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의 삶에 이웃으로 다가서는” 사진가 서은미를 만나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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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의 삶에 이웃으로 다가서는” 사진가 서은미를 만나다. (1)
  • 민운기 스페이스빔 대표
  • 승인 2015.03.30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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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월간 [시각] 협약기사
 

지난 해 늦가을이었다. 개인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인천섬연구모임>의 덕적도 정기 답사에 따라 나섰다. 섬에 도착하여 이곳저곳 둘러보고 안내를 받으며 담은 사진 및 관련 내용을 SNS인 페이스북에 실시간으로 올리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직접 인사는 두어 번 정도 나눈 사이였던 한 ‘페친’인 분이 이와 관련된 또 다른 내용들을 댓글로 알려주었다.

처음에는 그 분이 이곳을 잘 아는 분인가 보다 생각했다. 그런데 1960~70년대 덕적 발전에 큰 공을 세웠다고 하는 최분도(Father Benedict A. Zweber M.M.) 신부님의 공적비를 일행들과 둘러보는 장면을 올렸더니 사진에 보이는 머리와 눈썹이 하얀 분이 자신의 아버지란다. 나에게는 그녀에 대한 새로운 만남과 발견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그것은 비단 훌륭하신 분의 자제라는 이유에서만이 아닌, 현 단계 인천의 사진(활동)담론이 어느 지점에서 멈추어 있거나 꽉 막혀 있다는 답답한 생각이 있었는데, 최근 들어 더욱 활발하고 의미 있는 행보를 보이고 있는 그녀의 활동을 간접적으로나마 접하며 그 물꼬를 트고 있는 태도와 모습이 지역 문화 예술 활동에 함께 참여하는 입장으로서 본받을 점이 많아 함께 나누어야겠다는 생각에, 그리고 그것이 혹여나 부친의 활동과 어떤 연관을 갖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언젠가 그 이야기를 직접 들을 기회를 노려 왔다.

답사에서 돌아와 그녀를 직접 만나게 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 그녀가 전시기획위원으로 참여하여 엄청난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은 한국화교생활사 사진전 <서랍 속에서 기억을 찾다>(2015. 1.30~3.29, 한국근대문학관) 전시장에서였고, 이 기회를 활용하여 인터뷰를 가지려 했으나 상황이 여의치 않아 결국 메일을 통해 이루게 되었다. 답변 작성을 위해 설 연휴를 빼앗긴 그녀에게 다시 한 번 죄송한 마음과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편집자 민운기 주-

 
덕적면 서포1리 해수욕장 노송밭에 서 있는 최분도 신분님 공덕비를 둘러보고 있는
인천섬연구모임 탐사단과 서재송 옹(맨 오른쪽)

 

이렇게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선생님의 고향이 덕적도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먼저 가족 관계와 근황에 대해서 간단히 소개해줄 수 있으세요?

부모님 모두 덕적이 고향이시고 저는 1967년 7월 16일 덕적도 서포리에서 태어났습니다. 형제는 4남 2녀로 저는 막내입니다. 모두 덕적이 고향이고, 모두 학업을 위해 일찍 인천으로 이주하여 동인천에서 살았습니다. 언니는 조금 늦게 나왔습니다. 중학교까지 덕적에서 다녔고 고등학교 때 인천으로 나왔지요. 다른 형제들은 대부분 초등학교와 중학교 진학을 위해 일찍 고향을 떠났습니다. 저는 축현국민학교를 내 위의 두 오빠와 함께 다녔습니다. 형제들은 현재 모두 인천에 거주하고 일도 인천에서 하고 있습니다. 

어렸을 적 섬 생활 이야기를 듣고 싶은데요. 특히 1962년 연평도 본당 주임신부로 부임하여 1966년 덕적본당 주임신부로 계시다 1976년 송림동 본당 임시보좌로 떠나신 최분도(Father Benedict A. Zweber M.M.) 신부님을 모시고 함께 덕적도에서 전기 도입, 상수도 시설사업, 하천복개공사. 간척사업, 김(해태) 양식은 물론 ‘바다의 별’이라고 하는 병원선도 운영하고, 나중에는 ‘복자 유베드로 병원’까지 개업하여 환자들을 치유함은 물론, 양로원 운영과 전쟁과 분단이 만들어 낸 (혼혈아 및) 고아들을 돌보고 입양까지 보내며 엄청난 사회적 활동을 하셨고, 1994~1995년 굴업도 핵폐기장 건설 반대 투쟁 때에는 공동대표로 나서서 적극 싸우셨던 서재송 옹(翁)이 선생님의 부친이라고 들었는데, 선생님의 눈에 비친 최신부 님과 부친 및 그 시절에 대한 기억이 궁금하네요.

