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이 빚어낸 아름다움
상태바
영혼이 빚어낸 아름다움
  • 공주형
  • 승인 2010.09.07 02:2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여성칼럼] 공주형 / 큐레이터·인천대 초빙교수


장흥 작업실 근작들 앞의 석철주.

전화가 왔다. 바쁜 일 끝났으면 전시 서문 좀 써달라신다. 그러겠노라고 했다. 이런 즉각적인 수락은 거의 없다. 전시 서문은 잘 쓰지 않는다. 인생관도 예술관도 충분히 알지 못하는 글은 즐거움이 아니라 부담이기 마련이다. 그런 까닭에 내가 쓴 전시 서문은 손에 꼽을 정도이다. 그 집에 숟가락이 몇 개이고, 그 작업실에 어떤 확신이 서려 있는지 알고 난 후에 쓴 것들이다. 이번처럼 말이다.

처음 만났을 때 그 분은 미술계가 인정하는 중견 작가였고, 나는 대학원을 갓 졸업한 초짜 큐레이터이었다. 나이 차이는 스무 살쯤이었다. 인연을 이어가는데 나이는 중요하지 않다. 삶과 미술이라는 공통의 화제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지 모르겠다. 서로 깍듯하게 존칭을 사용하지만 작가와 큐레이터가 아니라 가족 같고 또 친구 같았다.

최신 미술계의 동향을 전하면, 책에서나 접해야 하는 우리 화단의 과거지사가 생생하게 돌아왔다. 막막한 혼란을 근황으로 주절거리면, 경험에 근거한 효과적인 처방전이 나왔다. 밤무대 가수에서 여행사 가이드에 이르는 다양한 경험을 들으며 이 세상이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다단하구나 짐작했다. 언제나 누구에게나 몸을 낮추는 겸손함을 보며 나는 세상에는 그냥 저주는 게임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작업에 열정을 다하는 치열함을 대하며 나도 한번 죽기 살기로 달려보아야겠다는 의지를 불태웠었다.

전시 서문을 위해 오래된 기사들을 들춰 보았다. 미술계의 데뷔라 할 첫 개인전 이후 미술계는 재능 있는 신예의 등장에 남다른 관심을 표명한 게 눈에 띤다. 한국 화단에 ‘날개’가 될 것이라 예측도 있었고, 불황인 미술 시장에 활력을 불어넣을 히든카드라고 전망되기도 했다. 찬사 일색의 기사를 읽다 흥미로운 것을 발견했다. 이 시대를 전통의 화필로 담겠다는 출사표였다. 초심을 잃지 않겠다는 다짐이었다. 그간의 작업을 하나로 모으겠다는 포부였다. 옛 말이 지금 말과 똑같아 놀랐다. 그 말이 빈 말이 아니어서 존경스러웠다. 여기에 한 가지 주목할 만한 것이 있었다. 기사에 함께 실린 사진들이었다.

20 년 전 모습은 지금도 남아 있다. 그런데 외모가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칼날 같은 눈빛에 담긴 평온함 때문일까. 반듯하던 이마에 강처럼 흐르는 연륜 때문일까. 팽팽하던 눈가에 달린 지혜로움 때문일까. 흰 머리카락이 사람에 따라서는 세월에 다친 서글픈 상처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시간이 달아준 늠름한 훈장 같기도 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세월을 더한다는 것은 점진적인 쇠락이 아니었다. 완만한 성숙이었다.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견뎌야 할 숙명이 아니었다. 기꺼이 받아들일 기회였다. 적어도 그분에게는.

동안이 대세란다. 전시 서문을 쓰며 직면한 것은 한 평생을 한 마음으로 살아온 한 작가에 대한 경이로움이기도 했지만 동안 열풍에 휩쓸려 놓쳐버렸을지 모르는 진실이기도 했다. 어린 얼굴이 새로운 시대의 미덕으로 자리한 지금 우리의 관심은 동안의 아름다움에 쏠려 있다. 막강 동안, 절대 동안, 최강 동안 등. 동안에 바치는 우리 시대의 헌사는 다양하기도 하고 최상급이기도 하다. 어린 얼굴이 프리미엄이 되고 명품이 된 세상이다. 얼굴도 리모델링이 가능한 시대이다. 그래서 영국 사회 운동가 마리 스톱스의 아름다움에 대한 말이 더 절실하게 다가오는지 모르겠다.

“열여섯 살 때 아름다움을 당신이 만든 것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그러나 당신이 예순에도 아름답다면, 그것은 당신의 영혼이 만들어낸 아름다움일 것이다.”

전시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이번 전시는 그 분 환갑을 기념하는 전시이다. 전시 서문을 넘기고 나서 그 사실을 알았다. 과거에 치른 전투에서 챙긴 전리품의 개수를 헤아리기보다 미래에 펼쳐질 탐험을 위해 늘 분투해 온 분이기에 앞으로도 그 삶과 미술의 태도에서 특별한 변화는 없을 것이다.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그 분 성함은 석철주이시다.


공주형 큐레이터.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시민과 함께하는 인터넷 뉴스 월 5,000원으로 소통하는 자발적 후원독자 모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