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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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 한인경
  • 승인 2019.02.24 2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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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다시 주목하는 영화 -『심플 라이프 A Simple Life』


<한인경의 씨네공간>은 2016년에는 그해 상영된 독립영화들을, 2017년부터 현재까지 ‘다시 주목하는 영화’라는 테마로 평론을 이어가고 있다. 영화는 이미지 너머로 발견하는 한 권의 철학서와 같다. 우리는 그 속에서 힐링하고 비상하며 철학적 사유로 삶의 의미를 읽는다.

 
삶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다시 주목하는 영화
『심플 라이프 A Simple Life』
 
“복 짓는 삶”

개 봉 : 2012.11.22(117분/홍콩)
감 독 : 허안화
출 연 : 유덕화, 엽덕한, (까메오:서극, 홍금보, 유위강)
장 르 : 드라마
등 급 : 전체 관람가


 

 
 
온 가족이 함께 볼 수 있는 영화를 쓴다.
60년 넘게 거의 전 생애를 한 집안에서 식모살이로 지내고 있는 여인 ‘아타오’, 설사 가족이었다 하더라도 그처럼 헌신적으로 가사를 꾸려나갈 수 있었을까. 늘 신선한 음식재료로, 가장 맛있는 상태로, 정해진 시간에 식탁에 올리는 행동, 그녀의 지난 시간이 충분히 그려진다.
 
또 한 사람 ‘로저’. 그는 아타오의 정성 어린 결과물들을 무덤덤하게 기계적으로 누리곤 하는 량씨 가문의 손자다. 이 영화는 ‘천녀유혼’ 시리즈와 ‘황비홍’의 프로듀서였던 ‘로저 리’의 실제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영화다. 그녀의 양부는 일제 침략기 때 살해됐고 능력 없는 양모는 그녀를 량씨 가문으로 보냈다. 아직 미혼인 로저의 나머지 식구는 모두 미국에 이민을 갔고, 아타오는 홍콩의 오래된 아파트에서 주인집 아들 로저의 가사도우미로 살고 있다.
 
세월은 어쩔 수 없는 것, 어느 날 그녀가 뇌졸중으로 쓰러지게 되면서 가사도우미로 맞춤화돼 있던 그녀의 삶은 격랑을, 미풍을 동시에 맞게 된다.
 
그녀는 발병으로 혹여나 주인집에 폐가 될까 미안할 뿐이다. 요양병원으로 가겠다고, 돈 있다고 극구 로저의 도움을 거부한다. 부모 형제자매 아무도 없는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로저가 알아본 요양병원에 들어가게 된다.
 
 
아타오와 로저
로저는 공기처럼 햇살처럼 바람처럼 당연히 누렸던 일상의 평온함에서 아타오의 빈자리가 크게 다가온다. 요양병원에 자주 찾아와선 이것저것 챙기고, 어디서든지 양어머니, 양아들이라 인사하는 로저를 보며 아타오는 지금껏 느껴보지 못했던 행복을 느낀다. 그림처럼 지내는 요양병원의 노인들에겐 그런 아타오가 그저 부러울 뿐이다. 아타오는 친자식처럼 로저를 키웠지만 그 대가를 바란 적은 없었다. 오히려 로저의 따뜻함이 낯설고 황송하고 어색하지만, 어쩐지 싫지 않다. 잠시 외출하는 그 둘의 뒷모습은 여지없는 어머니와 아들이다.

 

출처:영화『심플 라이프』
 
 
미국에서 귀국한 로저의 가족도 아타오의 발병에 진심으로 안타까워한다. 생의 끝자락에 홀로 서 있는 아타오. 가족사진 촬영에도 휠체어를 탄 아타오의 위치는 맨 앞 줄 가운데. 로저의 친구들도 그녀를 그리워한다.
 
흔히들 ‘잘 죽으려면 잘 살아야 한다.’라고 한다. 아타오는 잠시 머물다 가는 이 세상에서 잘 사는 것이 어떤 것인가에 평범하지만 반듯한 답안을 제시한다. 학벌, 재력, 지위, 권력, 가족 어느 것도 그녀는 갖추지 못했고, 그것을 얻고자 생을 질주하지도 않았다. 그녀의 세상을 보는 눈은 계산되지 않은 성실과 헌신이었다. 그녀가 갖게 된 편안한 눈빛, 몸가짐, 주변의 인식 등을 하루아침에 갖게 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진실된 삶은 한 가족과 따뜻한 이웃을 갖게 한다.
 
영화 심플 라이프의 히로인, 아타오 역으로 열연한 엽덕한(1947)은 다른 배우가 상상이 안 될 것 같았다. 본인이 실제 아타오가 아닐까 착각이 살짝 들기도 했다. 엽덕한은 이 영화로 제68회 베니스국제영화제를 비롯한 국내외 영화제에서 거의 여우주연상을 휩쓸다시피 하였다. 로저역으로는 1990년대 홍콩 누아르 물의 대표 배우 유덕화(1961)가 맡았다. 잔잔한 드라마다. 그러나 영화가 깊어갈수록 지루함보다는 아타오의 스크린 너머의 시간이 보이며 우리네 일상은 편협함에 묶여 있지 않나 반성하게 하면서 영화도 관객도 절정으로 향한다. 두 사람은 몇 번 모자 관계로 출연한 적이 있긴 하지만 유덕화는 절제된 연기를 통해 엽덕한과의 최고의 조화를 이뤄냈다. 한국에서도 잘 알려진 배우 겸 감독 ‘홍금보’, ‘황비홍’의 ‘서극’ 감독이 카메오로 전반부에 잠깐 모습을 보인다. 제13회 전주국제영화제(2012) 폐막작으로 상영되었다.
 
