 경지, 즉 성인의 경지에 이르지 못함을 말한다.
  고주나 신주 모두 “(선인은) 성인의 발자취를 밟지 않은 사람이다. (그것으로도 가하다) 그렇지만 또한 방에 들어갈 수는 없다.”로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청(淸)의 공광삼(孔廣森)은 『경학치언(經學巵言)』에서 “(선인이라도) 성인의 발자취를 밟지 않고서는 방에 들어갈 수는 없다.”로 논리적으로 연결하여 해석한다. 여기서는 이 설(說)을 따랐다.
  착한 사람은 그것으로 괜찮기는 하지만, 성인을 본받아 노력하지 않으면 그것으로 그칠 뿐, 더 높은 경지, 즉 성인의 경지에는 이르지 못한다. 이미 이룩한 것에 안주하지 말고, 더욱 정진할 것을 촉구한 말이다. 배움의 길은 평생 끝이 없으니, 오직 죽음으로써 끝날 뿐이다.
  한편 다산은 善人之道가 선인의 도가 아니라, 사람을 좋게 하는 도, 즉 사람을 가르치는 방법이라고 풀이한다. 자장이 그에 대해 묻자, 공자가 차근차근 옛 자취를 따라가지 않으면 학문의 깊은 경지에 도달할 수 없다고 가르친 것이라고.   

20, 子曰 論篤是與. 君子者乎 色莊者乎.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그 말하는 것이 독실하다고 하여 좋다고 할 수 있을까? 군자일 수도 있고, 겉모양만 번드레한 자일 수도 있다.”

  <해설> 주자의 신주에 의하면 여(與)는 허락하는 것이다. 말만 갖고는 사람을 판단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하안의 고주는 해석을 전혀 달리한다. 우선 고주에서는 이 장을 위의 장과 하나로 묶어 해석한다. 즉 윗 장의 선인(善人)의 도에 대한 설명을 이어받아 선인의 세 종류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언론이 독실한 자, 군자다운 자, 몸가짐이 장중한 자가 선인이라는 것이다. 다만 단정적으로 말하는 것을 회피하여 여(與), 호(乎)의 어조사(語助辭)를 첨가한 것이다. 번역하자면 “언론이 독실한 자가 그러한 사람일까? 군자다운 자가 그러할까? 몸가짐이 장중한 자가 그러할까?”가 된다. 자왈(子曰)이 첨가된 것은 형병의 『논어주소』에 의하면 그 말한 시기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한다.

21, 子路問 聞斯行諸. 子曰 有父兄在 如之何其聞斯行之. 冉有問 聞斯行諸. 子曰 聞斯行之. 公西華曰, 由也問聞斯行諸 子曰 有父兄在. 求也問聞斯行諸 子曰 聞斯行之. 赤也惑 敢問. 子曰 求也退 故進之. 由也兼人 故退之.
  자로가 묻기를 “옳은 말을 들으면 그대로 행해야 합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부형이 살아 계시는데 어찌 듣는다고 그대로 행하겠느냐?”
  염유가 묻기를 “옳은 말을 들으면 그대로 행해야 합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듣는 대로 그대로 행하여라.”
  공서화가 묻기를 “유가 ‘옳은 말을 들으면 그대로 행해야 합니까?’하고 물었을 때, 선생님께서는 ‘부형이 살아 계신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구가 ‘옳은 말을 들으면 그대로 행해야 합니까?’라고 물으니, 선생님께서는 ‘듣는 대로 그대로 행하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어리둥절하여 감히 물어 봅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구는 소극적이기에 앞으로 나아가게 한 것이고, 유는 너무 나서는 까닭에 뒤로 물러나게 한 것이다.”

