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배층의 질서, 소비시대의 주체들, 내면에 꿈틀대는 의식의 흐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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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배층의 질서, 소비시대의 주체들, 내면에 꿈틀대는 의식의 흐름
  • 한인경 객원기자
  • 승인 2016.11.14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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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공간] (4) 파이트 클럽, Fight Club / 데이빗 핀처 감독

<인천in>이 남구의 예술영화관 ‘영화공간주안’과 한인경 시인의 협약하에 개봉영화를 리뷰하는 기획을 연재합니다. 한달에 1~2회씩 ‘영화공간주안’이 상영하는 예술영화의 예술적 가치와 의미를 되새겨볼 수 있는 기획입니다. 


파이트 클럽, Fight Club

개  봉 : 2016.10.26. 재개봉(139분/미국)
등  급 : 청소년관람불가
감  독 : 데이빗 핀처
출  연 : 브래드 피트, 에드워드 노튼, 헬레나 본햄 카터, 미트 로프
상영관 : 「영화공간주안」


 
 
『파이트 클럽』
누아르(noir)물이 아닐까? 제목이 주는 선입견은 던져 버리자.
제목만을 보고 관련 영화로 생각했다면 다소 아쉬운 선택일 것이다. 데이빗 핀처 감독은 메시지를 전달을 위한 수단으로 대화가 아닌 희망을 포기한 주먹을 택하였다. 뭐지 뭐지 하면서 보다 보면 어느새 의식과 무의식 속의 존재에 몰입되어 전후좌우를 맞춰보고 있는 자신을 보게 된다. 블랑키주의적인 분위기가 강하다. 그러나 『파이트 클럽』은 사회를 초토화하려는 과정을 수단으로 삼았을 뿐 포인트는 무의식 존재를 계속 의식화시키고 대화하게 하는 심리 영화이다.

겉으로 드러난 나 그리고 의식 속 어쩌면 좀 더 솔직한 나와는 얼만큼의 거리가 있을까? 주인공 잭(에드워드 노튼)과 또 다른 잭, 즉 잭의 허상인 테일러 더든(브래드 피트)은 상반된 캐릭터를 보여 준다. 기존의 사회질서에 순응하며 생활하는 잭의 모습은 보통 출퇴근 길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늘 공허함과 소멸하여 가는 자신에 대한 반감으로 가득 찬 또 다른 잭, 테일러 더든, 다 버려야 자유를 얻는다는 테일러 더든은 도시 폭파라는 엄청난 상황까지 끌고 간다. 제목에서 반사적으로 갖게 되는 일차원적 상상은 영화 시작을 넘기면서 오래지 않아 여지없이 무너져 내린다.

요약하면 액션영화이지만 영화의 전반을 뒤엎는 반전의 스릴 심리극이다.
데이빗 핀처 감독은 브래드 피트를 주연으로 영화『세븐』을 만들었고 4년 후인 1999년 『파이트 클럽』으로 다시 손을 잡았다. 『세븐』은 거의 20년 전의 스릴러 영화이지만 참으로 기발하고 신선한 내용이었다. 성서의 7가지 죄악을 따라 순서대로 벌어지는 살인극을 추적하는 영화다. 고참 형사 모건 프리먼과 새내기 형사 브래드 피트와의 요즈음 표현을 빌자면 케미가 잘 이루어진 영화다. 영화 『세븐』이 여러 타이틀을 달고 추천 리스트에 자주 올라오긴 하지만 『파이트 클럽』의 완성도와 견주어 본다면 개인적으로 『파이트 클럽』에 훨씬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주인공 잭은 잘 갖춰진 아파트에서 문화적 혜택을 누리고 산다.
한국에서도 낯익은 이케아 가구로 내부를 장식하고 지속적으로 구매를 한다. 마치 분출시키고 싶은 욕망이 이케아 가구 구매로 환치되는 듯하다. 자동차 회사의 리콜을 담당하며 반복되는 출장업무와 일상에 염증을 느낀다. 복사기에서 복사되는 서류 같다고 자조적인 생각을 한다. 출장 중에는 비행기의 충돌이나 추락을 상상한다. 기내에서 주어지는 1회 용품들을 대하면서 여행은 삶을 축소시키고 동시에 삶은 매 순간 사라져 간다고 생각한다. 일상의 활력을 잃은 잭은 불면증에 시달리며 치료를 위해 의사가 추천해준 인생의 외로운 길에서 분투 중인 일종의 결핍 모임을 찾게 된다. 고환암 환자, 폐결핵 환자, 피부암 환자, 신장병, 백혈병, 위암, 빈혈 환자 모임 등. 이러한 모임에서 상대적 위로를 찾게 되어 일시적으로 불면증 치료 효과를 본다. 그것도 잠시 말러(헬레나 본햄 카터)라는 자신과 같은 가짜 환자로 가입한 여인을 발견하면서 모임 활동을 중단한다. 말러는 영화 마지막까지 ‘위선이 없는 타락’한 여인으로 주인공의 의식세계를 증명해주는 중요 역할을 한다.

출장 중 우연히 기내 옆자리에 앉게 된 비누를 만든다는 테일러 더든을 알게 되면서 주인공의 일상은 대변화를 맞게 된다. 그는 허상으로 영화 내내 잭과 같은 공간에서 잭의 의식을 명령하고 지배한다. 그들은 폭력이란 방법으로 치열하게 충돌해가는 공동생활을 한다.



