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5편 위령공(衛靈公)
상태바
제 15편 위령공(衛靈公)
  • 이우재
  • 승인 2010.08.24 09:3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제 15편 위령공(衛靈公)

1, 衛靈公問陳於孔子. 孔子對曰 俎豆之事 則嘗聞之矣. 軍旅之事 未之學也. 明日遂行.
  在陳絶糧. 從者病 莫能興. 子路慍見曰 君子亦有窮乎. 子曰 君子固窮. 小人窮斯濫矣.
  위령공이 공자에게 진법(陣法)에 대해 물었다. 공자께서 대답하시길 “제례에 관한 일이라면 일찍이 들은 바 있습니다만, 군사에 관한 일은 아직 배우지 못했습니다.”
  그리고는 그 이튿날 마침내 떠나셨다.
  진(陳)나라에 계실 때 양식이 떨어졌다. 수행하던 자들도 병이 나서 일어나지 못했다. 자로가 화가 나 공자를 뵙고 말하길 “군자도 곤궁한 때가 있는 것입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군자도 원래 곤궁할 때가 있는 법이다. 소인은 곤궁하게 되면 도에 어긋난 일을 행한다.”

  <해설> 진(陳)은 진(陣)으로 군사를 배치하는 진법(陣法)이다. 俎豆之事의 조두(俎豆)는 제례 때 쓰는 그릇이니, 곧 제례에 관한 일을 뜻한다. 태백 4에서는 변두지사(籩豆之事)라고 하고 있다. 軍旅之事의 군(軍)은 병력 12,500명의 군대를 말하고, 여(旅)는 500명으로 구성된 군대이다. 즉 군사에 관한 일을 말한다.
  위령공이 전쟁에 관한 일을 물었다. 아마 전쟁을 일으킬 계획이 있었던 모양이다. 이에 공자는 더 이상 위령공에게 기대할 바가 없다고 판단하고 그 다음날 위나라를 떠난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작정이었으리라. 수(遂)는 그러한 공자의 마음을 나타내고 있다.
  진(陳)나라는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일대의 작은 나라이다. 공자가 천하를 주유하던 중 채(蔡)나라를 떠나 진나라를 들르게 되었다. 그런데 진나라와 채나라 사이에서 뜻하지 않게 식량마저 떨어지는 곤궁한 사태에 처하였다. 그 원인에 대해서 고주의 공안국(孔安國)은 진나라가 오(吳)나라의 침략을 받아 전란에 휩싸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사마천은 『사기』 「공자세가」에서 달리 설명하고 있다. 남방의 대국 초(楚)나라가 공자를 초청하였다. 공자가 초나라에 등용될 경우 자신들이 위태로워질 것을 두려워한 진나라의 대부들이 사람을 보내 공자의 초나라행을 막았다. 공자 일행이 식량이 떨어진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고.
  아무튼 뜻하지 않은 곤궁한 사태에 직면한 자로는 화가 났다. 자기의 스승 같은 성인에게 어찌 이처럼 비참한 일이 생길 수 있냐는 것이다. 세상이 원망스러웠으리라. 공자가 그런 자로를 달랜다. 군자에게도 곤궁할 때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부귀는 하늘의 손에 달려 있다. 군자는 도를 행하는 것에 관심이 있을 뿐이지, 부귀나 빈천에는 관심이 없다. 그러므로 설사 곤궁하다고 하여 도에 어긋난 일을 행하지 않는다. 그러나 소인은 다르다. 소인은 곤궁한 경우를 당하면 참지 못하고 도에 어긋난 일을 행한다. 그것이 소인과 군자의 차이다. 그러므로 화내지 말고 묵묵히 인내하자고. 小人窮斯濫矣의 남(濫)은 일(溢)로 지나쳐 넘치는 것이다.
  신주의 정자(程子)는 고(固)를 진실로, 원래라는 뜻으로 해석하지 않고 고수(固守)로 해석한다. 즉 군자는 곤궁한 일을 굳게 잘 참는다는 뜻이다. 전반적인 뜻에 큰 차이는 없다.  
  공자가 13년 간 천하를 주유하는 동안 가장 곤궁하였을 때가 바로 이 진(陳)나라와 채(蔡)나라 사이에 있을 때였다. 그때의 일을 흔히 진채지액(陳蔡之厄)이라고 부른다. 맹자(孟子)는 「진심(盡心)하」편 18에서 “군자(공자)가 진나라와 채나라 사이에서 액(厄)을 당하신 것은 상하간에 사귐이 없었기 때문이다.”라고 하고 있다.
  고주에서는 在陳絶糧 이하를 별개의 장(章)으로 나눈다.
 
2, 子曰 賜也 女以予爲多學而識之者與. 對曰 然 非與. 曰 非也. 予一以貫之.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사야, 너는 내가 많이 배워 그것을 잘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느냐?”
  자공이 대답하기를 “그렇습니다. 아닙니까?”
  말씀하시길 “아니다. 나는 하나로 일관되어 있느니라.”

  <해설> 사(賜)는 자공의 이름이고, 식(識)은 기억하는 것이다.
  자한 6에서 자공은 공자가 하늘이 내신 성인이라 여러 가지 재주가 많다고 하고 있다(子貢曰 固天縱之將聖 又多能也). 그 자신도 재주가 많았던 사람이라, 공자의 사후 세상에는 그가 공자보다 더 현명하다는 평판까지 있었다(叔孫武叔語大夫於朝曰 子貢賢於仲尼―자장 23). 재주가 많은 사람의 눈에는 남의 재주만 보이는 법이다. 자공은 공자를 지식의 측면에서만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자공에게 공자가 말한다. 자신의 배움은 모두 하나로 일관되어 있다고. 그 일관된 하나가 무엇인지는 말하지 않는다. 다만 이인 15를 보면 증자는 그것을 충서(忠恕)라고 말하고 있다. 또 위령공 23에서 공자는 자공에게 한마디 말로 평생동안 실천할 만한 것은 서(恕)라고 하였다. 이런 정황으로 미루어 보아 공자가 말하는 하나라는 것은 아마 서(恕)일 것이다.

