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색 골목길, 옛 영화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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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색 골목길, 옛 영화를 꿈꾸며…
  • 김도연
  • 승인 2009.12.25 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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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길따라 발따라…인천新택리지] ①북성동

① 중구 북성동(북성동1~3가, 선린동)

북성동 2가와 3가 일대

월미산이 위치한 북성동 1가

[중구 개관]

인천은 우리나라에 '개화기' 서양문물이 가장 먼저 들어온 곳이다. 조선이 나라 밖 일에 신경을 쓰면서 인천은 '외래 문명'을 처음으로 받아들인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서세동점(西勢東漸) 시절, 인천은 그들의 '각축장'이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인천은 예나 지금이나 한반도의 문(門)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 인천은 일본과 서구 열강이 조선 진출을 꾀하던 19세기, 그들에게는 교두보였다. 인천은 그만큼 서울로 가는 가장 빠른 길목에 있었다. 병인양요, 신미양요, 운요호 사건 등 인천과 관련된 일들은 다 그랬다. 맥아더 장군이 6.25전쟁 때 상륙작전을 감행했던 곳도 인천이었다. 지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하루에도 수만 명이 중구 영종도 인천국제공항을 거쳐 우리나라를 들락거린다.

개화기 이전, 인천부 시절에는 지금의 도호부청사가 있는 남구 문학동 일대가 중심이어서 중구지역은 포구(제물포)가 있는 작은 동네에 불과했다. 한적한 어촌이었다. 그런 중구가 중심으로 떠오른 것은 '개화기'를 맞아 인천항을 중심으로 서양 문물이 들어오면서부터다. 이후 지금 이름으로 인천은 급격한 '체질 전환'을 겪는다.

개항시대를 거치며 최초의 서구식 공원과 근대적 기상대 설치, 최초의 해외이민 등 많은 기록할 만한 일들이 중구에서 시작됐다. 인천을 대표하는 이름 가운데 '제물포'란 명칭도 이 시기 인천항을 중심으로 한 중앙동과 항동 일대 포구를 일컫는 말이다.

인천항은 1882년 조선과 일본 사이에 '조·일수호조규속약'을 맺으면서 그 이듬해 문을 열었다. 지금의 내동에 지방 행정과 외교, 세관, 사법권을 관장한 인천감리서를 설치하며 인천항은 그야말로 인천의 중심으로 떠오른다.

그리고 현 자유공원과 중구청 주변 15만여 평에 일본과 청국 등 각국 조계가 설치됐다. 이 땅에 그들은 금을 긋고 자기네 영역을 확보한 것이다. 그 경계가 지금 '공자상'이 놓여 있는 계단이다. 공자상을 뒤로 하고 오른편이 청국 조계다. 1884년 4월, 선린동 일대 5천여 평에 자리잡은 청국 조계는 지금의 차이나타운으로 이어진 것이다. 왼편에는 당시 인천 금융을 장악했던 일본이 조계지로 삼았다. 공자상 뒤편, 자유공원이 들어선 응봉산 일대에는 서구인을 위한 공동조계지가 있었다.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개편으로 부제가 실시되면서 전국의 모든 조계가 사라지기까지 중구 지역은 우리나라 근대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된다.

1888년에는 최초의 서구식 공원인 오늘날 자유공원이 조성됐고, 1899년에는 인천항 하역 화물 및 수출 물자의 철도 수송을 위한 경인선 개통과 함께 인천역이 설치됐다. 또 1893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초등 교육기관인 ‘영화학당’이 들어섰다. 1902년에는 국내 첫 이민자 102명이 인천항을 통해 하와이로 이주했다. 1905년에는 자유공원 위쪽에 위치한 인천기상대가 첫 업무를 시작했다.

1949년 8월 지방자치법 시행에 따라 인천부가 인천시로 된 이후 1962년 5월 시 조례에 따라 중부출장소가 생겼다.

중구 개청은 1968년 1월 1일이다. 이 때 송월동이 중구에 편입됐다. 1973년 7월에는 동구에 있던 월미도가, 1989년에는 경기도 옹진군에 속해 있던 영종도와 용유도가 영종동과 용유동으로 편입된다.

1995년 3월 인천광역시 출범 당시 중구에는 13개의 행정동이 있었으나, 1998년 11월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10개동으로 줄어든다.

