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9년, 주안염전 앞 전매청 제염연구원
상태바
1959년, 주안염전 앞 전매청 제염연구원
  • 정혜진
  • 승인 2019.06.04 18:0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4) 김명국 어르신을 만나다 - 정혜진/ 마을교육공동체 '파랑새' 대표


<인천in>이 과거 주안염전(미추홀구 주안·도화동, 서구 가좌동, 부평구 십정동 일대)을 중심으로 펼쳐졌던 염전골 마을 탐험기를 연재합니다. 1909년 전국 최초로 시험 염전이 만들어져 1965년 경인고속도로 건설과 함께 폐쇄될 때까지 이 일대는 염전 고유의 마을 문화권을 이루었습니다. 이제 잊혀져가는 그 뿌리를 찾고 이 일대 형성된 마을 공동체를 찾아 이야기를 나눔니다.



주안5동 일대는 거대한 염전지대였다. 그럼에도 우리는 염전 이였다는 사실을 잊은 채 살아가고 있다. 우리가 밟고 있는 이 땅은 어떤 과거를 품고 있을까? 염전의 추억을 고스란히 기억하고 살아가시는 분이 계시다. 당시 전매청 소속 공무원으로 근무하시던 염부장 김명국 어르신이다.

 
김명국 어르신 소장자료. <잡지에 실린 것을 스크랩하여 소장하고 계셨다.>
 
미추홀구 주안5동, 지금의 미추홀복지관 자리가 바로 과거 전매청 인천청사가 위치하던 곳이었다. 넓은 대지에 염전과 주안역이 한눈에 바라보이는 곳 이었다. 소금과 인삼 담배를 관리하던 전매청은 주안역과 걸어서 5분 거리에 위치하며, 주안역에 3개동의 소금창고를 관리, 운영하며 광활한 주안염전을 관리하던 곳이었다.

소금의 수요가 증가하자 전매청에서는 1959년 전매청 제염연구원을 뽑는 모집공고가 났는데, 20명 뽑는데 80여명이 접수하였다고 한다. 공무원에 속하는 전매청 직원을 뽑는 것이었기에 당시에도 많은 사람이 응시했다. 여기서 1차 기술시험, 2차 면접시험에 거처 제염연구원으로 발탁된 분이 바로 김명국 어르신이다.

소금에 대한 국가 산단 교육을 받고 본격적으로 제염연구를 시작하는데, 공업용 소금은 염도가 높아야 했기에 소금의 염도를 높이는 방법, 불순물이 적게 들어간 소금을 만드는 방법, 또 생산량을 높이는 방법 등을 연구하였다고 한다. 숭의동에 독각다리 염전시험소에서 연구를 진행하며 향후 소래 군자 주안염전을 순차적으로 근무하고 대한 염업공사의 고문직까지 한 그의 염전사랑, 소금 사랑은 대단했다.

당시 염전생산량이 기록된 자료와 염전의 지도 등을 지금도소장하고 계시다. 사진이 귀했던 시절 염전의 사진 등은 향후 이 마을을 살아가는 후손에게는 아주 중요한 사진 자료가 될 수 있기에, 다수의 자료를 인천시립박물관에 기증하여 많은 시민에게 기억될 수 있도록 토대를 만든 분이시기도 하다. 그는 그때 받았던 월급봉투까지 소장 하고 계셨다.


김명국 어르신과 실제 받았던 월급봉투.
 

염전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 보다 굉장히 체계적으로 운영되었다. 전매청에서 바라다보면 염전이 보였고 각 염전마다 관리자가 있었다. 주안염전은 지형 그대로의 갯골을 이용해 만들어진 염전이었지만, 이후 조성된 남동 소래 군자염전는 구획하여 만든 염전 이였다.

이에따라 가장 작은 주안염전에는 더 많은 관리자가 필요했다.지금은 비어있는 5,6공단 내 파출소 자리가 과거 염부장의 사무실이 있었다고 한다. 주안염전은 8구역에 212정보, 소래염전은 5구역에 549정보, 군자염전은 6구역에 603정보, 남동염전은 3구역에 300정보로 이루어져있었다고 기억해 낸다.

