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27일 오후 설악산으로 출발했다. 28일 새벽 4시쯤 출발하여 한계령휴계소에 가서 아침식사를 하고 9시쯤 한계령휴계소에서 오를 예정이였다. 그런데 새벽 4시에 출발하여 서너시간 운전 끝에 바로 등반하기가 무리일 것 같아 27일 오후로 일정을 변경했다.
어디에서 일박할까 궁리하다가 양양, 속초, 인제에서 한계령휴계소까지의 거리를 검색해보니 인제가 제일 가깝기에 인제에 가서 일박하기로 하고 인제로 갔으나 인제엔 찜질방이 없었다. 현지 주민에게 알아보니 인제엔 찜질방이 없고 원통에 가면 있다 하여 10km쯤 떨어진 원통 찜질방으로 가서 일박했다. 28일 오전 8시반쯤 한계령휴계소에 도착하여 휴계소에서 뚝배기불고기(9,000원)로 아침식사를 마치고 9시 25분에 산행을 시작했다.
10월 하순 설악산 날씨는 겨울 날씨 못지 않고 더욱이 갑자기 추워진 날씨로 복장에 신경을 많이 썼다. 귀는 모자의 옆 귀마개를 내리기로 하고 하의는 가을 등산복에 얇은 내복을 하나 껴입었다. 상의는 가을 등산용 티셔츠에 겨울용 가벼운 잠바를 입고 그 위에 등산용 조끼를 입기로 했다. 목과 얼굴은 뒤집어쓰는 양말목같은 천을 준비했다.
휴계소 식당 바로 옆에 등산로 입구가 있다. 단체로 온 사람들은 모여서 점검할 게 있겠지만 일행이 없으니 바로 출발했다. 입구부터 가파른 계단이다. 20m쯤 올랐을까. 입산 통제소가 있었다. 금방 내 나이를 짐작했는지 "혼자이십니까? 힘드실텐데요" 하고 묻는다. "예, 혼자인데요. 중청대피소에서 잘겁니다." 하니 대피소 예약을 확인하고는 보내준다.
가도가도 오르막길, 계단길, 돌길이다, 군데군데 얼음이 얼어 미끄러웠다. 어쩌다 하산 하는 사람을 만나고 나보다 뒤에 출발한 사람들이 나를 앞질러 가는 사람도 많았다. 어디에서 무엇을 카메라에 담을 것인가. 스마트폰은 배터리를 아끼느라고 아얘 전원을 꺼두었다. 디카로 사진을 찍을 작정이었다.
그런데 무엇을 찍는단 말인가. 능선과 낙엽이 다 떨어진 나무들, 그리고 가파른 돌길, 인공 계단길뿐인데 어떤 사진을 찍어도 인터넷으로 수없이 본 풍경 사진을 재탕 삼탕 찍는 것에 지나지 않을 것 같아 오르는 내내 사진 찍는 것을 포기했다.
날이 추워 장갑을 끼고 있고 두 손에 스틱을 잡고 배낭을 메고 있으니 사진 찍는 일도 여간 번거로운 게 아니다. 힘들게 오르는 사람들에게 사진 부탁하기도 어려웠다. 오로지 오르는 일에만 온 신경을 집중하여 오르고 또 오르기만 계속했다. 힘들면 바위에 걸터앉아 물 한 모금 마시고 초콜릿 반토막을 먹거나 사과 한 개를 먹었다.
다시 오르기 시작한다. 가도가도 끝이 없다. 가끔 만나는 아찔한 바위 비탈길에 바짝 긴장하기도 했다. 드디어 서북능선으로 이어지는 한계령삼거리까지 왔다. 어떤 사람은 1시간 50분, 또 어떤 사람은 1시간 18분 걸렸다고 하는데 나는 두 시간 25분이 걸렸다.
인터넷 검색 자료엔 삼거리에서 이어지는 서북능선길은 다소 수월하다고 했으나 그렇지 않았다. 바위들이 뒤얽혀 있어 도저히 길이라고 할 수 없는 절벽 같은 길을 타고 넘어야 했다. 바람은 능선과 계곡에 따라 달랐다. 어느 곳에서는 모자를 움켜잡거나 꼭꼭 눌러 써야 했고 어느 곳에서는 바람 한 점 불지 않았다.
가도 가도 이어지는 비탈길, 돌길, 낭떨어지길을 지나 멀리 까마득하게 대청봉이 보였다. 저녁 5시가 다된 시간이었다. 해는 어느덧 기울어 대청봉 반대쪽에 그늘이 지고 있었다. 한 걸음 한 걸음 대피소에 도착하니 온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5시에 도착했는데 6시가 되기 전까지는 입장 불가.