  <참고> 一以貫之라는 표현은 이인 15에도 보인다.

3, 子曰 由 知德者鮮矣.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유야, 덕을 알아주는 자가 드물구나.”

  <해설> 유(由)는 자로의 이름이다.
  공자의 세상에 대한 탄식이다. 그러나 공자는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세상에 대해 원망을 갖지는 않았다.
  고주의 왕숙은 앞의 1장과 관련지어 공자 일행이 진나라에서 곤욕을 겪을 때 자로가 화를 낸 데 대해 공자가 이렇게 말한 것이라고 풀이하고 있으나, 꼭 그렇게 볼 필요는 없을 것이다. 

4, 子曰 無爲而治者 其舜也與. 夫何爲哉. 恭己正南面而已矣.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천하를 잘 다스린 사람은 순임금이신가? 그분이 무엇을 하셨으리오. 자신을 공손히 하고 남쪽을 향해 앉아 계셨을 뿐이지.”

  <해설> 무위(無爲)는 무조건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노장(老莊)의 사상에서 무위(無爲)는 자연(自然)의 법칙인 도(道)를 따를 뿐 아무 것도 인위적으로 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공자가 그런 뜻으로 말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이 덕(德)으로 솔선수범하여 그것으로 백성이 교화된다면, 새삼 인위적으로 다스릴 필요가 없게 된다는 뜻은 아닐까? 위정 1에서는 덕에 의한 정치를 북극성이 가만히 있는데도 뭇 별들이 그를 향해 인사하는 것에 비유하였다. 즉 무위(無爲)라는 것은 군주의 덕에 의한 정치를 말하는 것이다. 그럴 때만이 굳이 영(令)을 내리지 않아도 다스려지는 것이다(其身正 不令而行―자로 6).
  하안의 고주에서는 무위(無爲)를 인재를 발굴하여 적재적소(適材適所)에 등용하였기 때문에 직접 정치에 나설 필요가 없었던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인재 등용의 중요함을 강조한 것이나, 그것만으로 보기에는 어딘가 부족한 듯 생각된다. 

5, 子張問行. 子曰 言忠信 行篤敬 雖蠻貊之邦 行矣. 言不忠信 行不篤敬 雖州里 行乎哉. 立則見其參於前也. 在輿則見其倚於衡也. 夫然後行. 子張書諸紳.
  자장이 뜻이 행(行)하여지는 것에 대해 물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말이 성실하고 신의가 있으며, 행동이 독실하고 공경스러우면 비록 오랑캐의 땅이라 하더라도 행(行)해질 것이다. 말이 불성실하고 신의가 없으며, 행동이 독실하지 못하고 불경스러우면 비록 네가 사는 곳이라 하더라도 행(行)하여지겠느냐? 이 말이 서 있을 때는 네 눈앞에 삼삼하게 보이고, 수레에 탔을 때는 수레 멍에에 걸려 있는 듯 보이게 하라. 그러면 네 뜻이 행(行)하여질 것이다.”
  자장이 이 말을 큰 띠에 적었다.

  <해설> 행(行)은 자기의 주장이나 뜻을 세상에 펴는 것이다. 만맥(蠻貊)의 만(蠻)은 남쪽의 오랑캐(南蠻), 맥(貊)은 북쪽의 오랑캐(北狄)다. 주리(州里)는 본래 행정구역을 의미하나, 여기서는 자기가 사는 고장을 가리킨다. 參於前은 눈앞에 삼삼한 것이다. 여(輿)는 수레, 倚於衡은 수레의 멍에(衡)에 걸려 있는 것이다. 신(紳)은 허리에 매는 큰 띠다.
  뜻이 행(行)하여지는 것이 멀리 내 몸밖에 있는 것은 아니다. 충신독경(忠信篤敬), 이 네 글자를, 서 있을 때는 눈앞에 있는 듯, 수레를 탔을 때는 수레 멍에에 걸려 있는 듯, 한시도 잊지 않고 생각한다면 자연 학덕이 깊어지게 되고, 그에 따라 자연히 뜻이 행(行)하여진다. 이 말을 들은 자장이, 한시도 충신독경(忠信篤敬), 이 네 글자를 잊지 않으려고 허리에 매는 큰 띠에 적은 것이다.  

6, 子曰 直哉 史魚. 邦有道 如矢. 邦無道 如矢. 君子哉 蘧伯玉. 邦有道 則仕. 邦無道 則可券而懷之.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곧은 사람이로구나! 사어는. 나라에 도가 있을 때도 화살같이 곧았고, 도가 없을 때도 화살같이 곧았도다. 군자로구나! 거백옥은. 나라에 도가 있을 때는 벼슬에 나아가고, 도가 없을 때는 거두어 물러나는구나.”