현재 중구 전체 면적은 109.21㎢이고, 연평균 기온은 12.7℃이며, 강수량은 1천159.4㎜ 이다.

신포동, 연안동, 신흥동, 율목동, 동인천동, 북성동, 송월동, 영종동, 용유동 등 10개 동에 3만9천735세대 8만9천244명의 인구가 살고 있다.
 

응봉산 자락의 북성


월미산에서 바라본 북성동 2가와 3가 모습

 서울 '샌님'들이 인천 유람을 나서면 대부분 경인전철 끝자락 인천역에 첫 발을 딛는다. 모르는 사람들은 “전철역이 그냥 역이지 뭐 특별한 의미가 있겠냐”고 말하겠지만 인천역은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인 경인선의 마지막 종착지이다.

객차에서 내려 역전 광장으로 나오기 전까지는 인천역이 오래된 역이라는 것을 느끼기 어렵다. 하지만 광장에 서서 돌아보면 한눈에 오래된 건물이라는 걸 알 수 있다. 물론 그 옛날 운수영업을 시작했던 1900년 5월의 역사(驛舍)는 아니지만 분명 오래돼 보인다.

지금의 인천역은 보수를 거치는 등 세월의 흔적을 엿볼 수 있지만 1960년에 지어진 건물 그대로다. 비록 지금은 제국주의 일본의 침탈 물자 수송 기능을 위해 만들어진 가슴 아픈 출생 비화를 찾아볼 길 없지만, 인천을 찾는 서울과 경기도 등 외지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요즘 논란을 빚는 '인천역 일대 도시재생사업'으로 인해 역사(驛舍)가 어떻게 변할지 모르지만 현재로선 이 상태대로 남을 것 같다.

광장에서 길을 건너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커다란 중국식 대문인 패루다. 지난 2000년 11월 중국 웨이하이시에서 중구에 기증한 패루는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마치 "여기부터 작은 중국입니다"라고 말하는 듯 우뚝 서 있다. 인천역 건너편 거리는 붉은색 천지다. 이 골목에는 주말이면 수많은 관광객이 찾아든다.

인천을 대표하는 관광명소 가운데 하나인 차이나타운이 위치한 이곳의 동 이름이 북성동(北城洞)이다. 북성동이란 이름은 조선시대에 자유공원이 있는 응봉산 자락에 위치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북성'이라는 성에서 유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리적으로 북성동은 월미산과 월미도를 포함해 제물포고등학교 뒷편 자유공원 일부와 파라다이스 호텔 맞은편 송월 사거리 이전까지 3.02㎢의 지역이다. 법정동인 북성동 1~3가와 선린(善隣)동을 포함하고 있으며, 지형적으로 자유공원이 위치한 응봉산 꼭대기에서부터 인천역까지 내리막 형상을 하고 있다. 선린동은 해방되면서 일본식 동명 개칭에 따라 1946년부터 부르게 됐다. 중국인들과 옛날처럼 친선적인 유대를 강조하자는 뜻에서 지어졌다.

인천 속 작은 중국


패루는 이 곳부터가 차이나 타운임을 알리듯 우뚝 서있다.

 패루를 뒤로 하고 가파른 언덕을 170여 m 정도 올라가면 차이나타운1길과 마주하게 되는데, 길 양쪽으로 중국 음식점들이 즐비하다. 이곳이 왜 차이나타운으로 불리는지 이유를 알게 하는 골목이다.

이 지역에 한국 유일의 차이나타운이 만들어진 것은 1882년 조선과 청나라 사이 통상조약이 맺어지면서부터다. 중국 산둥 지방에서 건너온 '쿠리(苦力'라 불리는 막일꾼과 부두 노동자들이 이미 상륙해 있었다고 한다. 이후 그들이 집단 거주지이자 생활 터전을 닦아나가면서 차이나타운을 자연스럽게 형성했다.

이곳에서 나서 자라온 차이나타운 상가번영회 손덕준(54) 회장은 "지금은 중국음식점들이 이곳을 대표하지만 할아버지께 들은 바로는 옛날에는 오늘날과 같지 않았다"고 말한다. 손 회장 말로는 한국전쟁 이전만 하더라도 이 지역에 화교들이 많이 거주했고, 지금과는 달리 농사를 짓거나 상업에 종사하던 이들이 많았다고 한다.