6시가 되어서야 등록을 하고 담요를 대여받고 숙소 배정을 받았다. 3층까지 되어 있는 숙소에 나는 1층을 배정 받았다. 일련번호가 붙은 침상이 있는데 상체부분은 칸막이로 되어 있었다. 침상에 배낭과 스틱을 내려놓고 취사실로 갔다. 두 개의 취사실이 있는데 그곳에선 진수성찬이 벌어지고 있었다. 삼겹살을 굽고 찌개가 바글바글 끓고 소줏잔이 돌려지고 있었다.
나는 사과와 초콜릿, 두유만 준비하고 대피소에서 햇반을 사 먹을 작정이었다. 햇반( 3000원)과 양념 참치캔(3000원)을 사서 나무젓가락으로 비벼 먹는 것으로 저녁을 해결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담요 한 장은 깔고 한 장은 덮었는데 나중엔 사람들 열기로 약간 더울 정도였다. 9시에 소등하는데 영 잠이 오지 않았다.
이리뒤척 저리뒤척 하다가 간신히 잠이 들었다. 얼마를 잤을까. 소란스러워 깨어보니 사람들이 기상하여 침구 정리를 하고 있었다. 나도 서둘러 일어나 침구를 정리하고 담요를 반납했다. 식사는 다시 햇반과 참치캔으로 해결하고 생수로 대충 얼굴을 씻고 대청봉을 향해 출발했다. 대피소에서 대청봉까지는 600m. 바람은 쌩쌩 불고 모자를 눌러써가며 어두운 새벽길을 재촉했다. 부옇게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정상에 오르기 직전 해가 솟기 시작했다. 서둘러 카메라를 준비하고 꺼두었던 핸드폰을 작동시켰다. 핸드폰이 왜 그렇게 느리게 작동되는지 일출을 찍지 못할까봐 조바심이 났다. 손은 얼어서 제대로 움직여지지도 않았다. 간신이 휴대폰을 작동시켜 어떤 분에게 부탁하여 겨우 사진 두 컷을 찍을 수 있었다. 다른 사진은 디카로 찍은 것이다.
추워서 오래 있을 수도 없었다. 정상에서 10여 분 머물다가 바로 하산길에 올랐다. 오색분소 쪽으로 내려가기로 했다. 가파르긴 해도 거리가 제일 가깝다고 했다. 내려오는 길에 급경사 구간이 두 번 있었는데 3시간 정도는 급경사 길을 내려온 것 같다. 남들은 내려오는데 3시간 4시간 걸렸다는데 나는 5시간이 걸렸다. 6시 55분에 정상에서 출발하여 11시 50분에 남설악탐방지원센터에 도착했다.
남설악탐방지원센터 앞에는 택시가 세 대가 대기하고 있었다. 한계령휴계소까지 10km정도 되는데 택시요금은 15,000원이었다. 한계령휴계소로 다시 가서 황태해장국으로 아침식사를 하고 출발했다. 몸이 많이 피곤하면 원통 찜질방으로 가려고 했는데 괜찮을 것 같았다. 그대로 인천으로 와서 동네 목욕탕에서 뜨거운 물에 몸을 담갔다가 귀가했다.
백문이불여일견이란 말이 실감났다. 아무리 설명을 잘 하고 세밀하게 기록을 해도 어떻게 그 상황을 낱낱이 표현할 수 있을까. 올라갈 때 7시간 반, 내려올 때 5시간 동안 혼자 산에서 겪은 날씨, 햇빛과 얼음길, 낙엽은 다 지고 바람만 쌩쌩 몰아치는 산등성이, 오르락 내리락 이어지는 계곡과 능선을 어떻게 필설로 다 기록할 수 있을까.
내려다보면 수없이 이어지는 봉우리와 능선, 깎아지른 듯한 바위 절벽, 멀리 보이는 동해바다와 속초 시내, 마땅히 이런 대자연의 품속을 거닐며 세속의 때를 다 씻어내고 맑은 생각을 되찾아 와야 하거늘 이런 저런 사념은 산행 내내 떠나질 않으니 몸과 마음을 수양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짐작이 된다.
오다가다 만나는 등산객을 보면 저절로 인사말이 나오기도 했다. 내려올 때는 내가 먼저 자주 인삿말을 건넸다. "수고하십니다.' "조심해서 천천히 올라가세요." 올라갈 때는 거의 다 올라가 몇 장을 찍은 것 외에는 사진을 안 찍었는데 내려 올 때 거의 다 내려와서 사진을 찍었다. 단풍이 그나마 조금 남아 있는 곳은 산 제일 아래 지점이었다. 다람쥐와 산새를 몇 마리씩 보았는데 일부러 사람 곁으로 온 게 아닌가 싶게 가까이 다가오기도 했다.
하산을 시작한지 5시간이 되어갈 무렵이었다. 계곡에 물이 흐르고 아직 빨간 단풍이 그대로 남아 있고 계곡을 가로질러 남설악교라는 조그만 다리가 보였다. 길은 완만하게 이어지고 웬지 따뜻하고 포근한 분위기다 싶었는데 멀리 출입문 같은 작은 건축물이 보였다. 그곳이 바로 남설악탐방지원센터 옆 등산로 입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