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발은 먼지를 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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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발은 먼지를 신었다
  • 최일화
  • 승인 2020.02.21 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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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시단]
류인채 시집 《계절의 끝에 선 피에타》를 읽고 - 최일화 / 시인

류인채 시인의 네 번째 시집 《계절의 끝에 선 피에타》를 읽는다. 엄숙하고 경건한 시집의 제목은 시 <물길>에 있는 시구에서 가져온 것이다. 연어의 일대기를 보며 어머니의 삶을 되돌아본 내용에 피에타를 결부시켜 어머니의 사랑과 희생을 표현한 작품이다.

이번 네 번째 시집엔 생의 고비마다 얽혀 있는 가족사가 여러 시편에 나타나 있다. 가족들의 이야기를 다루면서 항상 결부되어 있는 것이 신앙이다. 여러 편에서 가족 관련 내용과 신앙 관련 내용이 함께 녹아 있는 걸 보면서 시인의 삶의 궤적과 삶의 지향 점을 읽을 수 있다. 수록된 56편 시 중에서 가족과 신앙 관련 시가 28편으로 수록 작품 중 절반이다.

러시아 여행과 국내 여행을 하면서 시상을 얻은 시도 몇 편 있고 꽃과 자연을 소재로 한 시, 그림이나 조각 등 예술 작품을 소재로 한 작품도 있다. 그리고 20여 편의 시는 일상생활 속에서 접하는 사물이나 현상에서 얻은 깨달음을 시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한때는 문단의 조로현상(早老現象)을 지적하는 사례가 있었으나 요새는 80대 90대 현역 문인들이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오륙십 대 시인에게 어떤 호칭을 붙이기엔 아직 이르다. 류인채 시인의 경우도 중진 혹은 원로시인이란 호칭을 붙이기보다는 왕성한 작품 활동을 이어가는 현역 시인으로 보는 게 타당하다. 그렇긴 해도 이번 시집엔 자전적인 요소가 작품에 많이 녹아 있어서 그동안의 작품 활동을 총 정리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고향과 신앙은 시인에게 변함없는 시의 원천이다. 많은 작품에서 두 가지 주제가 집중된 것을 보면 일단 시세계를 한번 정리하고 다음 단계를 준비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어느 시인도 앞으로 전개될 자신의 시 세계를 예단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류인채 시인의 좀 더 원숙한 경지를 기대하면서 3편의 시를 살펴보기로 한다. 가족 관련 시 1편과 신앙 관련 시 그리고 일상 속에서 얻은 깨달음의 시 1편을 텍스트로 삼았다.


아버지의 새끼줄

맨손의 아버지 지푸라기를 고르신다
흙 바람벽, 면벽의 아버지
하늘에 빌듯이 두 손바닥을 비벼 새끼를 꼬신다
아버지의 엉덩이 밑에서 꼬인 등나무 줄기처럼 길어지는 새끼줄
동생과 나는 그 꼬리를 타고 논다

음치인 아버지 ‘꿈꾸는 백마강’을 부르신다
우리는 낄낄대며 아버지의 꼬리로 서로의 몸을 묶기도 하고
활시위처럼 튕겨보기도 한다
잃어버린 옛날이 애달프다는 아버지의 꼬리가 잠시 헝클어진다
청상과부인 할머니의 막내아들
폐병쟁이 큰형 대신 새끼를 꼬았다
소학교를 마치고 더는 배우지 못했다고 말할 때마다
떨리는 것 같던 그 손으로 새끼를 꼬신다

등잔불에 바투 앉아 바느질하던 어머니
“저리 가서 놀아라” 나무라신다
저리 가서 놀 데가 없는 귀는 들리지 않는다
‘앵두나무 처녀’를 부르다가 힐끗 돌아보는 아버지
“야야, 너무 세게 당기지는 마라”
석유 등잔 심지 돋우는 사랑방에
흥청흥청 매듭도 없는 꼬리를 계속 늘리신다

닭들이 횃대에 올라 잠이 드는 시간
매듭달이 뜨고 간간 개 짖는 소리 들리고
닳고 닳은 아버지의 손바닥이 달빛에 거울처럼 빛난다
아버지가 문득 손을 멈추고 꼬리를 간추리자
희미한 등잔 아래 똬리를 튼 등나무 줄기들

그 저녁 아버지는 가늘고 긴 꼬리 가득 우리의 길을 만들어놓으셨다



이 시를 읽으면서 정지용의 <향수>가 떠올랐다. 시가 자아내는 분위기가 향수를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첫째 고향과 아버지를 떠올리는 회고조의 문체가 그렇다.

