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공동체를 지키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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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공동체를 지키는 사람들
  • 심형진
  • 승인 2018.10.15 11: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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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제주 명월국민학교, 청년회에 맡겨진 폐교

 

제주도에는 해안과 한라산의 중간쯤 되는 곳에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 있다. 이런 지역을 중산간 지역이라 한다. 제주를 여행할 계획이라면 이곳을 돌아보는 것도 좋은 여행방법 중 하나다. 해안선을 따라 걷는 올레에 이어 한라산 둘레길이 생기는 것도 이러한 경향을 반영한다. 이러한 지역에 명월리가 있다.

명월국민학교는 제주 서쪽 한림 항에서 한라산 쪽으로 5킬로미터 이상 올라가는 명월리에 있다. 명월리에 접어들면 제일 먼저 퐁낭(제주 지역말로 팽나무를 가리킨다)이 방문객을 맞이한다. 하나하나가 정자나무 노릇을 하고도 남을 위용에서 마을의 연륜이 얼마나 깊은 지 알 수 있다. 퐁낭 사이로 흐르는 마을 개울가에 명월대가 자리하고 있다.





명월대는 3층의 기단만 있다. 그 위에 무엇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기단은 사각형 위에 팔각형이, 그 위에 원형이 놓여있다. 마치 오래 된 탑이나 부도의 지대석과 기단부분과 같다. ‘땅은 사각형으로 평평하고, 하늘은 원으로 둥글다’는 동양의 천원지방(天圓地方) 사상에 따르면 명월대는 땅에서 하늘로 올라가는 형상을 하였다. 맨 위 원에 앉아 시회를 즐겼다는 안내문에 따르면 시회에 참여한 이들 모두 신선과 같은 '별유천지비인간'의 경계에서 노닐고 있음이다. 건물 하나에 이러한 심오함을 즐긴 동네이니 유별난 뭔가가 있음이 분명하다.

명월대 바로 앞에 명월국민학교가 있다 국민학교가 초등학교로 바뀐 지가 언제 적인데 여전히 명월국민학교란 현판을 달고 있다. 사실 이곳에 온 이유는 명월초등학교 때문이다. 명월국민학교는 1954년에 설립하였다. 1954년은 제주도 사람에게는 매우 특별한 해이다. 1947년 3월1일 발발한 경찰의 오인사격에서 촉발된 사태가, 1948년 4월3일 무장봉기대의 결성을 계기로 발생한 제주4.3사건 이후, 계엄령에 의해 발동한 한라산 입산 금지가 풀린 해이다. 명월리에서도 400명 가까운 주민이 죽었다. 이러한 아픔을 겪은 마을에서 마을로 돌아와 제일 먼저 한 일이 후세들에게 교육을 시키겠다는 결의를 하고 마을 공동 소유의 땅을 희사하여 학교를 건립하였다. 공동체가 존속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일로 아이들 교육을 꼽았으니 이는 백년대계를 바라본 마을 어른들의 혜안이 빛나는 결정이다.

세월이 흘러 국민학교가 초등학교로 바뀌고, 젊은 사람들이 하나 둘 마을을 떠나 명월분교로 되었다가 결국 폐교가 되었다. 폐교가 되면서 아이들 웃음소리가 끊긴 그곳을 마을이 공동으로 관리했다. 학교의 토지는 교육청 소유(?)겠지만 마을공동체가 희사한 토지이기에 개인에게 팔거나 위탁을 주지 않고 마을에 관리를 맡긴 것이다. 마을에선 1954년과 같이 또 다시 이 땅의 사용에 대해 결정을 해야만 했다. 결론은 앞으로 마을을 떠받칠 청년회가 폐교의 운영을 맡는 것이다.