  <해설> 사어(史魚)는 위(衛)나라의 대부로, 이름은 추(鰌)이다. 사(史)는 관직(官職)의 이름이다. 사어에 대해서는 시간(屍諫)이란 고사가 『공자가어(孔子家語)』 등에 전해진다. 위나라 대부 사어가 병이 깊어 죽게 되었다. 그는 일찍이 거백옥의 현명함을 알고 영공(靈公)에게 자주 천거하였으나, 영공은 거백옥을 쓰지 않고, 오히려 불초한 미자하(彌子瑕)를 중용하였다. 이에 사어는 자신이 살아 있을 때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지 못했으니, 죽어서도 예를 이룰 수 없다고 하면서, 자신이 죽거든 시신을 창문 밑에 놓아두라고 유언하였다. 영공이 조문을 와서 보고 괴이하게 여겼다. 그 자식으로부터 전말을 알게 된 영공은 마침내 미자하를 추방하고 거백옥을 등용하였다. 즉 사어는 죽어서도 자신의 시신을 갖고 임금의 잘못을 간하였다. 이것이 시간(屍諫)이다. 이 설화의 진위 여부는 알 수 없으나, 그 사람됨이 곧았기 때문에 이런 설화가 생겨났으리라. 
  거백옥은 헌문 26에서 나왔다. 거기서 공자는 그가 보낸 사신의 훌륭함을 칭찬하고 있다. 사신의 인물됨을 미루어 보아 그의 사람됨도 짐작할 수 있다. 권(券)은 거두는 것(收)이고, 회(懷)는 유월(兪樾)의 『군경평의(羣經平議)』에 의하면 귀(歸)로 돌아가는 것이다.
  공자는 사어를 직(直), 거백옥을 군자라고 평하고 있다. 사어보다 거백옥을 높이 평가한 것이다. 원래 공자는 천하에 도가 있으면 자신의 재주를 나타내고, 없으면 은거하라고 하였다(天下有道則見 無道則隱―태백 15). 임금을 도로써 섬기되, 듣지 않으면 그만둔다(以道事君 不可則止―선진 23). 무도한 임금을 자주 간하는 것은 오히려 해가 된다(事君數 斯辱矣―이인 26). 거백옥은 그 나아감과 물러남이 이와 같았으므로 공자가 그를 군자라고 칭하였다. 그러나 사어는 그 물러남을 알지 못한 관계로 곧다고(直) 한 것이다.

  <참고> 邦有道 … , 邦無道 …하는 표현은 공야장 1, 20, 태백 13, 헌문 1, 4에도 나온다.
 
7, 子曰 可與言而不與之言 失人. 不可與言而與之言 失言. 知者不失人 亦不失言.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더불어 말을 나눌 만한 사람인데도 함께 말을 나누지 않는다면, 사람을 잃게 된다. 더불어 말을 나눌 만한 상대가 아닌데도 함께 말을 나눈다면, 말을 잃게 된다. 지혜로운 자는 사람도 잃지 않지만, 말도 잃지 않는다.”

  <해설> 말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잇는 가교다. 그러나 아무나 함께 말을 나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말이 될 만한 사람, 즉 서로의 학덕을 증진시킬 수 있는 사람과 더불어 말을 나눠야 한다. 그러한 사람인데도 교류를 갖지 못한다면, 그 사람을 잃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사람과 말을 나누는 것은 쓸데없이 말만 낭비하는 것이다.
  
8, 子曰 志士仁人 無求生以害仁 有殺身以成仁.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뜻 있는 선비와 어진 사람은 살기 위하여 인(仁)을 해치는 일이 없으며, 목숨을 바쳐서 인(仁)을 이루는 일은 있다.”

  <해설> 인(仁)이란 공동체의 구성원들과 서로 더불어 살아가려고 하는 마음이다. 따라서 인(仁)에 뜻을 두고 사는 사람은 구차하게 한 목숨 살기 위하여 공동체의 구성원들에게 피해를 주는 그런 일은 하지 않는다. 자기의 목숨도 중요하지만 남의 목숨도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자기 한 목숨 바쳐 뭇사람들을 살리는 그런 경우는 있다. 비록 내 한 목숨은 사라지지만 그로 인하여 많은 사람이 살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지극한 인간에 대한 사랑이 어디에 있으랴. 살신성인(殺身成仁)이란 말이 여기서 유래했다.

9, 子貢問爲仁. 子曰 工欲善其事 必先利其器. 居是邦也 事其大夫之賢者 友其士之仁者.
  자공이 인(仁)을 행하는 것에 대해 물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장인(匠人)이 그 일을 잘 하고자 하면, 반드시 먼저 그 연장부터 잘 다듬는다. 어느 나라에 있던지 그 대부 가운데 현명한 사람을 섬기고, 선비 가운데 어진 사람을 벗으로 사귀도록 해라.”

  <해설> 공(工)은 장인(匠人)이고, 이(利)는 예리하게 잘 다듬는 것이다. 시방(是邦)의 시(是)는 어느 특정한 것을 지시(指示)하는 것이 아니라, 불특정의 어느 것(영어로는 any)을 지시하는 말이다. 학이 10에도 그 용례가 있다. 대부(大夫)는 지위가 높은 자이고, 사(士)는 아직 벼슬길에 오르지 않았거나 또는 벼슬이 낮은 자이다.
  공야장 2에서 공자는 자천(子賤)의 군자됨을 보고 말하길 노나라에 군자가 많았기에 이런 사람이 나왔다고 하였다(子謂子賤 君子哉若人 魯無君子者 斯焉取斯). 또 안연 24에서 증자는 군자는 글로써 벗을 모으고, 벗으로써 인(仁)을 돕는다라고 말하고 있다(曾子曰 君子以文會友 以友輔仁).  덕(德)이 혼자만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스승과 선배, 그리고 벗들의 인도와 도움 속에서 이루어짐을 말하고 있다. 따라서 군자는 어디에 가던지 현자(賢者)와 인자(仁者)를 벗으로 사귀는 것을 등한시하여서는 안 된다.    

10, 顔淵問爲邦. 子曰 行夏之時 乘殷之輅 服周之冕 樂則韶舞. 放鄭聲 遠佞人. 鄭聲淫 佞人殆.
  안연이 나라를 다스리는 것에 대해 묻자,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하나라의 역법(曆法)을 시행하고, 은나라의 수레를 타며, 주나라의 면류관을 쓰고, 음악은 소무(韶舞)를 한다. 정(鄭)나라의 음악을 추방하고, 말만 잘하는 자를 멀리해야 한다. 정나라의 음악은 도가 지나치고, 말만 잘하는 자는 위험하다.”