각 구역마다 1명의 염부장이 있었는데, 그 아래로 많게는 10여명의 염부가 근무를 했었다고 한다. 전매청은 당시 전매제가 실시되던 인삼과 담배 그리고 소금을 관리하던 곳이었는데 소금은 전쟁 직후 전매 대상 품에서 해제되고 인삼과 담배만 전매청에서 관리하게 된다.

소금의 전반적인 것을 관리하는 전매청 산하에 염도와 염분의 성분을 측정, 연구하는 조직이 있었고, 염전을 만들거나 관리하는 토목 전공자들과 실제 소금을 생산하는 염부들까지. 다양하고 조직적으로 구성되어있었다.

소금은 산업의 중요한 재료이다. 소금이 사용되는 분야는 우리가 아는 것 보다 훨씬 많이 사용되고 있다. 플라스틱을 만들 때도, 음식을 만들 때도, 약을 만들 때도, 섬유를 만들 때도, 소금이 사용된다. 산업이 발달함에 따라 소금은 더 많이 필요하게 되었고 해방직후 국가에서 생산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여 전매제를 해제하고 민간인들도 소금을 생산 할 수 있게 하였다. 그로 인해 소규모 염전들이 생겨나기도 했다.

소금 생산은 바닷물을 저수지에 가두어 두고 농도가 13도 정도까지 증발시킨 후 저수지에서 논처럼 생긴 증발지로 물을 옮겨 가며 염도를 높인다. 이때 불순물이 많이 들어가면 소금의 염도가 낮아지기에 불순물이 적게 들어가고 염도를 높이는 방법을 고민하신 분도 김명국 어르신이다.

염밭을 옮겨가며 농도가 높아지면 소금은 23~25도가 되면 소금알갱이가 생기기 시작 한다고 한다. 마지막 증발지에서 자연적으로 23도~25도가 되는 것은 시간이 많이 걸리니 간수를 섞어서 소금 생산량을 높이기도 한다.

또 마지막 생산지에서 소금이 채취할 때 이물질이 많이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바닥에 깔패기라고 불리는 타일 조각 같은 것을 깔았고 그 위에 소금 알갱이들이 내려앉으면 그것을 긁어모아 소금의 질을 높이는데, 김명국 어르신이 우리나라 최초 88%소금 생산에 일조한 일등 공신이기도 하다. 이렇게 생산된 소금을 마지막 증발지 옆에 소금창고에 보관하여 염수가 조금 빠지고 나면 포장작업을 하여 주안역 창고에서 보관되다가 전국으로 보내졌다고 한다.

 
염전제를 지내고 있는 모습. <김명국 어르신 소장사진>


또 염밭에서 봄이 되면 염전제를 지내곤 하였는데 한해 소금농사가 잘 되게 해 달라고 고사를 지냈다고 한다. 이 제사는 과거 염전이 생긴 초기부터 지속되던 풍습으로 한해 액운을 막아주고 무사 무탈을 기원 했다고 한다. 또 한 번씩 염전에서 회식을 하면 염밭에서 고기를 구워 먹곤 하였는데 그때 직접 만든 소금을 뿌려서 고기를 굽거나 바로 옆 염전 창고에서 소금을 한 움큼 가지고와 고기를 찍어 먹었는데 그때 먹은 고기 맛은 잊을 수가 없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신다.

과거 주안 염전은 전국 소금생산량의 80%를 생산할 정도로 소금생산의 1번지였다. 소금생산의 1번지라 불릴 수 있었던 것은 아마 소금을 사랑하신 김명국 어르신 같은 분이 계셨기 때문이리라. 어르신은 지금도 우리 마을의 '염전문화'가 지속되길 바라는 마음을 담고 계신다. 이렇게 시대를 지나가며 마을의 문화가 이어지는 것이라 생각한다. 50년 후 우리 마을은 어떤 모습일까? 그 안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떤 기억과 문화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을까? 그것은 지금 이 마을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노력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라 생각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시민과 함께하는 인터넷 뉴스 월 5,000원으로 소통하는 자발적 후원독자 모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