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고장 인천과 역사의식
상태바
역사의 고장 인천과 역사의식
  • 최문영
  • 승인 2017.02.14 07:5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인천칼럼] 최문영 / 인천YMCA 정책기획실장

 

인천 부평역의 한 지하상가 입구 게시판에 부평경찰서 포스터가 붙었다. ‘테러! 여러분의 관심으로 예방할 수 있습니다’라는 테러예방 포스터인데 문제는 그 포스터에 사용된 사진이 안중근 의사의 손도장이었던 것이다.

 

안중근 의사는 중국 하얼빈역에서 일제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독립운동가다. 사형 집행 직전에도 동양평화를 외쳤던 평화주의자로 테러와는 맞지 않는 역사적 인물이라는 사실은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시민의 항의로 포스터가 철거돼 해프닝으로 끝났다지만 씁쓸함은 남는다.

 

역사의식은 하루아침에 생기지 않는다. 가정에서 학교에서 우리의 삶속에서 끊임없이 보고 배우고 체득해야 생긴다. 인천시민으로 인천의 역사를 알아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인천을 찾는 내국인이나 외국인에게 인천의 어떤 모습을 보여줘야 할까 고민할 때가 있다. 송도경제자유구역에 가면 고층빌딩이 즐비하고 G타워 전망대에서 센트럴공원을 중앙으로 송도신도시 일대를 한눈에 감상할 수 있다. 자랑스레 시도했지만 겉으로 보이는 송도의 화려함은 보여주는 이나 바라보는 이나 별다른 감흥 없이 무덤덤할 때가 더 많다.

 

오히려 중구 개항장 일대를 비롯한 구도심으로 안내하면 더 큰 관심을 보이거나 흥미로워 하곤 한다. 인천 역사의 숨결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인천은 원조가 많다. 최초의 기상대는 1904년 4월 중구 전동 25 응봉산 정상에 세워진 인천관측소다. 최초의 등대는 1903년 인천항에서 남쪽으로 13km 떨어진 팔미도에 세워진 등대다. ‘인천팔경’의 하나로 꼽혔던 팔미도는 두 개의 섬이 마치 팔자처럼 양쪽으로 뻗어 내린 꼬리와 같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1892년 용동에 최초의 정미소가 생겼는데 미국인 ‘월트 타운센드’가 세웠다고 해서 ‘담손이 방앗간’으로 불렸다.

 

인천항 개항 이후에는 다양한 서양문물이 들어오면서 우리나라에도 서구식 신교육이 도입된다. 1885년 제물포항으로 들어온 미국의 선교사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에 의해 개신교가 들어오게 되고 감리교 선교사였던 아펜젤러에 의해서 한국 최초의 감리교 내리교회가 세워지게 된다.

 

1892년 아펜젤러에 이어 2대 목사로 부임한 존스 목사와 감리교 여선교부로부터 파견된 이화학당의 마거릿 벤젤은 같은 해 4월 내리교회에서 성경공부를 비롯한 신교육 학교를 설립하게 되는데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초등교육 기관인 ‘영화학당’의 출발이 된다.

 

인천을 대표하는 공원은 1897년에 생긴 서울 탑골공원보다 9년이나 앞서 세워진 만국공원으로 지금의 자유공원이다. 한국 최초의 이민도 1902년 12월 22일 인천 제물포항에서 미국 하와이를 향해 ‘켄카이호’에 탑승한 121명으로부터 시작된다. 거의 인천사람이자 하층민이었던 이들은 이민 초기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했고 그들의 거처 농막은 짐승 우리와 다를 바 없었으며 하루 10시간 이상의 중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훗날 이들의 피땀 어린 후원금이 종자돈이 되어 인천에 세워진 대학이 인하대학교다.

 

제물포가 개항하자 중국인들이 인천에 들어와 우리나라 최초의 차이나타운인 ‘청관’을 형성했는데 이곳 중국 요릿집 가운데 ‘공화춘’은 중국 노동자와 한국인 부두노동자들을 위해 춘장을 볶아 국수에 얹어먹는 자장면을 최초로 만들어 팔았다. ‘인천부사’에 의하면 1905년 ‘히라야마 미쓰타로’라는 일본인이 중구 신흥동 해광사 부근에 ‘인천탄산제조소’라는 사이다 공장을 세웠다고 하는데 한국 최초의 사이다 공장이다.

 

야구는 공식적인 역사로는 1905년 황성기독교청년회(지금의 서울YMCA) 총무였던 미국인 선교사 질레트가 처음으로 야구를 가르친 것으로 돼 있고 ‘YMCA야구단’이라는 영화도 상영된 바 있지만 이미 1895년 개교한 ‘인천영어야학회’ 학생들 사이에서 서양 공치기 야구가 도입돼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1888년 중구 중앙동에는 1902년 서울 정동에 세워진 ‘손탁호텔’보다 14년이나 먼저 세워진 호텔이 있었는데 바로 ‘대불호텔’이다. 해발 몇 미터라는 표시는 ‘수준원점’을 기준으로 정해지는데 수준원점이 위치해 있는 곳은 남구 용현동에 있는 인하공업전문대학 교정이다.

 

개신교 최초의 교회 내리교회와 함께 최초의 천주교 성당 답동성당, 최초의 성공회 성당 내동교회도 중구 내동과 답동 일대에 근접하여 위치해 있다. 이들 세 교회는 음악으로 연합한다는 의미로 합동 음악회를 정례적으로 개최하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가 많은 곳이기도 하지만 인천은 역사적인 현장이 많은 곳이기도 하다. 백범김구 선생님이 옥살이를 했던 곳도 내동에 위치한 인천감리서 감옥이었다. 선생의 부친은 책을 넣어주었고 모친 곽낙원여사는 객줏집에서 일을 도우며 옥바라지를 했다.

 

이렇듯 인천은 우리나라 최초이자 원조가 가장 많은 곳이다. 가시적으로 보이는 화려함도 중요하지만 역사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곳은 더욱 의미가 있다. 역사의 고장이 바로 인천인 것이다.

 

인천YMCA는 지난해 인천의 역사와 문화를 탐방하는 ‘인천역사문화기행’ 프로그램을 진행하여 인천시민의 적극적인 참여 속에 성공적으로 진행하였다. 참여한 모든 시민들은 내가 살고 있는 곳이 이토록 의미가 있는 곳이었나 하고 놀랬다. 역사는 현재를 사는 우리 모두의 거울이자 미래를 향한 나침반이 된다.

 

안중근 의사가 동지들과 함께 손가락 한 마디씩을 자르며 단지동맹의 의지로 거사를 성사시켰던 역사적 의미가 있는 손도장이 테러방지 포스터에 배경으로 실리는 어이없는 현실 속에서 좀 더 철저히 역사를 알아야 한다는 절박함이 느껴지는 요즘이다.


<1937년 축성된 답동성당>


<인천감리서 터>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시민과 함께하는 인터넷 뉴스 월 5,000원으로 소통하는 자발적 후원독자 모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