다른 형제들도 대부분 그랬지만 저 역시 학교를 인천에서 다녔기 때문에 큰오빠와 언니처럼 덕적에 대한 기억은 다양하지 못합니다. 국민학교에 입학하기 전이었고 그때의 기억들은 아버지 서재 앨범 속에 고스란히 남아있습니다. 기회가 되면 그 사진을 보며 이야기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솔직히 어렸을 적 섬 생활은 인천 나들이를 위해 배를 탈 때나 내가 섬에 산다는 것을 인지할 정도였습니다.

두 분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면 며칠 밤을 새워가며 해도 끝나질 않을 것 같습니다... 제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최분도 신부님과 함께 일을 하신 부모님 덕에 태어나서도 정신 없었지요. 그런 아버지의 구술채록이 여러 해 전 인천문화재단을 통해 진행되었는데, 그분의 일생을 이야기하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너무도 많은 일을 하셨고, 또한 한국 근ㆍ현대사의 산증인이라고 표현해야 할 정도로 드라마틱한 삶을 살아오셨거든요. 제 기억 속 덕적에서의 아버지는 앨범 속 이미지들로 정리가 되어 있습니다. 시대별 혹은 하신 일에로 나누어 사진을 정리해 두셨고, 관련 메모 등은 여러 권의 노트에 담겨져 있습니다. 요즘은 그 앨범의 사진마다 설명글을 달기도 하십니다.
 


서은미 작가(왼쪽에서 두번째)의 가족사진


일단 최분도 신부님 이야기부터 말씀드리자면 키가 작은 독일계 미국인으로 황소고집이었고, 운동을 좋아하셔서 덕적도에 축구장과 농구장을 만들어서 섬 주민들과 마을 대항 축구경기나 농구경기를 서포리 운동장에서 자주 열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병원은 성당 마당 한켠에 지금도 건물이 남아 있고, 당시 가톨릭의대에서 실습과 의사 분들이 파견되어 근무를 하셨는데, 의료기기와 약품들이 도시 어느 병원보다 나은 상황이라 지원을 하고 오셨다는 이야기를 제가 자라서도 그분들에게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병원선에 대한 기억은 해안성당 화교양로원 할아버지들이 그 병원선을 타고 덕적으로 이주를 했던 조각이 남아 있고, 주변 도서에 방문을 할 때 몇 차례 따라 갔던 기억이 있습니다. 전기와 상하수도, 하천복개공사 및 간척사업은 제가 태어나기도 전에 진행되었던 사업으로, 덕분에 저는 태어나면서 바로 도시생활과 다를 바 없는 섬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서울에서 태어나 성장한 남편보다 더 문명의 혜택을 받고 자랐다는 얘기를 하며 웃었던 적도 있었습니다. 유치원을 다닐 때 기록들이 사진만이 아니라 촬영된 동영상(뭐라고 표현할지)을 영사기를 통해 보던 기억이 있고, 후에 비디오테이프 만들어 다시 보았던 기억도 있습니다. 그 덕분에 제 나이의 사람들이 흔하게 가질 수 없었던 다양한 형태의 기록물들이 지금도 아버지 댁에 남아 있습니다. 병원의 시설만이 아니라 성당의 부속건물들도 대도시의 그 어떤 것들과 비교해 떨어지지 않는 시설들이 섬에 있었던 것이지요. 그런 제 이야기를 들은 친구들이 공주라는 별명 아닌 별명을 지어 주었지만 실상 집에서의 생활은 다른 친구들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태어나서 성장하며 부모님 곁을 한 번도 차지할 수 없었고, 제 방이 생긴 것은 대학교를 졸업할 때쯤이었습니다. 고3 때도 고아아이들과 여섯 명이 같은 방을 사용했지요.