  <해설> 겸인(兼人)은 남의 몫까지 겸하는 것이다. 즉 너무 적극적으로 나선다는 뜻이다.
  자로와 염구는 모두 공문에서 정사로 이름이 높았다(政事冉有季路―선진 2). 그러나 서로의 성격은 판이하게 달랐다. 자로는 적극적인 성격으로 무엇을 듣고 행하지 못하면, 더 듣는 것을 두려워할 정도였다(子路有聞 未之能行 唯恐有聞―공야장 13). 그러기에 공자가 그에게 부모가 계시니 행동을 삼가고 조심하여 부모에게 누를 끼치지 말라고 한 것이다. 그에 반해 염구는 소극적인 성격이었던 것 같다. 그는 공자의 가르침이 자신에게는 너무 벅차다고 지레 한계를 그었다가, 공자에게 꾸중을 듣기도 하였다(冉求曰 非不說子之道 力不足也―옹야 10). 그런 염구의 기질을 살펴 공자가 그로 하여금 적극적으로 나서게끔 한 것이다.
  공자의 가르침은 결코 획일적이지 않았다. 그는 배우는 사람의 기질을 살펴, 그 지나친 것은 억제하고, 부족한 것은 더해 주었다. 그러기에 여기에서와 같이, 사람에 따라 정반대로 가르치게 되는 경우도 생기는 것이다. 공자에게는 당연한 일이었지만, 듣는 공서화로서는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22, 子畏於匡 顔淵後. 子曰 吾以女爲死矣. 曰 子在 回何敢死.
  공자께서 광 땅에서 어려운 일을 당하셨을 때, 안연이 뒤늦게 도착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나는 네가 죽은 줄로 알았다.”
  “선생님이 계신데 제가 어찌 감히 죽을 수 있겠습니까?”

  <해설> 공자가 광(匡)에서 당한 어려운 일에 관해서는 자한 5에서 이미 서술한 바 있다. 후(後)는 뒤늦게 도착한 것이다. 子在 回何敢死는 스승이 살아 계신데, 스승을 보필해야 할 제자로서 어찌 감히 경거망동하다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먼저 죽을 수 있겠느냐는 말이다.
  스승과 제자의 사랑이 넘쳐 흐르고 있다. 광(匡)에서의 어려운 일을 가까스로 모면하고 나니 사랑하는 제자 안연이 보이지 않았다. 혹시 안연이 잘못되지 않았을까 그것을 걱정한 공자, 그리고 스승을 모셔야 할 제자로서, 어찌 스승이 살아 계신데 감히 경거망동하다 먼저 죽을 수 있겠느냐고 대답하는 안연, 참으로 보기 좋은 광경이다. 

23, 季子然問 仲由冉求 可謂大臣與. 子曰 吾以子爲異之問 曾由與求之問. 所謂大臣者 以道事君 不可則止. 今由與求也 可謂具臣矣. 曰 然則從之者與. 子曰 弑父與君 亦不從也.
  계자연이 묻기를 “중유와 염구는 훌륭한 신하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나는 당신이 다른 질문을 하나 했더니, 바로 유와 구에 대한 질문이군요. 훌륭한 신하는 도로써 임금을 섬기고, 그것이 가능하지 않으면 물러납니다. 지금 유와 구는 그저 자리나 차지하고 있는 그런 신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시키는 대로 따를 사람들입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아비와 임금을 죽이는 일이라면 역시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해설> 계자연(季子然)은 계씨의 일족이다. 대신(大臣)은 훌륭한 신하다. 구신(具臣)은 그저 자리나 차지하고 있는 신하다.
  자로와 염구를 신하로 얻게 된 계자연이 득의만만하여 그들에 대해 물었다. 그들은 진짜 훌륭한 신하냐고. 공자가 그저 자리나 차지하고 있는 그런 신하라고 대답한 까닭은 분명하지 않다. 아마 그들이 계씨의 참람(僭濫)한 행위를 말리지 못한 것을 일컬은 것이리라. 훌륭한 신하라면 마땅히 계씨의 참람한 행위를 말려 옳은 방향으로 이끌었어야 했고,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벼슬에서 물러났어야 했다. 그런데 자로와 염구는 그렇지 못했다. 그러자 계자연이 그러면 시키는 대로 따라 하기는 하겠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공자가 대답한다. 비록 훌륭한 신하는 아니지만, 당신들이 임금이나 아비를 살해하려 한다면, 그런 짓은 따르지 않을 것이니, 그런 일은 꿈도 꾸지 말라고. 공자가 계씨 일족의 참람함을 기롱(譏弄)한 말이다.    