  <해설> 夏之時는 하나라의 역법(曆法)이다. 주자에 의하면 고대 중국에서는 왕조에 따라 각기 다른 태음력(太陰曆)을 쓰고 있었는데, 하(夏)는 대략 지금의 음력(陰曆) 1월을, 은(殷)은 음력 12월을, 주(周)는 음력 11월을 정월(正月)로 하는 달력을 썼다고 한다. 공자가 무슨 이유로 하나라의 역법을 쓸 것을 주장하였”1월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아마 하의 역법이 1년의 시작을 봄으로 하기 때문에 농사 짓기에 편리했던 것이 그 이유가 아니었나 싶다.
  殷之輅는 은나라의 수레요, 周之冕은 주나라의 면류관이다.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지만, 은의 수레는 나무로 만들어 질박하고 실용적이었다고 한다. 따라서 그 실용성을 채택한 것이다. 면류관은 주나라에 이르러 그 복식이 정비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 정비된 제도를 따른 것이다. 주자에 의거했다.
  소무(韶舞)는 순(舜)임금의 음악이다. 일찍이 공자는 제나라에 있을 때 소(韶)의 음악을 듣고 석 달 동안 고기 맛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심취했으며(子在齊聞韶 三月不知肉味―술이 13), 선하고 아름다움이 지극하다고 평하였다(子謂韶 盡美矣 又盡善也―팔일 25). 공자가 소무를 음악으로 채택한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청의 유월(兪樾)은 『군경평의(羣經平議)』에서 무(舞)를 무(武), 즉 주나라 무왕(武王)의 음악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팔일 25에서 공자가 소(韶)에 이어 무(武)를 평하면서 지극히 아름다우나 더할 나위 없이 선하지는 못하다라고 평가한 것(謂武 盡美矣 未盡善也)이 그 근거의 하나이다. 유월에 의하면 음악은 순임금의 음악인 소(韶)와 무왕의 음악인 무(武)를 채택해야 한다는 뜻이다.
  정성(鄭聲)은 정나라의 음악이다. 음(淫)이라는 것은 꼭 음란(淫亂)함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균형을 잃고 지나친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시경』에 보이는 시 중에서 정풍(鄭風)이 가장 호색(好色)적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고 있다. 아무튼 정성(鄭聲)이 인간의 감성을 과도하게 자극하므로 멀리하라고 한 것이다. 
  말만 잘하는 자(佞人)를 미워한 것은 논어에서 이미 누차 나온 바 있다.
  안연이 나라를 다스리는 법에 대해 묻자, 공자는 이상적인 국가에 대해 대답하고 있다. 그 내용이 너무나 추상적이어서 제대로 해석하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억지로 풀이한다면 다음과 같다. 하(夏)의 역법은 백성으로 하여금 본업에 충실하게 하는 정치를 나타낸다. 은의 수레는 나라의 살림살이를 실용적이고 질박하게 운용하라는 뜻이다. 주의 면류관은 주나라의 발달된 문물제도를 뜻한다. 그리고 순임금의 음악인 소무(韶舞)로 백성을 순치, 교화한다. 그런 연후에 백성의 감성을 지나치게 자극하는 정성(鄭聲)을 멀리하고, 군주를 미혹시키는 말만 잘하는 자를 멀리한다. 그러면 이상적인 국가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11, 子曰 人無遠慮 必有近憂.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사람이 멀리 생각하지 않으면, 반드시 가까운 근심이 있을 것이다.”

  <해설> 먼 앞날을 생각하지 않고 눈앞의 일에만 급급하다가는, 반드시 가까운 장래에 우환거리가 생긴다.

12, 子曰 已矣乎. 吾未見好德如好色者也.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이제 끝났구나! 나는 덕을 좋아하기를 예쁜 여인을 좋아하듯 하는 사람을 아직 보지 못하였도다.”

  <해설> 已矣乎는 절망 끝에 탄식하는 소리다.

  <참고> 자한 17에서는 같은 말이 已矣乎만 빠졌다.
 
13, 子曰 臧文仲其竊位者與. 知柳下惠之賢 而不與立也.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장문중은 그 벼슬을 도둑질한 자이다. 유하혜의 현명함을 알고도 그를 천거하지 않았다.”

  <해설> 장문중(臧文仲)은 노나라의 대부 장손진(臧孫辰)이다. 공야장 17에도 나왔다. 竊位는 벼슬자리를 훔친 것이다. 유하혜(柳下惠)는 노나라의 대부로 성은 전(展), 이름은 획(獲), 자는 금(禽)이다. 유하(柳下)는 식읍(食邑)의 지명이”柳下혜(惠)는 시호이다. 與立은 주자에 의하면 조정에 함께 서는 것으로柳下천거하여 함께 조정에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유월(兪樾)은 『군경평의(羣經平議)』에서 입(立)을 위(位)로 풀이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즉 장문중이 유하혜의 현명함을 알고도 그에게 벼슬을 주지 않았다는 뜻이다.
  장문중은 노나라에서 평판이 좋았던 사람이다. 그러나 공자는 그에 대해 평가를 달리한다. 공야장 17에서는 귀신에게 현혹되어 예를 망각한 사람이라고 비판하였다. 여기서도 공자는 그에 대해 비판적으로 말하고 있다. 즉 장문중이 유하혜의 현명함을 알고서도 그를 천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것을 공자는 벼슬을 도둑질한 것이라고까지 하고 있다. 군자가 벼슬을 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일 중의 하나가 초야에 묻혀 있는 현명한 자를 발굴하여 천거하는 것이다. 장문중은 그것을 소홀히 한 정도가 아니라 알면서도 고의로 묵살했다. 공자의 관점에서 보면 그는 벼슬자리에 있어서는 안될 위인이었다.