손 회장은 "한국전쟁 이후 거의 폐허가 되다시피 해 사실상 예전의 차이나타운은 찾아 볼 수 없다"며 "지금의 모습은 한중수교 이후부터 조성된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수십 곳의 중국음식점들이 늘어선 차이나타운에선 그 옛날 모습을 찾아내기란 불가능해 보인다.

각종 매스컴에 등장한 요리사들의 사진이 걸린 출입문을 수십 곳 지나며 100여 m 걸으면 '청관(淸館)' 언덕길을 만난다. 청관이란 청국이 1884년 인천구화상지계장정(仁川口華商地界章程)을 체결한 뒤 일본조계 서편 땅 5천 평을 구획해 청국전관조계를 설정하면서 생긴 말이다. 오늘날 선린동 일대 구릉 지대에 위치했다.

그 길을 따라 역 쪽으로 내려가다 보면 중간쯤 붕괴위험 때문에 외벽에 안전막을 친 건물을 발견할 수 있다. 이곳이 자장면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만들어 팔았다고 알려진 ‘공화춘’이란 중국음식점 건물이다. 하지만 요즘엔 공화춘에서 자장면이 탄생했다는 데 대해 이견을 제기하는 이들이 있다. 1960대까지만 해도 공화춘은 호화 음식점이었기 때문이다. 반면 자장면은 당시 쿠리들이 간단히 끼니를 때우던 음식이었다. 공화춘이 명소였다 보니 훗날 자장면의 원조로 알려진 게 아닌가 하고 지역 학계는 분석한다.

2005년에는 인천에서 '자장면 탄생 100주년 대축제'가 열리기도 했다. 한국인 8명 가운데 1명이 매일 먹는다는 자장면. 전국 2만4000여 개 중국 식당에서 하루 600만 그릇의 자장면이 소비된다고 하니 놀라울 따름이다. 자장면을 빼고 한국 음식문화를 말하기 어려운 셈이다. 어찌됐건 옛 공화춘 건물에는 조만간 자장면 박물관이 들어선단다.

공화춘 골목길을 따라 야트막한 언덕으로 발길을 돌려 100여 m를 올라가다 보면 삼국지 내용을 벽화로 만날 수 있다. 거기서부터 산책길을 따라 400여 m 오르면 각국공원으로도 불렸던 자유공원에 들어선다. 이곳이 1888년 우리나라 최초로 세워진 서구식 공원이다. 서양 각국이 공동으로 생활하는 공동조계지 한복판 산꼭대기에 서로 즐길 수 있는 공원을 만들기로 합의하면서 세워졌다고 한다. 광복 이후 만국공원이라 불리던 공원은 1957년 맥아더 장군의 동상을 세우면서 자유공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공원 조성 후 주변에는 영국인 존스턴 별장, 홈링거상회, 세창양행 사택 등 서구식 건물들이 지어졌다고 하지만 한국전쟁 당시 없어져 지금은 옛 사진이나 상상 속에서나 볼 수 있다. 인천상륙작전 때 미군의 융단폭격으로 이들 건물이 사라진 것은 아쉽기만 하다. 얼마 전엔 사진을 토대로 존스턴 별장을 '복원'하자고 해 논란을 빚기도 했다. 별 근거도 없이 고건축물을 복원하겠다는 '만용'을 부린 셈이다.

자유공원은 조성 당시만 해도 최초의 서구식 공원이란 이유로 많은 이들에게 주목을 끌기에 충분했겠지만 지금은 여느 공원과 비교해 특별할 것이 없는 평범한 공원의 모습을 한다. 여기선 운동을 하는 사람이나, 한 낮의 햇볕을 쬐기 위해 나온 노인들의 모습을 쉽게 구경할 수 있다. 공원에는 한미수교백주년을 기념해 세워진 탑과 맥아더 동상, 작은 화단들과 소규모 새우리 등이 있어 이 일대 주민들에게 편안한 휴식처 구실을 한다.

자유공원 맨 위 응봉산 최정상에는 인천기상대가 있다. 여기가 우리나라에서 근대적 기상관측이 처음으로 이뤄진 곳이다.