24, 子路使子羔爲費宰. 子曰 賊夫人之子. 子路曰 有民人焉 有社稷焉 何必讀書然後爲學. 子曰 是故惡夫佞者.
  자로가 자고를 비 땅의 읍재가 되게 하였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남의 자식을 망치고 있구나”
  자로가 말하길 “백성이 있고, 사직이 있는데, 어찌 책을 읽는 것만이 학문이라고 하겠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이렇기 때문에 말을 교묘히 둘러대는 자를 미워하는 것이다.”

  <해설> 자고(子羔)는 선진 17에서 우직하다고 한 고시(高柴)다. 자로가 계씨의 재(宰)로 있으면서 자고를 비(費)의 재(宰)로 추천하였다. 자로는 자고가 비의 재가 되기에 능력이 충분하다고 보았지만, 공자가 보기에는 아직 배움이 부족하였다. 그러기에 “남의 자식을 망치고 있구나”라고 말한 것이다. 여기서 남의 자식이란 바로 자고를 일컫는다. 즉 아직 배움의 길이 창창하게 남아 있는 자를 중도에서 끌어내어 망치고 있다는 뜻이다.
  사직(社稷)의 사(社)는 토지 신이며, 직(稷)은 곡물의 신이다. 합하여 나라를 나타내는 말로 쓰인다. 백성과 사직이 있다는 말은 학문의 목적이 정치에 있는 만큼, 실제로 정치를 하는 것이 바로 살아 있는 학문을 하는 것이 아니겠느냐란 뜻이다. 꼭 책상에 앉아 공부하는 것만이 학문하는 것은 아니지 않겠느냐는 자로의 반발이다. 자로의 말이 본의는 아니었을 것이다. 다만 말을 둘러댄다는 것이 조금 지나쳤던 것이었으리라.
  군자는 먼저 그 몸을 닦고, 그런 연후에 벼슬길에 나아가 백성을 다스린다. 즉 자신을 갈고 닦음으로써 그것이 가족에까지 미치고, 나아가 한 나라, 천하로까지 이어지는 것이다(修身齊家治國平天下). 인(仁)이 가까운 것에서부터 터득하여 먼 데까지 미루어 가는 것(能近取譬―옹야 28)과 같은 이치다.
  자신을 닦지 못한 자는 남을 다스릴 수 없다. 학문을 이루지 못하고 정치를 하는 것은, 백성을 학대하는 것이요, 또한 자기 자신을 파멸로 이끄는 것이다. 공자가 자고가 비의 재가 되는 것을 말린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그런 공자를 이해하지 못한 자로가 궤변을 늘어놓자, 공자가 망녕되이 궤변만 늘어놓는다고 일침을 놓은 것이다.
      
25, 子路曾晳冉有公西華侍坐. 子曰 以吾一日長乎爾 毋吾以也. 居則曰 不吾知也. 如或知爾 則何以哉. 子路率爾而對曰 千乘之國 攝乎大國之間 加之以師旅 因之以饑饉. 由也爲之 比及三年 可使有勇 且知方也. 夫子哂之. 求 爾何如. 對曰 方六七十 如五六十 求也爲之 比及三年 可使足民. 如其禮樂 以俟君子. 赤 爾何如. 對曰 非曰能之 願學焉. 宗廟之事 如會同 端章甫 願爲小相焉. 點 爾何如. 鼓瑟希 鏗爾舍瑟而作. 對曰 異乎三子者之撰. 子曰 何傷乎 亦各言其志也. 曰 莫春者 春服旣成 冠者五六人 童子六七人 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 夫子喟然歎曰 吾與點也. 三子者出 曾晳後. 曾晳曰 夫三子者之言何如. 子曰 亦各言其志也已矣. 曰 夫子何哂由也. 曰 爲國以禮 其言不讓. 是故哂之. 唯求則非邦也與. 安見方六七十 如五六十 而非邦也者.  唯赤則非邦也與. 宗廟會同 非諸侯而何. 赤也爲之小 孰能爲之大.
  자로와 증석과 염유와 공서화가 공자를 모시고 앉아 있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내가 너희보다 하루라도 더 나이가 많기는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말아라. 너희가 평소에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라고 말을 했는데, 만일 너희를 알아준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자로가 불쑥 나서며 대답하길 “천승의 나라가 큰 나라 사이에 끼여, 군사적인 침략을 받고, 뒤이어 기근까지 겹쳤다 하더라도, 제가 3년 가량만 다스리면, 백성들에게 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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