<향수>에서 지용은 고향의 여러 정경 속에 아버지, 아내, 누이를 등장시켰다면 류인채의 시에선 고향이라는 넓은 공간보다는 고향집이라고 하는 다소 제한된 공간에서 유년을 떠올리고 있다. <향수>에서와 마찬가지로 아버지, 어머니, 동생 등 가족이 등장하고 있다. <향수>가 좀 더 활달한 상상력이 동원된 남성적 세계가 드러나 있다면 <아버지의 새끼줄>에서는 가정 안에 가족들이 등장하여 안온한 시적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 밤이라고 하는 시간적 배경도 동일하다.

<향수>에서 가족 관련 중심 시행을 고르라면 “엷은 조름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짚 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이 되지 않을까. 아버지가 짚 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은 바로 아버지의 공간으로 아버지가 새끼를 꼬시고 가마니도 짜던 공간이다. <아버지의 새끼줄>의 주제는 유년의 추억과 아버지의 희생이고 <향수>의 주제는 고향 산천과 어린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다. 새끼를 꼬시는 아버지와 짚 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아버지는 오버랩 되면서 동일한 시적 이미지를 만들고 있다.

이 시에 ‘바람벽’이라는 시어가 등장한다. ‘바람벽’은 백석의 시어다. 백석의 시어를 차용했다는 점은 류인채가 “백석과 정지용의 시적 언술”을 비교 연구하여 학위를 받았다는 점과 무관하지 않을 것 같다. 시인은 많은 경우 다른 시인의 영향을 받는다. 무의식적으로 영향을 받기도 하고 의식적으로 창조적 모방의 단계를 거치기도 한다. 정지용의 <향수>는 스티크니의 <므네모시네>의 모방, 아니 창조적 모방 작품으로 학계에서는 보고 있다.

스티크니(1874~1904)는 서른 살의 젊은 나이로 요절한 미국 시인이다. 1955년 시인 김현승은 한 출판사로부터 ‘가을을 맞이하여 가장 생각나는 시’라는 제목의 수필을 청탁

 

받는다. 여러 편의 시를 인용하면서 <추억>이란 시를 소개하고 있는데 이 <추억>이 바로 스티크니의 <므네모시네>를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김동욱의 「부조리의 포도주와 무관심의 빵」에서) 김현승이 소개한 <추억>을 읽어보면 지용의 <향수>와 매우 흡사하다. 어떤 연구자가 표절이라고 주장할 만큼 유사하다. 그러나 김동욱 교수는 스티크니의 시가 광산에서 막 채굴해낸 원광석이라면 정지용의 작품은 빛을 내뿜는 금강석이라며 지용을 옹호하며 찬사를 보내고 있다.

1927년 조선지광(朝鮮之光)에 <향수>가 발표되었는데 제작 연대는 1923년으로 알려져 있다. 1923년이면 정지용의 나이 22세 때이다. 언제 스티크니의 작품을 읽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휘문고보 시절 직접 영시를 읽었거나 김현승이 <추억>이라는 제목으로 번역한 <므네모시네>를 읽었을 개연성, 혹은 일본 도지샤 대학 유학시절에 원문으로 읽었을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그런 면에서 류인채의 <아버지의 새끼줄>은 적어도 한국 시사의 가장 빛나는 두 작품<흰 바람벽이 있어>와 <향수>에서 그 분위기와 시어에서 영향 받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 저명한 평론가는 한국 100여년 詩史에서 가장 훌륭한 작품 1편을 뽑으라면 백석의 <흰 바람벽이 있어>를 뽑겠다고 했다. 정지용의 <향수>는 국민들로부터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작품 중 하나다. 거의 일세기 전의 두 명편에서 현대의 시가 시어와 그 시적 분위기에서 다소 영향을 받았다는 점은 우리 시가 어떤 과정을 거쳐 상호 영향을 주고받으며 계승 발전해 가는지를 가늠해볼 수 있는 한 예가 된다.