최신부님과 아버지는 친구이자 동반자로 기억합니다. 두 분은 평생 같이 하셨는데, 제가 아리랑이라는 민요를 최신부님께 배워서 '발병난다'라는 가사를 '발평난다'라고 학교에 입학해서 제대로 된 가사를 배울 때까지 그렇게 불렀습니다. 섬 생활의 특성 상 고아나 과부들이 많아서였는지 제가 태어나기 전부터 고아원을 운영하셨는데, 나중에 인천으로 나오셔서는 고아원과 도시빈민과 나환자, 노동자들을 위한 사목활동을 하셨습니다. 국민학교 4학년 때 부모님과 함께 살게 되었는데, 송현동에 있던 적십자병원을 최신부님이 인수하셔서 도시사목을 시작하실 때였습니다. 국민학교 입학과 함께 나는 부모님 곁을 떠나 인천에서 형제들과 생활했었습니다. 몇 년 만에 부모님과 함께 한다는 기쁨도 금방 환상에서 깨어나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지금까지 살아본 적 없는 도시빈민촌이었던 송현동의 모습을 처음 보면서였고, 덕적에서의 생활보다 인원이 더 많이 늘어난 고아원과 여러 가지 일들로 집안은 일반 집과는 차원이 다른 곳이었습니다. 그 당시 노동자들의 노동운동을 돕고 계서서였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항상 집에는 정보과 형사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5공 시절엔 최신부님이 한국의 인권을 세상에 알리는 것이 문제가 되어 추방당하는 상황까지 겹쳐서 나의 어린 시절은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날들의 연속이었습니다. 답동성당에서 열리는 기도회에 가서 뜻도 모르는 단어들(‘위정자’ 등)로 된 기도문을 열심히 외웠던 기억이 있었는데, 나중에 커서 보니 민주화 운동의 일환이었던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당시 우리 집에는 인혁당 사건으로 재판 중인 분의 가족이 머물렀고, 그것 또한 항상 문제의 도화선이었지요. 재판 중에 옥사를 한 그분의 장례식 때문에 한바탕의 소동이 있었고, 장례식은 백석동 천주교 묘지에서 살벌한 분위기 속에 진행되었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제게 정치적 사건으로 기억된 첫 번째가 인혁당인 것이 그때의 기억 때문일 것입니다.

송현동에서의 두 분 활동이 도시빈민과 노동운동 등이었다면 제가 중학교 때 부평으로 이사를 하면서는 혼혈아 문제로 확장이 됩니다. 산곡동 ‘화랑농장’이라는 마을로 이사를 갔는데, 단독주택 다섯 채 정도가 한 울타리 안에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곳엔 나이가 아주 많은 혼혈인 가족들이 있었습니다. 6.25 당시 태어난 혼혈인들로 어린 아이들과는 상황이 많이 다른 문제들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그분들의 자립을 돕고, 당시 혼혈아들의 어머니들도 같이 있었는데, 보통 ‘양공주’라 불리던 세상 살기가 녹녹하지 않은 삶을 살고 있던 분들이 아이들과 함께 자립을 하도록 돕거나 아니면 아이들은 나이와 상황에 따라 입양과 스폰서를 찾아 미국으로 이주하도록 돕고 있었습니다. 당시 그 안에 함께 거주했던 이들은 백 명이 넘었고 나이도 다양해서 매일 매일이 전쟁터를 방불케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술을 마시고 싸우기도 하고 본드를 하는 아이들도 있었고 동네주민들과의 마찰은 물론 그 안에서도 조용할 날이 별로 없었던 것 같았습니다.
 