  <참고> 공야장 17에서도 장문중을 비판하고 있다.
 
14, 子曰 躬自厚 而薄責於人 則遠怨矣.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자신에 대해서는 엄하게 책망하고, 남에 대해서는 가볍게 한다면, 원망을 멀리 할 수 있으리라.”

  <해설> 자후(自厚)의 후(厚)는 후책(厚責)의 책(責) 자가 생략된 것이다.
  자신을 엄하게 책망하면 같은 잘못을 두 번 되풀이하지 않을 것이요, 또한 남을 가볍게 책망하면, 남으로부터 원망 받는 일도 없을 것이다.
  한편 躬自厚를 자신의 덕을 두텁게 한다(厚其德)는 뜻으로 풀이하는 사람도 있다. 황간(皇侃)의 『논어의소』에 인용된 채모(蔡謨)와 『논어고의(論語古義)』의 저자인 일본의 이또진사이(伊藤仁齋) 등이 그런 입장이다.
 
15, 子曰 不曰如之何如之何者 吾末如之何也已矣.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어떻게 할까? 어떻게 할까?’라고 말하지 않는 사람은 나도 어떻게 할 수 없다.”

  <해설> 분발하여 애쓰지 않으면 가르쳐 줄 수 없다(不憤不啓 不悱不發―술이 8)는 말이다.
  고주의 공안국(孔安國)은 不曰如之何. 如之何者 吾末如之何也已矣로 끊어 읽어 “‘어떻게 할까?’라고 말하지 마라. 어떻게 할까라고 하는 것은 나도 어떻게 할 수 없다.”로 해석하고 있으나 온당치 않다고 생각된다.
 
16, 子曰 羣居終日 言不及義 好行小慧 難矣哉.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하루종일 모여 있으면서, 하는 말이 의로운 일에는 미치지 않고, 잔재주나 부리길 좋아한다면, 어려운 일이다.”

  <해설> 군거(羣居)는 모여 있는 것이다. 소혜(小慧)는 잔재주다. 난(難)은 가망이 없는 것이다.
  
17, 子曰 君子義以爲質 禮以行之 孫以出之 信以成之. 君子哉.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군자는 의(義)로 그 바탕을 삼고, 예로 행하며, 공손함으로 나타내고, 신의로 이룬다. 그러면 진실로 군자이니라.”

  <해설> 모든 일에 의(義)가 근본이다. 의를 근본으로 하여, 행할 때는 예로써, 나타낼 때는 공손하게, 그리고 그 말에 신의를 지킴으로써 완성한다. 이것이 군자다.
 
18, 子曰 君子病無能焉 不病人之不己知也.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군자는 자신이 무능한 것을 걱정하지, 남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것을 걱정하지 않는다.”

  <참고> 학이 16, 이인 14, 헌문 32에도 같은 취지의 말이 있다.

19, 子曰 君子疾沒世而名不稱焉.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군자는 평생을 마치도록 그 이름이 일컬어지지 않는 것을 걱정한다.”

  <해설> 몰세(沒世)는 생애를 마치는 것이다.
  군자는 자신을 위하여 공부하지, 남이 알아주는 것을 기대하여 공부하지는 않는다(古之學者爲己 今之學者爲人―헌문 25). 또 바로 앞 장(章)에서 말했듯이 자신이 무능한 것을 걱정하지, 남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것을 걱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생애를 마칠 때까지 그 이름이 일컬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 배운 바가 보잘 것 없기 때문이다. 덕이 몸 안에 가득 차면 자연히 밖으로 나타나기 마련이다. 따라서 학덕을 연마하는 것을 게을리 하여서는 안 된다. 열심히 공부할 것을 지적한 말이지, 명성에 연연해 하라는 뜻은 아니다.
  몰세(沒世)를 죽은 뒤라는 뜻으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사마천이 그런 입장으로, 『사기』 「공자세가」는 공자가 『춘추』를 지은 것이 자신이 죽은 뒤 그 이름이 사라질까 걱정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20, 子曰 君子求諸己 小人求諸人.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군자는 자신에게서 구하고, 소인은 남에게서 구한다.”

  <해설> 군자는 자기의 인생을 자신의 책임 하에 주체적으로 살아간다. 남에게 의지하지도 않고, 남을 탓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소인은 그 반대이다.

21, 子曰 君子矜而不爭 羣而不黨.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군자는 몸가짐을 장엄하게 하면서도 남과 다투지 않으며, 뭇사람들과 어울리면서도 편당하지 않는다.”

  <해설> 긍(矜)은 몸가짐을 장엄하게 하는 것이다. 자신에 대해 긍지를 지닌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태도이다. 그러나 그것을 나타낼 때는 공손하게 하므로 남과 더불어 다툴 일이 없다. 또한 남과 부드럽게 잘 어울리면서도 의(義)를 따라 살아가므로 편파적으로 파당을 만들지는 않는다.

  <참고> 위정 14에는 君子周而不比 小人比而不周라는 말이 있다.

22, 子曰 君子不以言擧人 不以人廢言.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군자는 말로써 사람을 천거하지 않으며, 사람 때문에 그 말을 버리지 않는다.”

  <해설> 덕이 있는 자는 반드시 그 덕이 말에 나타나지만, 말이 들을 만하다고 하여 덕이 있는 것은 아니다(有德者必有言 有言者不必有德―헌문 5). 따라서 말만 갖고 사람을 천거할 수는 없다. 또한 그 사람됨이 조금 모자란다고 하여 그 사람이 하는 말도 모두 들을 만한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필부에게도 뜻밖의 훌륭한 말이 나올 수 있다.

