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휴 산업시설이 산업유산이 되려면: 동일방직을 사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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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휴 산업시설이 산업유산이 되려면: 동일방직을 사례로
  • 윤현위
  • 승인 2019.04.09 12:15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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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칼럼] 윤현위 / 자유기고가·지리학 박사
 
<동일방직 전경>


인천은 어떤 도시인가라고 물으신다면 필자는 정확하게 답을 할 수 없을 지도 모른다. 그건 인천이 복잡한 도시이기도 하고, 현재 인천에서 사는 시민이라서 떠오르지 않을 수도 있다. 아마 외부인들이 줄을 서서 먹는 맛집에 현지인들이 가지 않는 이유랑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시계의 추를 조금만 과거로 돌린다면 다소 명확해질 수도 있다. 과거 인천은 공업도시였다. 대도시 중에서 2차 산업의 비중이 가장 높은 도시이기도 했고 공업도시의 이미지를 갖고 있는 1960년대 이후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의해서 본격적으로 조성된 울산이나 포항보다 공업화의 역사가 더 긴 편이다. 일제강점기 인천은 병참기지의 가치가 높아지던 1930년대 후반부더 공업시설들이 입지하기 시작했다.

1930년대 후반부터 거의 80년 정도의 시간이 지났다. 그 중에서 대성목재, 대한제분, 현대제철, 두산인프라코어는 중간이 이름과 주인이 바뀌었지만 계속 공장이 유지되는 경우도 있고 동일방직처럼 이제 더 이상 가동되지 않는 공업기능이 상실된 공장들도 있다. 화수부두 앞에 일진전기도 가동이 중단된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이중 오늘은 동일방직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지도상으로 봐도 매우 넓은 이 공장을 어떻게 할 것인가는 향후 동구가 어떤 지역으로 변할지를 결정할 중요한 전환점이 될 수도 있다.

 

<동일방직 위치>
 

방직은 방적과 직조가 합쳐진 말이다. 실을 뽑고 섬유를 짠다는 의미이다. 동일방직인 1937년도에 동양방직으로 출발하였다. 이윤율이 떨어진 일본의 섬유산업이 식민지 조선으로 진출한 것이다.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이 진행되는 상황도 맞아떨어졌다. 공장건립을 위해서 동구일대의 해안가는 매립되면서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
동일방직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수출기업이었고 적어도 1980년대까지는 높은 생산량을 유지하였으나 섬유산업은 서서히 사양산업에 접어들었고 동일방직의 본사는 생산기지를 해외로 이전하기 시작한다. 2000년대 들어서면서 동일방직 인천공장의 생산량은 줄어들기 시작하였고 현재는 물류 기능만을 담당할뿐 실제로 면사를 생산하지는 않는다.

아직 확정되지 않았지만 동일방직 공장은 이전적지가 되어 아파트단지로 개발될 확률이 매우 높다. 인천의 대규모 공장들은 상당수가 아파트로 개발되어 왔기 때문이다. 동일방직 앞에 있는 만석비치타운도 원래는 대성목재공장이었고 인하대학교 정문 건너편에 있는 풍림아파트도 원래는 한일방직이었다. 공장은 주택재개발과 달리 소유관계가 단순하기 때문에 재개발하기에 용이하다는 특성이 있다.

동일방직 부지는 기업의 의도와 지자체의 계획이 잘 어우러져야 개발이 가능하다. 다만 그동안 공장부지의 재개발은 모두 아파트단지로 개발되었다면 이제는 과거에 대한 기억과 지역 문화에 대해 공헌을 할 수 있는 공간활용이 추가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동일방직 공장부지에는 공장으로 사용된 건물 이외에도 기숙사 건물, 의무동 건물, 체육관 건물 등이 있다.

 

<동일방직 체육관>

<동일방직 기숙사>
 

현실적으로 동일방직 일대를 재개발한다 하더라도 앞서 언급한 세 건물은 철거하지 말고 지역을 위한 용도로 사용했으면 한다. 이는 용도를 녹지나 문화시설로 변경하면 충분히 가능하다. 체육관은 동일방직 창립 10주년을 기념해 만들었는데 이 자체만으로 지역민들을 위한 체육시설로 활용할 수 있다. 시설만 잘 관리하면 될 듯하다.

동일방직 의무동 건물은 도시재생에서도 자주 언급되는 건물이다. 한옥에 다양한 건축양식이 혼합된 이 건물은 건축사적으로도 의미가 있다는 점에서 기념관이나 박물관으로 활용할 수 있다. 기숙사는 오랜 시간동안에 일했던 여공들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점에서 이 당시의 여성노동과 관련된 시설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기숙사 내부에는 과거 우리나라 여성노동자들의 흔적은 물론 1990년대 후반부터 이주한 외국인 노동자들이 생활했던 모습들도 상당 부분 간직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동일방직 인천공장에서 잊으면 안되는 장면이 있다. 동일방직은 1970년대 우리나라 최초로 여성노조위원장을 배출했고 노동탄압의 기억이 있다. 이 시기에 일했던 노동자들은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동일방직 입장에서는 이러한 기억들을 담는 공간을 조성한다는 계획이 달갑지 않을 수 있다. 과거 서울의 국도극장이 등록문화재로 언급되자 당일 밤에 철거했던 일례처럼 비어 있는 동일방직 공장의 건물들을 미리 철거할 수도 있겠다.

필자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며 이 글을 쓴다. 과거 노동을 기억하는 공간의 조성은 자신들을 욕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잘못을 되돌아보고 과거와 화해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방법이기도 하다. 동일방직 체육관에서 과거에 동일방직에서 일했던 노동자들을 초청하는 행사를 하고 그들의 기억을 기념하는 공간을 만드는 작업을 같이 했으면 한다. 필자는 지금 어렵고 불가능한 일을 이야기하고 있는걸까? 과거를 인정하고 피해자들에게 사죄 후 용서를 받아야 그 과거가 미래의 재생자산으로 활용될 수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유휴산업시설이 산업유산이 될 때 인천은 한 단계 더 발전할 수 있다. 당장은 아니더라고 점차적으로 그렇게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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ㅂㅍㅇ 2019-04-10 10:13:10
좋은 글이네요. 몰랐던 사실도 알게 되었고, 보존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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