1904년 일본은 개전이 임박한 러일전쟁의 승리를 위해 현 중구청 뒤편에 임시관측소를 설치했다가 이듬해 1월 1일에는 응봉산 정상에 인천관측소를 신축해 이전했다. 당시로서는 첨단 장비인 풍력계, 지동계, 일조계, 자동강우계, 백엽상, 증발계 등을 갖췄다.

시계가 귀했던 초기에는 관측소가 주민들에게 시간을 알려주는 구실도 했다. 낮 12시가 되면 산 위에서 대포를 쏘아 응봉산은 오포산(午砲山)으로 불리기도 했다. 1905년부터 1948년 정부 수립 때까지 전국 관측소를 통할하고 일본 중앙기상대, 런던 그리니치 천문대 등과 기상정보를 교환하는 중앙기상대 역할을 했다.

정부 수립으로 서울로 올라갔던 중앙기상대는 한국전쟁과 함께 다시 인천으로 기능을 옮겼다가 1953년 11월 서울로 돌아갔다.

이어 외지인들에게 유명한 월미도를 가려고 반대편 자유공원1길을 거쳐 묏부리길을 지나 솔밭1길을 따라 다시 인천역 쪽으로 걷는다. 이 길에는 오래된 기와지붕이나 슬래브 지붕으로 된 작고 낡은 집들이 빼곡히 자리 잡고 있다. 소시민들의 삶이 느껴지는 작은 집들 사이로는 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만큼 좁은 골목이 굽이굽이 이어진다. 그런 모습을 뒤로 하고 인천역으로 내려가 버스(2, 15, 23, 45번)를 타고 월미도로 향한다.

 인천의 대표적인 관광지
 

모노레일이 들어선 월미도 문화의 거리

 월미도(月尾島)는 예나 지금이나 대표적 관광명소이다. 한때 "인천은 몰라도 월미도는 안다"는 말이 나돌 만큼 세상에 널리 알려졌던 곳이다. 인천의 상징인 셈이다. 일본인들의 글에서도 월미도가 얼마나 아름다웠는지를 알 수 있다.

"봄에는 앵두꽂, 철쭉꽂이 아름답게 물들이고, 여름에는 신록이 짙어가는 가운데 반딧불이 날아다니는 저녁 풍경을 볼 수 있다. 가을에는 단풍이 비단처럼 아름다운 풍경은 어디에 비할 바 아니다."(인천항, 1931년)

월미도는 본디 이름 그대로 섬이었다. 섬의 모양이 반달 꼬리를 닮았다는 월미도의 또 다른 이름은 '얼미도(孼尾島)'였다고 전해진다. 첩(妾)의 자식을 뜻하는 '얼'자와 꼬리를 의미하는 '미'자를 썼다고 한다. 1750년대 편찬된 <해동지도>에 표기된 얼미도는 월미도가 근대 이후 겪을 영욕과 고난에 맞닿아 있다.

월미도는 인천 개항 이전부터 제국주의 열강들의 각축장이었다. 미국의 조선 찬탈 계략(신미양요, 1871년), 일본의 운요호 사건(1875년) 등 열강들의 조선침략 교두보 확보에서 월미도는 늘 그 중심에 서 있었다. 1866년 병인양요 당시 한성을 침탈하려고 황해에 이른 프랑스 함대는 월미도를 발견하고, 해도(海圖)에 함대 사령관인 해군제독 '로즈'의 이름을 따서 '로즈 아일랜드'로 적기도 했다.

월미도가 지금처럼 육지와 연결돼 유명세를 띤 것은 인천 내항의 갑문(閘門) 설치에서 찾을 수 있다. 한일합병 이후 1918년 북성동에서 길이 1km, 왕복 2차선의 제방 둑길이 놓인 것이다. 회주도로를 뚫고 그 주변에 벚나무와 아카시아를 심어 풍치지구로 지정했다고 한다.

1920년 북쪽 해안에는 오늘날 해수탕격인 조탕(潮湯)을 비롯해 해상요정인 용궁각, 야외극장, 목조 호텔, 하계야영캠프촌 등 유흥 오락시설이 줄지어 들어섰다. 조탕의 물은 그냥 바닷물이 아니라, 지하 암반층에서 바닷물과 성분이 비슷한 지하수를 끌어올린 후 이를 끓여 목욕물로 사용했다고 한다.