최분도 신부


최신부님은 그런 이들을 어떻게 다 보듬을 수 있었는지 지금 생각해 보면 이해가 할 수 없습니다. 한창 사춘기였던 저는 그곳을 떠나고 싶어 했던 기억도 있군요. 그때도 부모님이나 저는 그곳 아이들과 한방에서 지냈습니다. 나이가 비슷한 아이들끼리 한방에 대 여섯 명씩 지냈던 것 같습니다. 주말이면 식사준비를 도와 주방에서 시간을 보내다 보면 하루 종일 주방을 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아침 먹고 치우면 점심을 준비해야 하고, 점심 먹고 치우면 저녁을 준비해야할 시간이었으니까요. 겨울철 김장은 부평 깡시장에 나가 트럭 하나를 사야했고, 김장은 일주일에 걸쳐 진행되는 연례행사였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대학에 입학하고는 그 흔한 미팅 한번 못한 것이 이런 집안사정 때문이라고 지금도 두고두고 투덜거립니다. 꼭 미팅이 잡히는 날엔 고아원 소풍이 잡히고, 저는 밤새 2백인 분의 김밥사역에 동원되었고, 소풍에 보조선생으로 동원되었으니까요. 그런 날이 아닐 때는 인원이 많다보니 아픈 아이들이 있고, 그 아이들을 데리고 부평성모병원에 진료를 가는 것도 저의 임무 중 하나였습니다. 그러다가 누가 입원이라도 하면 병실에서 지내야 하는 신세가 되기도 했는데, 그게 오히려 복잡한 집으로부터의 탈출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 당시 웃지못할 일들이 여럿 있는데, 그중 하나가 성모병원의 의사들 중 한 분이 저를 양녀로 입양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던 것이었고요. 또 하나는 혼혈아들(대부분의 혼혈아들은 불법체류자이거나 호적이 없는 상태로 기억) 때문에 출입국관리소나 입양기관을 통해 서류를 만드는 일을 출가한 언니가 부모님을 대신해서 도와드리고 있었는데, 아이들을 데리고 전철이나 삼화고속을 타고 서울로 가는 길이 끔찍한 일이었습니다. 혼혈아를, 그것도 한둘이 아니고 다양한 인종으로 데리고 가는 우리 언니는 남의 시선을 받는 것은 당연했고 어떤 분들은 측은해 하기도 했고, 또 어떤 이들은 언니에게 나무라기도 했었답니다. 그런 일이 있으면 언니는 심하게 우울해 했는데, 그 경험을 대학생이던 저도 겪게 되었는데, 그 중 한 아이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자폐증을 앓고 있는 아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이 엄마였으니 더 이야기 하지 않아도 상상이 되실 거라 믿습니다.

제가 대학을 졸업하고 얼마 되지 않아 아버지와 오랜 시간 함께했던 최분도 신부님은 러시아 고려인들을 위한 사목활동을 본인 소속 메리놀 외방선교회로부터 받게 되어 아버지와의 삼십년 넘는 시간을 정리 아닌 정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두 분은 서로 계속 일을 같이 하셔서 러시아에 계신 신부님을 도와드렸고, 제가 고려인이라는 존재에 대해 인지하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중 최분도 신부님은 뇌종양으로 투병을 하시게 되었습니다. 한동안 병세가 호전되어 제 결혼식 주례를 위해 귀국하시기도 했었습니다. 아버지는 그 후 최분도 신부님이 돌아가시고 한동안 배우자를 잃은 것처럼 힘들어 하셨지요.

저는 결혼 후 시댁에서 살고 있었는데, 저녁식사 중에 아버님께서 사돈어른이 뉴스에 나왔다고 하셔서 아버지의 굴업도 핵폐기장 반대 공동대표가 되신 것을 알았습니다. 명동성당 천막농성장 앞에서 머리띠를 두른 아버지를 9시뉴스를 통해 보았을 때 제 생각은 한 동안 사회활동을 접어두신 것 같던 분의 재도약쯤으로 비춰졌습니다. 철없는 막내의 생각이 그렇습니다. 걱정도 되었지만 역시 우리 아버지란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집에서 버스를 타고 명동성당 농성장에서 만난 아버지는 역시 내 생각대로였고, 짧지 않은 시간 어려움들이 상상되었습니다. 그 당시 저는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새댁으로 시댁에 시부모님과 살고 있어서 다른 형제들처럼 핵폐기장 반대활동에 적극적이지 못했습니다. 변명이지요. 당시 유치원에 다니던 조카들은 할아버지 손을 잡고 투쟁구호를 외쳤는데 말이지요. 그 조카들은 성장하며 당시 할아버지에 대해서, 사회의 부조리에 대해서, 시민운동에 대해서 생각하고 참여하는 법을 배웠다고 자부합니다. 

두 분의 모습은 제 기억 속 몇 개의 조각처럼 있지만 그분들의 모습은 제가 얘기하기엔 너무도 어렵습니다. 오히려 그분들의 모습을 내가 훼손하지 않을까 염려가 될 정도이지요. 요즘은 아버지 일상 중 하나가 앨범 사진에 설명글을 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사진들을 아카이빙 할 예정입니다. 그것은 한 개인사일뿐만 아니라 인천과 한국의 근현대사의 한 조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제 선생님 이야기로 넘어오려 하는데, 사진에 관심을 갖게 된 배경이나 계기가 있을까요?