23, 子貢問曰 有一言而可以終身行之者乎. 子曰 其恕乎. 己所不欲 勿施於人.
  자공이 묻기를 “한마디 말로 평생 동안 실천할 만한 것이 있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그것은 서(恕)이다. 자기가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베풀지 마라.”

  <해설> 한마디 말이라는 것은 공자의 가르침을 한마디로 집약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공자의 가르침이 하나로 일관하고 있다는 一以貫之와 일맥상통한다. 이인 15에서 증자는 그 일(一)을 충서(忠恕)라고 하였다. 여기서는 그것을 한 글자로 서(恕)라고 하고 있다. 자기만을 고집하지 않고, 자기를 미루어 남을 헤아릴 줄 아는 것(恕), 그것이 이 세상을 남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데 있어 가장 필요한 자세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참고> 己所不欲 勿施於人은 안연 2에도 나온다.

24, 子曰 吾之於人也 誰毁誰譽. 如有所譽者 其有所試矣. 斯民也 三代之所以直道而行也.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내가 사람에 대해 누구를 비방하고 누구를 칭찬하겠는가? 만일 칭찬한 일이 있다면 그것은 시험을 해 본 바가 있기 때문이다. 이 백성들도 삼대(三代)의 곧은 도를 행하고 있다.”
 
  <해설> 훼(毁)는 비방하는 것, 예(譽)는 칭찬하는 것, 시(試)는 시험하는 것이다. 삼대(三代)는 하(夏), 은(殷), 주(周)의 세 왕조를 말한다.
  사람에 대해 근거 없이 함부로 비방하거나, 칭찬하는 것은 옳지 않다. 반드시 그 근거가 있어야 한다. 지금의 이 백성들도 예전의 삼대(三代)의 성왕(聖王)들의 곧은 도(道)를 그대로 행하고 있다. 어찌 이 백성들 앞에서 자의적으로 사람에 대해 함부로 평가할 수 있겠는가?
  
25, 子曰 吾猶及史之闕文也 有馬者借人乘之. 今亡矣夫.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나는 예전에는 사관이 의심스러운 것을 쓰지 않고 비워 두는 것과 말을 가진 자가 남에게 빌려주어 타게 하는 것을 본 바 있다. 그러나 지금은 없다.”

  <해설> 사(史)는 기록을 담당하는 관리, 즉 사관(史官)이다. 궐문(闕文)은 의심나는 것을 쓰지 않고 비워두는 것이다.
  시대가 변하면서 사람들의 마음가짐도 변하여 옛날의 곧고 두터운 습속을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음을 탄식한 말로 추정되나, 고래로 해석이 분분하다. 문제의 핵심은 사관이 궐문(闕文)하는 것과, 말을 빌려주는 것 사이에 아무런 논리적 연관이 없다는 것이다. 고주의 포함(包咸)은 둘을 별개의 일로 보고, 말을 빌려주는 것은 자신이 말을 조련할 수 없기 때문에 남으로 하여금 말을 길들이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풀이한다. 송(宋)의 형병(邢昺)은 『논어주소(論語注疏)』에서 有馬者借人乘之는 비유로, 사관이 잘 모르는 것을 비워 두는 것이 후에 잘 아는 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기 위한 것처럼, 말을 남에게 빌려주는 것도 자신이 말을 조련할 수 없기 때문에 훌륭한 조련사에게 빌려주어 길들이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부연 설명한다. 그러나 청(淸)의 전점(錢坫)은 『논어후록(論語後錄)』에서 포함의 설을 부정하면서, 말을 빌려주는 것은, 자로가 벗들과 수레나 말을 함께 쓰기를 원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옛날의 후덕한 인심을 나타낸 것이라고 하고 있다. 전점의 주장에 손을 들어주고 싶다.  

26, 子曰 巧言亂德. 小不忍 則亂大謀.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교묘히 꾸며대는 말은 덕을 어지럽힌다. 작은 일을 참지 못하면 큰 일이 어려워진다.”

27, 子曰 衆惡之 必察焉. 衆好之 必察焉.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뭇사람들이 미워하더라도 반드시 살펴보아야 하며, 뭇사람들이 좋아하더라도 반드시 살펴보아야 한다.”

  <해설> 군자는 남의 장단에 부화뇌동하지 않는다. 반드시 스스로 살펴 판단한다. 결코 뭇사람들이 미워한다고 하여 무조건 미워하지도 않으며, 좋아한다고 하여 무조건 좋아하지도 않는다. 뭇사람이 모두 미워하는 것은 혹 그 사람됨이 너무 우뚝하여 남과 어울리지 못해 그럴 수도 있고, 모두 좋아하는 것은 혹시 남의 비위를 잘 맞추어 그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 살펴 미워할 만하면 미워하고, 좋아할 만하면 좋아한다. 그러기에 오직 어진 자만이 능히 사람을 사랑할 수 있고, 사람을 미워할 수 있다(惟仁者 能好人 能惡人―이인 3).

  <참고> 이인 3에서는 “오직 어진 사람만이 능히 사람을 좋아할 수 있고, 사람을 미워할 수 있다.”고 하고 있다.
  자로 24에는 선한 사람이 좋아하고, 악한 사람이 미워하는 사람이 되라는 말이 있다.

28, 子曰 人能弘道 非道弘人.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사람이 능히 도를 넓히지, 도가 사람을 넓히는 것은 아니다.”

  <해설> 홍(弘)은 넓히는 것이다.
  도(道)는 인간을 떠나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도는 오직 인간을 통해서만 구현될 수 있다. 인간이 어떻게 하느냐에 의해 도는 넓어질 수도 좁아질 수도 있다. 따라서 인간이 도를 넓히는 것이지, 도가 사람을 넓혀주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주체성과 책임감을 강조한 말이다.

29, 子曰 過而不改 是謂過矣.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잘못을 저질렀으면서도 고치지 않는 것, 그것을 잘못이라고 일컫느니라.”