 
쉽게 떠오르는 반전의 백미 영화로 『식스 센스』와 한국영화로는 『올드 보이』가 있다. 『파이트 클럽』도 견주어 손색이 없다.
잘 꾸며 놓은 주인공의 아파트가 화재로 전소되면서 테일러의 명함으로 연락하게 되고 그때부터 테일러의 허름한 집에서 함께 지내게 된다. 테일러는 자신을 힘껏 때려 달라는 부탁을 시작으로 주인공은 피가 튀겨 나가는 상황을 오히려 쾌감으로 받아들인다. 지하에 ‘파이트 클럽’이라는 비밀 조직을 결성하며 현대 물질 만능 사회에서의 권태감, 사회의 소위 루저(looser), 일탈을 원하는 사람들이 모여들며 조직화되어 간다. 테일러의 거침없는 표현에 잭은 일시에 빠져들고 지루하게 느꼈던 회사 생활도 새로운 기분으로, 다른 눈빛으로 근무하게 된다. 한쪽 눈이 전날의 격투로 시퍼렇게 멍들어도 아무렇지도 않게 근무하며 동료, 상사의 이목에 대담해져 간다.
 

 

영화의 한가운데,
주인공의 무의식적 착오 행위는 절정을 향한다.
마치 새로 태어난 전혀 다른 사람으로 지내는 잭. ‘파이트 클럽’은 전국적인 규모로 확대되는데 테일러는 상식을 벗어나는 과제를 회원들에게 부여한다. 예를 들면 지나가는 사람을 화나게 하여 싸움 걸기, 커피점 폭파하기 등. 파이트 클럽은 점점 군대식으로 명령과 복종과 조직이라는 구조를 갖추게 된다. 파이트 클럽의 일인자 테일러는 거침없이 말한다.

“우리는 소비문화의 부산물이다. 살인, 굶주림 따윈 관심 없다. 싸우고 싶은 욕망은 누구에게나 있다. 우린 그 욕망을 드러냈을 뿐이다. 싸워봐야 저 자신을 알게 된다. 상처는 훈장이다.”



사람들은 ‘파이트 클럽’에서 폭력이 주는 통쾌한 일탈에 매료된다. 비명 소리를 덮는 둔탁한 파열음, 피를 뿜으며 내지르는 신음에서 생명을 느낀다. 한바탕 격투가 붙고 난 후 구원받은 듯하다는 그 느낌을 즐긴다. 파이트 클럽 내에서는 개인 이름이 없으며 오로지 클럽의 엄격한 5대 규칙이 절대 법이다. 실체가 없는 테일러, 주인공의 눈에만 보이는 테일러. 상황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과격화, 사회 전체를 대상으로 폭력화되어간다.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테일러의 흔적을 좇다가 드디어 잭은 지금껏 테일러라는 인물이 자신이 만들어낸 자신 속의 환각체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자신을 테일러라고 부르는 사람들, 심지어 말러와 사랑을 나눈 대상도 테일러가 아니라 잭이었다는 사실에 혼란스러워하며 기억을 더듬으려 혼돈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
 
 


불쑥불쑥 나타나는 허상인 테일러, 이미 도심 속의 거대 건물들에 폭파 장치를 해 놓은 상태에서 잭은 이것을 막기 위해 허상 테일러, 무의식 존재와 설전을 벌인다.

“넌 변화를 원했지만 혼자선 할 수 없었어. 그래서 상상해 낸 게 나야. 난 네게 없는 걸 다 갖췄어. 누구나 매일 상상 속에서 변화를 꿈꾸지만, 너처럼 실천하진 못하지. 내 덕에 넌 사람이 됐어. 내게 다 맡겨봐. 늘 그랬듯이 지금은 반항해도 나중엔 감사할 거야. 예전으로 돌아가서 멍청이 같이 지낼래? ”

“네가 날 원하니까 날 없애지 못해, 폭탄은 이미 건물 10개에 설치되어있어. 신용사회가 무너지는 꼴을 우리가 보게 될 거야. 신용카드회사와 국제 정보센터의 채무기록을 없애면 모두 원점이 되고 대혼란이 오게 되지.”


 
이미 의식의 세계로 돌아온 잭은 환각을 없앨 수 있는 마지막 카드를 깨닫게 된다. 자신의 입을 향해 총구를 겨누고 방아쇠를 당긴다. 허상이었던 테일러는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잭은 총알이 볼 옆으로 지나가는 행운으로 목숨을 유지한다.
 
감독은 주인공의 이름보다는 나레이터로서 자신과 대화해나가는 형식을 취한다.
현상과 허상이라는 착각 속의 스토리 전개가 다소 억지스럽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감독의 메시지는 확실하다.
지배층 힘의 질서에 잘 짜 맞춰진 소비 시대의 주체들. 이들은 내면에 꿈틀대는 의식의 흐름을 이겨내야 한다. 간혹 그 흐름을 조절하지 못하고 오역을 하는 실수를 하기도 한다. 인간 본성과 이성은 자주 상충된다. 기존 질서에 역행하는 자신을 거칠게 드러내지 말자. 의식의 균열에 의식을 주자.
 
거대 건물들에서 폭파 장치가 작동된다. 욕망 덩어리 고층 빌딩들이 하나, 둘 무너져 내리는 장면과 함께 영화는 막을 내린다.
 
(한인경 / 시인·인천in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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