아버지의 영향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버지는 최분도 신부님과 활동하기 훨씬 오래 전부터 본인만의 기록습관이 있으셨는데, 그 중 하나가 사진이었습니다. 지금 아버지 서재엔 앨범이 한 가득입니다. 집에는 항상 촬영 가능한 상태의 카메라가 있었고, 아버지와 최신부님은 모두 사진촬영이 일상이 되어 있어서 우리 형제들은 모두 자연스럽게 사진을 찍게 되었습니다. 중학교 입학 당시 올림푸스 카메라가 내 손에 들어와서 저는 그때부터 저만의 기록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고등학교, 대학교 때도 취미로 계속 사진을 찍었는데 졸업 후 직장생활을 할 때는 전혀 찍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중 대학원 진학을 위해 퇴직하고 퇴직금을 털어 니콘 FM2를 장만하고 다시 사진을 찍기 시작했습니다. 

사진 공부(전공)는 어떻게 하셨어요?

대학에서 전공은 전자계산공학이었습니다. 요즘은 컴퓨터공학이라고 하지요. 대학을 졸업하고 기업연구소에 취직을 하며 사진과는 멀어지는 듯했지만 대학원 진학을 위해 회사를 그만두며 오히려 사진에 다시 한 번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대학원 진학을 사진으로 바꿀지 고민도 했었습니다만 당시 전공은 또 컴퓨터 관련이었고, 관련 업종에서 일을 계속하게 되었습니다. IT분야의 빠른 변화에 소프트웨어 중심에서 컨텐츠 중심으로 나의 관심은 옮겨졌고, 그래서 컨텐츠관리시스템(CMS) 분야로 사업을 하기도 했습니다. 기술력도 인정받았지만 나의 관심은 컨텐츠를 직접 생산(?)하는 분야에 대한 열망을 떨칠 수가 없어 다시 공부를 시작하게 된 것이 사진입니다. 한때 우리나라 정보통신분야의 뜨거운 화두가 입체(steroscopic)영상산업이었습니다. 지금도 무시할 수는 없지요. 그 당시 입체컨텐츠를 웹을 통해 제작 및 배포하는 시스템을 만들며 일반인들이 가장 쉽게 입체를 즐길 수 있는 입체사진을 제작하기 위해 카메라를 다시 들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처음 의도에서 벗어나 사진 자체에 빠지게 되어 아예 전공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것이 저의 또 다른 삶에 대한 도전이며 모험의 시작이었지요. 지금도 저는 새로운 것을 배우고 익히는 것을 즐겨하는데, 제 성격이 배움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한 것 같습니다.


인천에서의 사진 활동은 언제부터 본격적으로 하게 되었고, 특히 화교에 대한 관심이 어떻게 생겨났으며, 그 분들과의 교류는 어떻게 이루어지기 시작했나요?

인천에서의 사진활동은 중학교 때부터라고 주장합니다. 그때 나만의 카메라가 생겼고, 당시 학교생활을 위주로 나만의 기록을 시작했으니까요. 그것도 나중에 기회가 되면 발표를 생각 중입니다.

입체영상산업에 관련된 일을 할 때부터 인천에서 일을 했습니다. 삼십대 중반이군요. 또 인천이라는 지역에 대한 관심도 그때 본격적으로 생겼다고 보는데, 그런 관심 때문에 인천의 여러 곳을 기록(우선 인천의 관광지를 중심으로 기록)하기 시작합니다. <인천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의 모임. 시티인천>라는 모임도 결성하여 인천에 대한 다양한 공부를 하고 있었습니다. 인천에 대한 것이라면 종류를 가리지 않고 배우고 익히려고 노력했던 시기입니다. 지역의 다양한 곳을 방문하고 다양한 분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듣고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인천이 고향이라고 말하는 제가 인천에 대하여 얼마나 무지한지를 체감하던 시기이기도 했지요.

다양한 문화활동가들을 만나던 중에 차이나타운의 <풍미>를 방문하게 되었고, 그것이 화교들에 대한 작업으로 이어지는 단초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때도 화교들만을 대상으로 작업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인연을 새로 만드는 계기가 되었을 뿐이지요. 또 사진을 시작하며 나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었고, 그것이 인천에 대한 작업으로 표현이 되기도 했습니다.
 