  <해설> 사람은 누구나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 그러나 잘못을 고친다면 두 번 다시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는다(不貳過). 만일 고치지 않는다면 잘못이 굳어져 고질이 된다.

30, 子曰 吾嘗終日不食 終夜不寢 以思. 無益. 不如學也.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내가 일찍이 하루종일 먹지도 않고, 밤새도록 자지도 않으며 생각에 잠겨 봤으나, 아무런 이익이 없었다. 공부하는 것만 못했다.”

  <해설>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견식이 어둡고,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자칫 독단에 치우쳐 위태로운 법이다(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위정 15). 그러나 배움의 길은 우선 앞선 사람들의 학문을 공부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순리다. 공자가 자신의 체험을 빌어 그것을 깨우쳐 주고 있다.

31, 子曰 君子謀道 不謀食. 耕也 餒在其中矣. 學也 祿在其中矣. 君子憂道不憂貧.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군자는 도를 추구하지 먹을 것을 추구하지는 않는다. 농사를 지어도 굶주림이 그 안에 있을 수 있고, 학문을 하여도 녹이 그 안에 있을 수 있다. 군자는 도를 걱정하지 가난한 것을 걱정하지 않는다.”

  <해설> 뇌(餒)는 굶주림이요, 녹(祿)은 관리가 받는 봉록이다.
  먹고 살기 위해 농사를 지어도 때로는 흉년이 들어 굶주릴 수가 있다. 군자가 공부하는 학문은 원래 도를 위한 것이지, 봉록을 받기 위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학문이 무르익으면 세상에 나아가 벼슬을 함으로써 봉록을 받는 경우도 생길 수 있다. 먹을 것을 찾아도 굶주릴 수 있으며, 먹을 것을 찾지 않는다 하더라도 꼭 굶주리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군자는 그런 것에 신경쓰지 않는다. 오직 도에 대해 걱정할 뿐이지.   

  <보충> 학문이 녹을 가져다 줄 수 있다는 생각은 중국인의 전통적인 사고방식이다. 그러나 학문을 갖고 벼슬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공자로부터 그리 오래된 시대의 일은 아니다. 주대의 모든 관직은 대대로 그 맡은 가문에 세습되었다. 즉 신분에 의해 관직이 결정된 것이다. 그들은 주로 제후의 지족(支族)들이거나 아니면 유력 공신 가문의 후손들이었다.
  그러나 춘추 시대에 들어서면서 상황은 변하기 시작했다. 우선 제후들 간의 잦은 전쟁으로 인해 귀족들이 몰락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철기 도입에 따른 사회적 변동으로 신분 질서도 붕괴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제후들 간의 약육강식의 경쟁에서 살아 남기 위하여 군주들은 신분에 관계없이 자신에게 충성하는 유능한 전문가들을 관리로 등용하여 나라를 통치하고자 했다. 관직의 세습제가 위기에 처한 것이다. 거기에 부응한 것이 공자를 위시한 제자백가(諸子百家)이다. 이들은 오로지 학문 하나만을 갖고 자신을 등용해 줄 군주를 찾아 천하를 주유하였다. 등용만 되면 물론 온갖 부귀를 다 누릴 수 있었다. 합종(合從)으로 유명한 소진(蘇秦)이 매우 곤궁한 생활 속에 있다가 마침내 세 치 혀로 육 국의 재상이 되어 온갖 부귀를 누렸다는 이야기는 이것을 잘 말해주고 있다. 약육강식의 난세가 지식인에게는 마치 고기가 물을 만난 격이 된 것이다.
  이후 중국 사회는 왕조가 어떻게 바뀌더라도 관리는 지식인이 해야 한다는 기조는 크게 변함이 없었다. 과거 제도는 그것을 제도화한 것에 불과하다. 지금의 대만이나 한국의 고시(考試) 제도는 바로 그러한 전통의 맥락 위에 서 있다.
  
32, 子曰 知及之 仁不能守之 雖得之 必失之. 知及之 仁能守之 不莊以涖之 則民不敬. 知及之 仁能守之 莊以涖之 動之不以禮 未善也.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지혜가 그 지위에 미치더라도, 인(仁)으로써 지키지 못한다면, 비록 얻었다 하더라도, 반드시 잃고 만다. 지혜가 그 지위에 미치고, 인(仁)으로써 지킬 수 있다 하더라도, 위엄있게 임하지 않는다면 백성들이 공경하지 않는다. 지혜가 그 지위에 미치고, 인(仁)으로써 지키고, 위엄있게 임한다 하더라도, 예로써 움직이지 않는다면 아직 좋다고 할 수 없다.”

  <해설> 知及之는 지혜가 그것에 미친다는 것이니, 즉 지혜가 그 위정자로서의 지위에 걸맞는다는 뜻이다. 주자는 지(之)가 이(理), 즉 이치를 뜻한다고 하나, 많은 학자들의 주장대로 지나치게 자의적인 해석이다. 이하 모두 11번 나오는 지(之)는 모두 위정자로서의 지위를 뜻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군자가 정치를 할 때 지켜야 할 도리를 말하고 있다. 리(涖)는 임(臨)으로 임하는 것이다.

33, 子曰 君子不可小知 而可大受也. 小人不可大受 而可小知也.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군자는 작은 지혜가 없어도 큰 일을 맡을 수 있으며, 소인은 큰 일을 맡을 수는 없어도 작은 지혜를 기대할 수는 있다.”

  <해설> 소지(小知)는 작은 지혜, 대수(大受)는 큰 일을 맡는 것이다.
  군자는 그 근본에 힘쓰므로, 비록 지엽적인 일에 모르는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큰 일을 맡을 수 있다. 그러나 소인은 항상 지엽적인 일이나 가능할 뿐이다.
 