당시 철도국에서는 서울서 인천역까지 특별열차를 관광 상품으로 내놓을 정도였다. 그 때 이런 월미도에 한 번 놀러가 보지 않은 사람은 '촌놈' 취급을 받았다고 한다. 그만큼 조선의 대표적 유원지로 전국에 이름을 날린 곳이다.

한국전쟁을 겪으며 잠시 관광지로서 위기를 맞았으나, 1987년 ‘문화의 거리’가 조성되면서 대표적인 만남의 장소로 새롭게 태어났다.

버스를 타고 월미도로 가는 길에 눈에 들어오는 야트막한 산이 월미산이다. 월미산은 한국전쟁 이후 2001년 개방 전까지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어 일반인들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다. 개방 이후 공원화가 진행되며 산책로를 설치하고 전망대와 이민사박물관, 전통 정원 등이 들어서면서 시민들의 휴식처로 바뀌었다.

평탄한 산책로를 따라 산 정상으로 올라간다. 군수물자 창고정도로 쓰였을 벙커 한 두 곳을 제외하면 이곳이 불과 10년 전만 하더라도 군부대가 주둔했었다는 사실을 알 길은 없다. 20분 남짓 걸어 전망대에 올라서면 인천 앞바다에 점점이 흩어져 있는 섬들과 북성동 일대가 한 눈에 들어온다. 영종도 인천국제공항과 공항 관련 시설들도 잡힐 듯 가까이에 놓여 있다.

월미산을 내려와 1.5㎞ 가량 들어가면 만나는 월미도는 문화의 거리와 친수 공간 등 젊은이들의 데이트 코스였던 이전 이미지 그대로다. 새로운 놀이 시설이 들어선 것과 횟집과 카페 간판이 깔끔하게 바뀐 것을 제외하면 1980년대 초 조성된 이후 여전한 모습이다.

자기집 회가 신선하고 맛있다고 선전하는 한 아주머니는 "날씨가 추워지면서 월미도를 찾는 사람들이 조금 줄었지만 그래도 주말에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곳"이라며 월미도가 관광명소임을 자랑한다.

월미도에서 이전과 다른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해안선을 따라 설치된 모노레일이다. 지난 여름 시험운전에 들어간 월미은하레일은 우리나라 최초의 도심형 모노레일로 월미도를 거쳐 월미산을 한 바퀴 도는 관광열차다. 안정성 문제가 제기되는 등 탈도 많았지만 2010년 초 개통되면 새로운 볼거리가 하나 더 생기는 셈이다.

물어물어 찾는 ‘똥마당’

아는 이들만 찾는 북성동의 명소 북성부두

 북성동 지역이 차이나타운이나 월미도처럼 관광명소만 있는 게 아니다. 인천에서 오래 산 사람이면 일명 '똥마당'이란 곳을 들어서 안다. 지금의 '북성포구'를 일컫는 말이다.

월미도를 뒤로 하고 다시 인천역으로 발길을 돌려 중봉로를 따라 동구 만석동 쪽으로 가다보면 북성포길과 만나게 된다. 그 길을 따라 250여 m만 들어가면 대한사료 공장 옆쪽으로 폭 2m 정도의 좁은 길을 만난다. 그 곳이 북성포구로 들어가는 진입로다.

한여름과 한겨울을 제외하고 하루 평균 대여섯 대의 배가 들어오는 이곳은 포구라고 하기에 민망할 만큼 작고 보잘것없다. 하지만 깨끗하고 발전된 도심 속 모습이 아닌 1960~70년대 부둣가를 떠올리는 장년층이라면 물어물어 찾는 숨은 명소다. 배 위에서 갓 잡아온 생선을 흥정할 수도 있다.

이곳에는 지금도 소탈한 모습을 한 예닐곱 곳의 횟집이 좁은 부두 길 한켠에 자리 잡고 있다. 영화 ‘고양이를 부탁해’에서도 등장했던 이곳은 허름한 듯하면서도 예전의 향수를 느낄 수 있는 작은 포구다. 부두 풍경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이 자주 찾는다고 한다.

중구 북성동은 이처럼 인천을 대표하는 관광지가 밀집된 지역으로 앞으로도 많은 외지 사람들이 인천의 모습을 느끼려고 찾을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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