명월국민학교에 들어가니 과거에 설립된 여느 학교와 마찬가지로 이순신장군의 동상과 안데르센의 책 읽는 소녀상이 반기고, 운동장에는 잔디가 싱그러움을 자랑한다. 그 구석에서는 무대설치가 한창이다. 이 마을 출신 가수 백난아를 기념하는 음악제를 준비하는 무대다. ‘찔레꽃 붉게 피~는……“을 부른 가수 백난아 기념관이 학교 한쪽에 자리 잡고 있으니 그에 걸 맞는 무대다. 단층의 교사는 새로 칠을 해서 단정한데 나무 두 그루 사이에 반듯하게 명월초등학교란 현판이 달려 있다. 그 문을 열고 들어가니 ’예쁘다‘는 탄성이 절로 터진다. 옛 학교 교사 전면을 그린 그림 한 장이 벽 전체를 차지하고 있고 그 앞에 아이들이 앉아 공부했을 책상과 의자 두 개가 놓여있다. 옆에도 학교와 관련된 그림들이 걸려 있다. 복도로 들어서니 교실에 문패가 달려있다. 하나는 소품반이고 또 하나는 커피반이다. 두 개의 반을 운영하는 이들이 바로 마을 청년들이다. 커피반은 당연 커피와 제주 청귤 에이드 등을 팔고, 소품반은 주변 예술가들의 작품을 모아 판매를 한다. 젊은 예술가들의 자립을 도우면서 지역에 젊은이가 모이게 하는 역할도 하는 것이다.

들어올 때부터 탄성을 자아냈던 학교의 구조 변경뿐만 아니라, 커피반과 소품반의 탁자며 의자 찬장과 계산대, 진열대 모두를 이 청년들이 손수 했다고 한다. 정갈하고 단순하면서도 품위가 있는 인테리어는 사람을 잡아끄는 힘이 있다. 거의 손을 대지 않고 원형을 고스란히 살린 인테리어는 학교 분위기를 훼손하지 않아 옛 추억을 생각나게 한다. 복도에는 창에 기대어 쪽 탁자를 붙이고 장의자를 설치해 차와 음료를 마시면서 밖을 내다보게 했다. 야외는 야외대로 해먹과 편안한 의자를 설치해, 제주도 서쪽에 유일한 유인도인 비양도로 지는 해를 보며 석양을 즐길 수 있게 했다. 여기서 보는 비양도는 해안에서 보는 비양도와는 또 다른 느낌이다. 해안에서 보는 섬은 바다에 가로막혀, 가지 못하는 애절함을 불러일으킨다면, 멀리서 바라보는 섬은 그림을 바라보듯 관조의 대상으로 다가온다.





1954년 주민들의 토지 희사로 처음 태어난 명월국민학교는 2018년 9월 동네 청년들에게 맡겨 이렇게 다시 태어났다. 아이들이 사라진 명월리에 미래를 꿈꾸며 세운 학교는 폐교되었으나 마을 주민들은 마을의 미래를 생각하고, 폐교를 리모델링하여 마을 청년들로 하여금 운영하게 하였다. 아이들이 끊어진 마을, 새로이 청년들이 모일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줘 다시 아이들 웃음소리가 이어질 수 있는 기반을 조성했다. 이제 명월국민학교는 지역의 거점 역할로 다시 태어나 명실상부한 국민의 학교가 된 것이다.

꿈을 꾸고 그를 실현해가는 청년들의 젊음이 주는 아우라는 어떤 것으로도 막을 수 없다. 젊음이 뿜어내는 자신감과 속해 있는 공동체가 주는 든든함이 배어져 나오는 광휘가 그들을 밤하늘의 별처럼 빛나게 한다. 명월국민학교는 이제 갓 태어난 아기지만 명월리의 역사와 공동체를 지켜온 사람들의 바람을 딛고 힘차게 발걸음을 내딛는다. 천천히 그렇지만 오래오래 거듭나는 삶을 만들어가는 명월학교를 둘러보면서 내내 가슴이 벅찼다.

한라산에서 내려오면서 바다를 보면 바다가 벽처럼 우뚝 솟아 있다. 도깨비도로니 신비의 길이니 하는 것처럼 착시 때문이리라.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 보면 언제나 눈높이에 수평선이 걸려있다. 크게 보이는 것이 반드시 큰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세월이 가면, 아니면 다가가 가까이서 보면 정말 별 것 아닐 때가 많다. 우리가 도시를 개발할 때 번듯하거나 그럴 듯한 건물을 세우면 뭔가 한 것처럼 느끼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다. 도시뉴딜 정책이니 항만 재개발이니 개발을 둘러싼 많은 논란들이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은 껍데기의 화려함과 듣도 보도 못한 것에 대한 현혹이 아니다. 주민이 주체가 되고, 생명이 깃들 수 있는, 그래서 새로운 창의가 샘솟을 수 있는, 공동체의 큰 그림을 그리고 있는 명월리 마을 사람들의 혜안이 아닐까?
 
2018년 9월 말 제주도를 다녀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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