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잊는자, 미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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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잊는자, 미래는 없다
  • 심형진
  • 승인 2019.07.23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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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난징 대도살 기념관을 다녀와서




 
잘난 친구를 둔 덕분에 중국 남경과 양주를 다녀왔다. 서울대 동양사학과 동문들이 중심이 된 패키지여행이었는데 무려 40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함께 했다. 그런데 일반 패키지여행과는 달리 잘난 친구의 잘난 동료들이 중국과 관련한 전공자들이었기에 10여 명의 박사며 교수들이 즐비했다. 이들 덕분에 단순한 여행이 아니라 고급스런 답사가 되었다. 대학 학점으로 따지자면 일주에 2시간 씩 13주면 2학점이니 하루에 8시간에서 10시간씩 4일에 걸친 강의에다 사전 학습까지 있었으니 무려 32시간 이상의 강의가 현장에서 이루어졌다. 학점으로 따지자면 2학점내지 3학점을 들은 셈이다.
 
여행 내내 장강 뚝 터지듯 흘러들어온 고대부터 근•현대까지 중국의 역사며 예술에 뇌를 씻은 느낌이다. 물론 처음에야 갑자기 들이닥친 지식의 홍수에 어질어질했고, 흘러 들어오는 대로 흘러 나가 뒤죽박죽이었지만 그래도 그분들의 수고가 감사하여 한번 적어 볼까 한다. 여행을 간 때가 5월 초이니 벌써 기억이 가물가물하고 느낌이 많이 지워졌지만 끊어진 기억, 조각 맞추듯 비면 빈대로 남겨본다. 물론 기억여행의 시간적 순서는 남경에서 양주, 다시 양주이지만 그것에 매이지 않고 써볼까 한다.

 
<대도살(大屠殺) 기념관>
 
난징(南京)은 상해 임시정부가 일본군에 쫓겨 임시로 머물던 곳의 하나로 알려져 있기도 하지만, 중국을 정복하기 위해 상해로 상륙한 일본군이 이곳을 점령하면서 대학살을 벌인 곳으로 유명하다. 삼십만에 달한 희생자 수가 많은 것도 많은 것이지만, 일본도로 누가 빨리 100인의 목을 베는지 시합을 할 정도로 잔악한 일본군의 행위에 더 놀라는 것이 바로 이곳 난징대학살의 실상이다. 이러한 실상을 그대로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대도살 기념관이다.
 
버스에서 내려 대도살 기념관을 향해 가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아이를 안고 절규하고 있는 피에타상이다. 일단 동상의 크기에 압도당하는데 올려다보고 있으니 구름하나 없는 맑은 하늘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은 청천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듯하다. 맑은 하늘이라 더욱 슬퍼 보인다는 생각을 했지만 우중충한 하늘이라도 그 어머니의 슬픔은 결코 반감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 비통함이란 말로 형언할 수 없다. 축 늘어져 있는 아이의 몸은 이미 그가 죽었음을 나타내고 있는데, 눈길을 끄는 것은 아이의 얼굴이다.

이목구비를 표현하지 않은 얼굴을 보면 이 아이가 누군가의 아이가 아닌 모두의 아이처럼 느껴진다. 익명성으로 자기를 숨길 수도 있지만 익명성이기에 모두일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이 피에타상의 아이이다. 또한 볼 수 있는 눈도, 먹을 수 있는 입도, 들을 수 있는 귀도, 냄새를 맡을 수 있는 귀도 없으니, 이 또한 늘어진 몸만큼 죽음을 표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상 하나만 봐도 당시 난징 시민들의 슬픔이 모두 느껴진다. 이 상 뒤로 입구까지 등신대 크기의 상이 여럿 있는데, 이 또한 사실적 묘사가 대단하여 그 절절함에 보는 이로 하여금 분노와 슬픔이 치밀어 오르게 한다.

 

만인묘


제1전시관에 들어서면 전시실은 1층이 아니고 지하에 설치되어 있다. 내려가는 계단에 설치된 전시물을 따라 가다보면 마치 시간을 거슬러 역사의 현장으로 들어가는 느낌이 든다. 수많은 전시물 중에 일본군에게 죽임을 당해 아무렇게나 매장된 시신들을 발굴한 만인묘다. 만인묘라면 만인은 못 돼도 꽤 많은 사람이 보여야 하는데 몇 백구는 될까 그것도 안 되었다. 이걸 가지고 일본은 30만이 과장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단다. 몇 백을 가지고 만인이라고 하니 30만도 거짓이라는 논리이다. 편협한 일본의 단면을 본다.

만인은 모두를 나타내기도 한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라고 하면 만명 만을 이야기할까, 그렇지 않다. 누군지 모르는 사람들, 확인되지 않은 사람이 다수 묻힌 그 모습을 보고 우리는 저들과 나를 구분할까? 저들은 죽었고 나는 살았다는 느낌 보다는 나 역시 죽었다는 공감의 느낌, 나 역시 그 시기의 난징에 있었다면 저 모습이 바로 나라는 그 느낌을 받을 때 그곳에 있는 백골은 모두의 모습이다. 이것이 만인묘의 참뜻이다. 따라서 일본인은 만 명의 수를 셀 것이 아니라, 또는 선조가 저질렀지 내가 저지른 잘못이 아니라고 말할 게 아니라 나도 그 시대에 살았다면 저렇게 했을 것이야 라고 만행을 저지른 당사자의 감정을 가져야 한다.

 



제1전시관을 나서면 완전히 터진 공간에 나서기 전 골목처럼 양쪽에 벽이 있는 좁은 길이 나온다. 두 벽의 모습이 다른 데, 오른쪽은 울퉁불퉁하면서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모습이고, 왼쪽은 반듯하다. 그런데 울퉁불퉁한 벽은 점점 낮아지고 반듯한 벽은 점점 높아진다. 아마도 오른쪽은 과거의 비뚤어진 역사를, 왼쪽은 앞으로 만들어갈 미래의 역사를 나타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걸어가는 그 길의 물리적인 길이야 명확하지만 인간이 만들어갈 그 길이가 갖는 미래의 시간은 얼마나 될까? 부디 이 길로 나타내고 있는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고 반듯한 역사를 만들어가겠다는 중국인의 의지가 누군가의 역사를 왜곡시키지 않으면서 세계 모두가 반듯한 역사를 만들 수 있으면 좋겠다.
 
두 개의 전시관을 돌아보고 나오면 저 멀리 중국스럽지 않은(?) 모습의 평화의 여신상이 보인다. 그 여신상에는 화평(和平)이란 글씨가 쓰여 있다. 그곳으로 가는 길옆으로 몇십미터는 족히 될 석벽이 있다. 그 석벽 앞에는 진군을 알리는 트럼펫을 부는 중국인민군 동상이 있고, 그 신호에 맞춰 두 방향으로 퍼져나가는 인민해방군이 석벽에 새겨져 있다. 그를 배경으로 수학여행을 온 학생들이 단체사진을 찍고 있다. 이 학생들은 대도살 기념관에서 무엇을 느꼈을까? 부디 여신상의 글귀처럼 조화롭게 어울려서 서로를 인정하고 함께 하는 평등의 세계를 만드는데 오늘의 기억이 자리 잡기를 기대해 본다. 그것이 역사를 마음속에 기리고 평화를 보배롭게 여긴다(銘記歷史, 珍愛和平)는 이 기념관을 세운 정신을 살리는 길이다.
 
                                                            <이천십구년 오월 초순 중국 남경 대도살 기념관을 다녀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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