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의 고향 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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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의 고향 인천
  • 은옥주
  • 승인 2019.03.14 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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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인천에서의 40년 - 은옥주 / 공감심리상담연구소 소장

<자유공원>

 
인천에 온지 이제 40년이 되었다. 인천에서 태어난 딸 나이가 올해 마흔이 되었으니 계산이 절로 된다. 내 나이 서른에 인천에 와서 이제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인이 되었으니 인천은 나에게 ‘제2의 고향’이 된 셈이다.
 
처음 인천에 온 것은 대학 1학년 파릇파릇했던 시절이었다. 숏커트에 미니스커트를 입고 친구와 동인천역에 내렸다. 역 앞 ‘별다방’은 황실의자처럼 빨간 벨벳을 씌운 의자에 붉은 카펫까지 제법 멋졌다. 그곳에서 인하공대 학생들과 미팅을 하며 키 크고 덥수룩한 미팅파트너와 신포시장에서 닭강정도 먹었다. 자유공원에 오르니 확 트인 바닷 풍경이 참 인상적이었다. 맥아더 동상 옆 광장에서 비둘기들이 떼지어 날아다니고 먹이를 주니 내 손위에 겁 없이 내려와 앉던 것이 참 신기했다.
 
그 후에 송도유원지도 가보았던 기억도 있고, 물빠진 아암도에 하이힐을 신고 가다가 신발 한짝이 빠져 스타일을 구겼던 기억도 있다. 그리고는 까맣게 잊어버렸던 인천으로 와서 아이둘의 엄마가 되고 이제는 손자를 둔 할머니가 되었다. 봄이 되니 처음 인천에 와서 정을 좀 붙여 보려고 애썼던 여러 가지 일들이 좋은 추억이다.
 
결혼을 하여 낯선 인천으로 오게 되었을 때, 그 당시 공단이 많던 인천은 좀 삭막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아파트 베란다를 꽃밭으로 꾸미고 나팔꽃·맨드라미·봉숭아 같이 고향에서 자주 보던 꽃들을 잔뜩 심었다.
부평 공동묘지에는 맑은 물이 흐르는 개울이 있어, 봄이면 개구리 알이 많이 있었다. 투명한 봉지 같이 생긴 알 속에 검은 점이 배어 있었다. 베란다에 대야를 놓고 기다리면, 올챙이가 되었다가 한참 지나면 조그만 청개구리가 탄생하는 것이었다. 뒷다리가 나오고 앞다리가 나오는 것을 매일 관찰하면서, 아이들은 신기해했다. 개구리들은 베란다의 풀 속에서 한참 살다가 없어지곤 했는데, 아이들에게는 큰 즐거움이었다.
버스를 타고 종점까지 가면, 큰 배 밭이 있었다. 가을에는 그 곳에서 배도 깎아 먹고, 옆에 있는 옹기 공장에서 흙을 얻어 흙 놀이를 하기도 했다. 고구마 철에는 고구마 밭에 가서 고구마를 캐기도 하고, 가을 들녘에 메뚜기 잡기도 하며 정서적으로는 풍부한 시간을 보냈다.
 
큰 아이가 학교에 갈 때가 되자, 학교가 단지 내에 있는 아파트로 이사를 갔다. 딸아이가 등교하는 첫날, 유난히 조그맣고 몸이 약한 딸이 가방을 메고 신발주머니를 들고 가는데 무거운지 다리가 비틀비틀했다. 나는 밝은 표정으로 ‘잘 갔다 와.’ 하고는 문 뒤에 숨어서 멀어져 가는 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눈물을 훔쳤다.
 
“이제부터 아무리 무거워도 힘들어도 네가 질 짐은 네가 져야 한단다. 엄마가 도와 줄 수가 없단다.”
 
속으로 아이에게 말하는 것인지, 마음 아픈 나에게 하는 말인지 모를 혼잣말을 중얼거렸었다. 지금도 3월 입학시즌이 되면 가방을 메고 조잘조잘대며 학교에 입학하는 아이들의 모습에 마음이 먹먹할 때가 있다.
 
두 아이가 다 인천에서 태어나 쭉 살아왔으니 인천이 고향인 인천사람이다. 나는 늘 마음 한구석에 좀 더 자연이 가깝고 풍경이 아름다운 지방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아이들의 각별한 ‘인천사랑’ 덕분에 이제는 인천에서 남은 생을 살아야 할 것 같다. 타 지역에 갔다가 돌아올 때 인천에 들어서면 느껴지는 안도감을 보면, 내가 인천사람이 된 것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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