화교중산소학교 차이나타운 -서은미


첫 개인전 이후 한동안 인천에서 인물작업에 집중하던 때가 있었는데 그 작업을 ‘인천이지안, The INCHEON-izian’이라고 이름을 만들었는데, 두 번째 개인전이었습니다. 그 내용은 내가 태어나고 성장한 도시 인천에서 만난 다양한 인물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그 작업 속에서 나의 정체성과 도시 인천에 대한 나만의 시각으로 본 정체성을 정의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작업 중 하나가 제가 알고 지내던 화교 분들의 이야기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인천에 대한 기록 속에 차이나타운이 들어가 그전부터 알고 지내던 분들의 이야기가 들어간 것이지요. 화교 양노원의 할아버지와 동네 중국집 화교 가족과 차이나타운에서 만난 화교 분들의 이야기들이 한 조각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화교 분들만 따로 작업했던 것은 아니고 ‘인천이지안’에서 만난 인천사람 화교였지요.

화교를 처음 만난 것은 앞서 얘기했던 것처럼 제가 유치원에 다니던 대 여섯 살 때 해안성당 화교양로원의 할아버지들이었습니다. 커다란 만토우(산동지방 주식인 흰빵)를 건네주던 새까맣고 가느다란 할아버지의 손가락과 유난히 크고 하얀 빵에 놀라 크게 울어 아버지를 곤란하게 했던 기억이 화교에 대한 저의 첫 기억입니다. 그분들은 양로원 경영난으로 최신부님이 덕적에서 양로원을 운영하게 되어 이주하게 되었고, 국민학교 입학 전까지 동네에선 "은미네할아버지"라고 불리던 분이 계실 정도로 친하게 아니 가깝게 지냈습니다. 그 후 그 양로원은 갈산동 가톨릭 시설로 다시 한 번 옮겨가게 됩니다. 당시 양로원에 할아버지들과 함께 온 소년이 있었고, 후에 최분도 신부님의 고향 지인에게 입양되었는데, 지금도 연락을 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인이 되어 인천에 대한 관심으로 인천 곳곳을 누비고 다닐 때 해안성당 앞에서 그분들을 다시 마주하게 됩니다. 그리고 최근 인천대에서 진행한 한국인천화교협회 소장 자료 아카이빙 작업에 참여하며 더 많은 분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전에 화교 관련 전시를 두 번 하기도 했습니다만 그것이 타인의 시선으로 본 화교였다면 아카이빙 작업 이후엔 이웃정도로 발전한 것 같습니다. 개인적인 인연으로 화교 분들을 만나고 기록한 시간은 십 년이 조금 넘었습니다. 하지만 그 시간은 물리적인 시간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래된 이웃 혹은 가까운 이웃 화교’라는 타이틀의 전시나 기획은 많았지만 정말 그런지 생각을 하게 만들었던 것이 지난 1월 30일 오픈한 한국화교생활사 사진전 <서랍 속에서 기억을 찾다> 전시를 준비하면서였습니다. 가깝다고 생각했던 것은 나의 착각이었지요.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살아오면서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많은 시간들을 다양한 소수자들과 함께 한 시간들이 날 착각하게 만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많은 어려움도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격려를 아끼지 않았던 남편과 화교학교 선생님들과 적극 지지해준 화교 분들이 있어서 준비가 가능했던 전시입니다. 짧은 시간의 준비로 초반에는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힘이 들었는데, 나중에는 많은 사진과 이야기를 들려준 그분들에게 제대로 된 전시를 보여드리지 못한 것 같아 죄송할 따름입니다. 준비기간 중간쯤에 모여진 사진은 오백여 장 정도여서 체면은 살리겠다고 생각했는데, 최종 접수된 사진은 1천5백장이 조금 넘었습니다. 처음에는 전시기획이 무모하다는 염려의 이야기도 많이 들은 상황이어서 마음 편할 날이 없었는데, 나중에 이 많은 사진을 어찌해야 하나, 하는 걱정으로 바뀌었습니다. 당장은 어렵겠지만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에서 화교생활사 자료집을 출판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처음 계획보다는 출판이 늦어질 것 같아 사진을 제공해 주신 분들께 죄송한 마음이라 요즘은 그분들을 찾아뵙고 사정을 얘기하고 양해를 구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일상사 사진은 말 그대 일상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있어서 솔직히 남에게 꺼내 보인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들을 꺼내 주시고 함께해 주신 분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전시를 준비하다보니 그들의 세시풍속뿐만 아니라 요즘은 차이나타운 내 화교들의 가족관계도 웬만큼은 알게 되었습니다. 사진을 모으다 보니 자연스럽게 알게 되더군요. 누구 집에 가면 어떤 사진이 있을 거라는 귀띔도 해 주셨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가까운 친척이었더군요. 관혼상제를 중심으로 사진을 모으다 보니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거였어요. 단체기념사진에 낯익은 얼굴이 여기저기서 등장하더군요. 몇 년 전 화교들의 가장 큰 명절인 춘절(설) 제사를 준비하며 사진을 찍고 싶은 지 연락을 받았을 때는 정말 기뻐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습니다. 제사는 물론 집안의 경조사가 있으면 자연스럽게 연락을 주시는데 감사할 따름이지요. 