34, 子曰 民之於仁也甚於水火. 水火吾見蹈而死者矣 未見蹈仁而死者也.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사람에게 인(仁)은 물이나 불보다도 더 절실하다. 물과 불은 밟다가 죽은 사람도 보았으나, 인(仁)은 밟다가 죽은 사람을 아직 보지 못하였다.”

  <해설> 심(甚)은 절실히 필요로 하는 것이다. 도(蹈)는 밟는 것으로 가까이한다는 뜻이다.
  물과 불은 인간이 생활하는데 무엇보다 절실히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물과 불은 가까이하다가 자칫하면 목숨을 잃는 일도 있다. 그러나 인(仁)은 그렇지 않다. 따라서 인(仁)이 인간에게는 물과 불보다도 더 절실한 것이다. 물과 불을 끌어들여 인(仁)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재미있는 해석으로 AD 3세기 경 위(魏)나라의 도가(道家) 철학자인 왕필(王弼)의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백성이 인(仁)을 멀리하는 것이 물과 불보다도 더 심하다. 물과 불은 밟다 죽은 사람을 보았으나, 인(仁)을 밟다 죽은 사람은 아직 보지 못하였다.” 황간(皇侃)의 『논어의소』에서 인용했다. 다산도 같은 입장이다.

35, 子曰 當仁 不讓於師.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인(仁)에 대해서는 스승이라도 양보하지 않는다.”

36, 子曰 君子貞而不諒.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군자는 곧지만 덮어놓고 고집하지는 않는다.”

  <해설> 정(貞)은 바르고 곧은 것이다. 량(諒)은 작은 의리를 고집하는 것이다.

37, 子曰 事君 敬其事而後其食.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임금을 섬길 때는 먼저 그 일을 공경할 것이며 녹은 그 뒤로 한다.”

  <해설> 식(食)은 벼슬할 때 받는 녹이다.

38, 子曰 有敎無類.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가르치는데 차별이란 없다.”

  <해설> 무류(無類)는 빈부, 귀천 등의 차별이 없는 것이다.
  일찍이 공자는 스승에 대한 예의만 나타낸다면 누구라도 가르치지 않은 바가 없다고 하였다(自行束脩以上 吾未嘗無誨焉―술이 7). 학문의 길에서 신분의 차별을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공자의 문하에서는 사마우(司馬牛)와 같은 대부 출신으로부터 중궁(仲弓)과 같이 얼룩소의 새끼(犂牛之子―옹야 4)라고 불리울 정도의 미천한 출신이 함께 수학하였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겠지만, 당시의 엄격한 신분 질서 하에서는 상당히 파격적인 일이다. 공자가 신분 질서를 인정하지 않았다는 증거로 자주 인용되는 구절이다.

  <참고> 술이 7
  
39, 子曰 道不同 不相爲謀.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길이 다르면 서로 함께 일을 도모하지 않는다.”

  <해설> 도(道)란 삶의 목표, 추구하는 바이다.
  군자와 소인이 함께 인생을 살아갈 수는 없는 법이다. 서로 나아가고자 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이다.

40, 子曰 辭達而已矣.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말이란 뜻이 통하면 된다.”

  <해설> 말에 꾸밈이 많으면 번잡해지고, 나아가 그 뜻이 왜곡될 가능성이 크다. 공자가 그것을 경계하여 한 말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말이 뜻만 통하면 된다고 하여 모든 꾸밈(文飾)이 다 불필요하다는 뜻은 아니다. 꾸밈이 없으면 조야하고, 꾸밈이 지나치면 문서나 꾸미는 사관(史官)의 글일 뿐이다. 꾸밈과 내용이 조화를 이루는 것이 가장 훌륭한 글이다(質勝文則野 文勝質則史 文質彬彬然後君子―옹야 16).
  청(淸)의 전대흔(錢大昕)은 『잠연당답문(潛硏堂答問)』에서 사(辭)가 일반적인 언어가 아니라 외교적인 언사(言辭)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풀이한다. 즉 외교적인 언사는 뜻이 올바르게 전달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일본의 오규소라이(荻生徂徠)의 『논어징(論語徵)』도 같은 입장이다.

  <참고> 옹야 16

41, 師冕見. 及階. 子曰 階也. 及席. 子曰 席也. 皆坐. 子告之曰 某在斯 某在斯. 師冕出. 子張問曰 與師言之道與. 子曰 然. 固相師之道也.
  악사 면이 공자를 뵙고자 찾아 왔다. 계단에 이르자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계단입니다.”
  자리에 이르자, 말씀하시길 “자리입니다.”
  모두 앉자, 일러 말씀하시길 “아무개는 저기에, 아무개는 저기에 있습니다.”
  악사 면이 나아가자, 자장이 묻기를 “악사와 이야기할 때의 예의입니까?”
  말씀하시길 “그렇다. 악사를 도와주는 본래의 자세이니라.”

  <해설> 사(師)는 악사(樂士)로 예전의 악사는 모두 소경이었다. 면(冕)은 사람 이름이다. 계(階)는 뜰에서 당(堂)으로 오르는 계단, 석(席)은 당(堂) 위에 마련된 자리다. 某在斯 某在斯는 누구는 어디에, 누구는 어디에 앉아 있다고 알려주는 것이다. 상(相)은 돕는 것이다.
  앞 못보는 소경을 위하여 세심하게 배려하는 공자의 자상함이 돋보이는 글이다. 자장이 공자의 이와 같은 태도를 보고 그것이 소경과 대화를 나눌 때의 예의냐고 물었다. 공자가 말한다. 그것은 단순한 예의가 아니라 앞 못보는 소경을 도와주는 인간 본연의 자세라고.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시민과 함께하는 인터넷 뉴스 월 5,000원으로 소통하는 자발적 후원독자 모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