 
홍콩 영화계의 거장, 여성 감독 허안화(1847)는 자연스러운 삶의 한 과정으로서 요양 병원에서 지내는 환자들을 여러 각도에서 비교적 상세히 담았다.
 
멍한 모습으로 그저 의자에 있는 환자, 집에 가겠다고 늘 보따리를 싸는 환자, 오늘도 한 사람이 응급차에 실려 간다. 익숙한 듯 자리에서 구경하듯 보는 사람, 아예 관심도 없는 사람, 신장 투석 중인 딸을 보러 온 어머니, 병원비를 아들과 나눠 내도록 어머니께 소리 지르는 딸, 늘 한 자리에서 무표정으로 앉아 있는 사람. 지속적으로 들려오는 신음.
 
식사 시간, 한 줄로 턱받이를 한 노쇠한 환자들이 옆으로 나란히 앉아 있다. 보호사는 바퀴 달린 의자로 이동하면서 한 숟가락 음식을 입에 넣어 드리고, 바로 옆의 노인에게 또 한 숟가락…… 차례차례 한 숟가락씩 입에 넣어 드린다.
 


 출처:영화『심플 라이프』
 
 
삶은 결과가 아닌 과정
 
모두 늙는다. 자신의 노후 모습을 좀 더 고상하고 우아하게 그리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싶다. 두 편의 영화와 속담을 생각해 본다.
 
 
영화 ‘스틸 라이프’(2013)와 ‘버킷 리스트’(2007).

‘스틸 라이프’, 주인공 ‘존 메이’는 홀로 죽어간 사람들의 유품으로 송덕문을 작성하고 장례를 치러주는 일을 하는 구청의 공무원이다. 언제나 변함없는 출퇴근 모습, 굳은 표정, 혼밥, 초라할 정도로 간단한 식탁. 혼자 살던 그도 교통사고로 죽음을 맞이한다. 그의 장례는 어찌 되었을까. 함께 할 사람이 아무도 없는 장례식 날, 그가 생전에 자신의 일처럼 애써서 치러 준 마지막 의례의 주인공들이 영혼으로 모두 나타나 그의 마지막 길을 함께 해주는 환상적인 장면이 나온다.
‘버킷 리스트’, 온몸에 암이 퍼진 백만장자 애드워드 콜(잭 니콜슨)은 자신의 병원에서 수술을 받는다. 그런데 그에게 병문안 오는 사람이 없다. 옆 베드의 카터(모건 프리먼)는 ‘누군가의 삶을 평가하긴 어렵지만 그를 기억하는 이들이 그의 삶을 말해 준다고 본다. 콜은 인생의 끝에서 평생 한 것보다 많은 걸 이뤘다. 숨을 거두는 순간 두 눈은 감겼지만, 가슴은 열렸다.’고 병실 친구를 회상한다.
 
‘세상은 기차역 대합실과 같다.’, ‘노인 한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 도서관 하나가 불타 버린 것과 같다.’라는 인도와 아프리카 속담이 있다.
 
기차역 대합실은 다음 목적지를 향해 가기 위해 반드시 머물러야 하는 곳이고, 대합실도 기차가 올 때까지 한시적으로 사용하는 곳이다. 잠시 머물다 떠나는.
 
 
대한민국은 2017년 11월 65세 이상 인구가 전체 인구의 14.1%에 이르러 이미 고령사회이며, 2006년 초고령사회로 진입한 일본에 비하여 빠른 속도로 초고령사회(65세 이상 20%)로 진입할 것이라고 예상되고 있다. 즉 5명 중 한 명은 65세 이상이 된다는 것이다.
삶이라는 여정에서 종착역에 가까워진 분들이야말로 이 길의 빛나는 구성원이다. 경쟁 속에서 사느라 바빴던 청춘 세대를 뒤로하고, 관조적 시각이 깊어지는 세대다. 질병 유무, 경제력 여부, 권력, 지위 등으로 그들의 삶을 판단하지 말기를. 설날에 많이 나누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인사말이 있다. 간혹 ‘복 많이 지으세요.’라며 인사 나누는 사람을 만난다. 삶은 지극히 주관적이고, 세상은 각자가 인식하기 나름이다. 따라서 행복도 일률적으로 말할 수 없는 것.

 
심플 라이프

 
담관염 수술, 폐기종, 두 번의 뇌졸중, 아타오는 혼수상태를 맞게 되고 로저의 동의하에 병원은 약물을 줄이겠다는 처방을 내린다. 중국 출장이 잦은 로저는 출장을 떠난다. 눈물바다를 이루는 통곡은 없다. 의연하게 장례를 치르고 로저는 다시 아타오 없는 일상으로 복귀한다.
 
복 짓는 삶의 과정, 심플하다.
 
가진 것, 배운 것 하나 없고, 게다가 질병과 노쇠로 죽음을 목전에 둔 ‘아타오’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했던 이유다.
 
한인경/시인, 인천in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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