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암역 광장에 대한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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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암역 광장에 대한 단상
  • 김정희
  • 승인 2010.10.12 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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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칼럼] 김정희 / 시인

수십 년 전 철원에서 이사 오던 봄날, 서울역에서 기차를 타고 와 내린 데가 제물포역이었다. 아버지 손을 붙잡고 개찰구를 빠져나와 낯선 풍경들을 구경하며 걷다가 뒤돌아보았을 때 적벽돌로 지어진 제물포역사가 한눈에 들어왔는데, 마치 '붉은 상자'가 떠 있는 것 같았다. 그게 무척이나 인상 깊었던지 지금까지도 지워지지 않고 마음 한 구석에 동화의 한 장면처럼 살아 있다. 

그것이 계기가 되기도 하였지만 아버지가 돌아오실 때마다 역으로 나가 하염없이 기다리던 시간들이 겹쳐지면서 나는 역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리고 널따란 광장에서 만나고 헤어지고 어딘가로 떠나거나 돌아오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기다리면서 철이 좀 일찍 들었다고 생각한다. 그런 사유가 바탕에 깔려 있어서인지 내 삶의 대부분은 역 가까이에서 이루어졌는데, 지금은 동암역이 삶 한가운데에 들어와 있다.


예전에 역들은 크고 작은 광장을 끼고 있었지만 이제는 그런 곳을 보기 어렵다. 광장의 효용가치를 높이 사기보다는 자본의 논리로 무장한 사람들의 천박한 인식에 밀려 사라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동암역은 아직껏 광장을 가지고 있으니 다행스런 일이다. 

이곳은 제법 넓었으나 절반을 주차장으로 만드는 바람에 옹색하나마 나머지가 광장 구실을 해왔다. 거기서 시위나 집회는 물론 불우이웃돕기 장터, 각종 사회단체 캠페인 및 정치 캠페인, 종교 홍보 따위가 수시로 열리고 외국인 노동자들의 만남의 장소로 활용되곤 한다. 이뿐만 아니라 노무현, 김대중 대통령 서거 때는 분향소가 설치되어 추모의 자리를 제공하는 역할까지 했다. 

그렇다고 해서 긍정적인 일들만 있는 건 아니다. 노인들의 용돈을 갈취하는 노름판이나 야바위꾼도 등장하고, 광신도들의 꼴불견도 자주 연출되며, 취객이나 홈리스들의 싸움판으로 전락하여 눈살 찌푸리게도 하지만 온갖 인간 군상이 모여드는 동암역 광장은 광장으로서 가치가 충분한 곳임에는 틀림없다.

그런데 작년 가을부터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광장 둘레에 서너 개에 불과하던 포장마차가 갑자기 많아지더니 급기야 한가운데까지 들어섰고, 설상가상으로 빈자리에 난전들이 펼쳐지기까지 해서 이제는 광장이라고 말할 수 없는 지경이 되어버린 것이다.


동암역 광장의 노점상들.

나는 행인들의 허기를 달래주기에 안성맞춤인 포장마차가 역 근처에 있는 것에 찬성하는 입장이고, 노점상을 무차별적으로 단속하는 행위에 반대해왔다. 그 생각은 변함 없지만 많은 사람이 활용하고 있고, 활용해야 하는 광장을 무단 점거하는 행위에는 결코 찬동할 수 없다. 해서 어떤 조처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을 무조건 쫓아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포장마차들을 역 주변으로 배치해서 광장이 제 기능을 할 수 있게 해놓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나름대로 대책을 호소해 보려고 부평구청과 동암역 역무실에 전화를 걸었다. 구청 직원이 들려준 말은 동암역 광장은 동암역사의 사유지여서 역이 자체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고, 동암역 역무원은 인력도 모자라고 공권력이 없어 손을 쓰지 못하지만 경찰마저 신경도 안 쓴다며 자기들의 처지를 이해해 달라고 되레 하소연하는 것이었다. 

이쯤에서 의구심이 솟구친다. 우리나라 공권력에 불가능이 있었던가? 국가기관들이 언제부터 이렇게 준법정신이 투철했나? 공권력을 남용하는 것도 아니고 만인을 위한 공공장소에 난립한 포장마차를 정당하게 정리하는 일인데 그걸 못한다는 게 말이 되나?

아무리 생각해도 부평구청과 동암역, 경찰의 느슨한 태도에는 뭔가 석연치 않은 면이 있다. 정당한 집회조차도 원천봉쇄해버리는 현 정부 행태에 비춰본다면 동암역 광장은 폐쇄해야 마땅한 곳이다.
 
이제 답이 선다. 광장을 망가뜨린 포장마차들은 정리를 못하는 게 아니라 일부러 '안 하는' 것이리라. 정부의 시위문화 근절책에 힘입어 서울시청이 집요하게 광장에 자물쇠를 채우려드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말이다. 


지난해 5월 동암역 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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