그동안 화교들과 만나면서 어려웠던 것이 몇 가지 있는데, 그건 지금까지 많은 한국인들이 그들의 문화를 이해하려 들지 않고 우리와 다른 부분들을 신기해하며 채집하듯이 그분들을 상대했다는 것입니다. 할 이야기가 없다던가 줄 사진이나 자료가 없다는 이야기는 그래도 양호했습니다. 사진가란 내 명함을 받고 눈도 마주보지 않았던 분들도 계셨습니다. 너무도 폭력적으로 그들을 대했던 많은 분들 때문에 어려움도 많았지만 저는 사진가로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배웠습니다. 

‘인천이지안’을 준비할 때도, 최근 작업에도 소개를 받으면 먼저 인터뷰를 최소한 서너 번 이상 진행을 하고 카메라를 들었습니다. 2년 동안 사진은 찍지 않고 이야기만 들었던 집도 있었습니다. 나중엔 왜 사진을 찍지 않는지 이젠 찍어도 된다고 말씀해 주신 분이 계셨습니다. 이젠 동네에서 아주 든든한 ‘빽’이 되었지만 그렇듯 우리가 많은 상처를 주었다는 것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근ㆍ현대사에 나오는 제도적 규제가 아니라 우리가 우리의 욕심을 위해 그들에게 준 상처는 생각보다 많았고 컸습니다. 이제는 그런 것들을 치유해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방법은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그들을 관광상품으로 전락시키는 일은 더 이상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각종 시설을 만들고 행사를 만들어 홍보하지만 그 어느 것도 그들의 주체적 참여는 없었습니다. 일회성으로 기획되는 많은 축제들과 전시장을 이제는 그들 스스로가 그들의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합니다.
 

Re 선린동 2014 중산학교 사진반 전시


인천문화재단과는 2013년에 정지은 과장의 요청으로 진행된 ‘무지개다리’사업의 일환으로 중구 차이나타운에 대한 부분을 맡아 진행하여 그 결과물이 <동네한바퀴>라는 책으로 나왔습니다. 동네 주민과 학생들 그리고 선생님들을 인터뷰하며 그들의 이야기에 좀 더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2014년에는 화교중산중학의 학생들과 선생님, 동문들과 중국유학생들을 상대로 사진수업이 진행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얼마 전 인천아트플랫폼에서 전시와 <천개의 마을, 천개의 문화>라는 제목으로 출판이 되었습니다. 물론 그 안에는 화교 관련 프로그램 외 다양한 다문화 관련 프로그램들이 소개되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다양한 교류가 시도되고 지속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는 것을 두 번의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절감하였습니다. 좀 더 자주 다양한 교류가 어린이들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개개인의 교류도 중요하지만 사회 속에서 많은 프로그램들이 개발되어 활발한 교류가 지속되길 바랍니다.(이 부분은 글로 표현하는데 어려움이 많아 잘 표현하지 못하고 있는데 정말 중요한 부분입니다.)

올해는 이번 전시를 위해 만난 분들의 이야기를 정리하는 시간을 가져볼 계획입니다. 생활사 전시라는 측면에서만 이야기되었던 그분들의 다른 많은 이야기를 들어보려고 합니다. 다른 작가들은 고려인 3세나 일본에 있는 교포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제 여건은 그렇게까지는 어렵고 비슷한 상황의 이웃인 인천 속 화교 분들을 기록하려고 합니다. 그것이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니까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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