맨발

 

맨발은 먼지를 신었다
먼지는 그의 신발이 되어 함께 걸었다

사막에서 금식하던 사십 일간
떨기나무 삭정이와 돌부리와 뱀 허물을 신었다
물 위를 걸을 때는
풍랑을 신었다 물거품을 신었다
마음이 가난하고 슬픈 자는 복이 있나니, 외치던 날은
뜨거운 바위 위에
여우 오줌 위에
맨발이 얹혔다

어떤 이들은 자기 옷을 벗어 바닥에 깔아 주었다
또 어떤 이들은 침을 뱉었다
골고다 언덕에
사람들의 저주를 신고 오르던 맨발,
자신의 피 묻은 흙도 신게 되었다

마침내 십자가에 못 박혀 세상의 모든 신발을 벗었다
사람들은 그제야 돌아서서
그의 맨발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었다



<맨발>은 수록된 여러 신앙 시 중 하나다. 여기서 ‘맨발’은 예수가 걷던 길을 상징한다. 맨발이 먼지를 신었다는 말은 험한 곳, 위험한 곳, 헐벗고 가난한 곳, 모욕과 배반의 길을 가리지 않고 걸어간 예수의 행적을 나타낸다. 사막에서 사십일 간의 고행을 거론하며 떨기나무 삭정이와 돌부리와 뱀허물을 신었다 하고 물 위를 걷던 기적을 나타내며 풍랑과 물거품을 신었다고 말한다. 산상수훈을 외치던 날은 산짐승 여우의 오줌을 밟고 섰다는 표현이 나온다.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오를 때 어떤 이는 옷을 벗어 바닥에 깔아주고 어떤 이는 침을 뱉었다 하여 예수가 비난과 모욕을 받은 일을 저주를 신었다 하고 자신의 피 묻은 흙을 신었다고 표현했다.

그러나 마지막 연에 이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 하늘의 영광을 입는 예수의 모습을 보여주어 극적인 반전 효과를 얻고 있다. 모든 것을 ‘신다’로 나타내어 표현의 생소함 때문에 다소 생경스럽기는 하지만 결코 어려운 시는 아니다. 예수가 걸어간 길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면 금세 시의 함의는 파악된다. 엄청난 마귀의 유혹을 받고 제자들로부터 배신을 당했으며 상상할 수 없는 모욕과 고문을 당하고 고통스럽게 죽임을 당한 예수, 그러나 이 모든 행적은 마지막 구원 사업에 모아져 그 영광을 드러내는 바탕이 된다.

단순히 예수의 행적을 객관적으로 노래했다면 그것은 시가 되지 못한다. 시 속에 시인 자신의 신앙이 투영되고 시인의 삶과 철학이 반영되어 있어야 개성을 갖춘 한 편의 시가 된다. 이 시는 예수의 행적을 객관적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시인 자신이 지향하고 있는 삶의 방향성을 나타낸 것이다. 지상에서의 최고의 가치를 기독교적 진리에 두고 그 방향을 따라 걷고 있는 화자의 모습을 이 시에서 발견하게 된다. 비교적 단순한 교리의 문제를 아주 낯선 표현을 사용하여 시적인 긴장감과 신선한 감동을 안겨 주고 있다.


나를 찾아보다

현관 앞에서
가방을 뒤지고 호주머니를 뒤집고
자동차 키를 찾고 있었다

신발장도 열어보고
옷장도 열어보고 서랍도 쏟고
바늘귀도 들여다보았다

주방에 떨어진 발소리를 뒤지고
욕실에 흘러넘치는 물소리를 뒤지고
밖으로 나가
바람의 뼈도 만져보고
붉은 단풍의 뒷면까지 훑었지만
보이지 않았다
그곳에는 먼지와 얼룩만 있었다

없다
나를 밀고 갈 나를 잃어버리고 허둥거리는
추운 저녁
순간 내 어깨 위에서 자동차 한 대
어둠 속으로 팔랑팔랑 날아간다



이번에 일생 생활 속에서 발견한 깨달음의 시 한 편 읽어 보자. 류인채의 가족 관련 시에 신앙적 요소가 포함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상을 소재로 한 시에도 많은 경우 기독교적 사상이 내포되어 있다. 그 점을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한다.화자가 지금 찾고 있는 것은 자동차 키다. 자동차 키를 찾기 위해 집안 구석구석은 물론 바깥까지 샅샅이 뒤졌으나 자동차 키를 찾지 못한다. 자동차 키를 찾는 것은 바로 나를 찾는 것이다. 이 때의 나는 자동차라는 물질을 추구하는 나다. 자동차 키는 자동차와 연결되어 있고 자동차는 목적지와 관련이 깊다. 자동차를 타고 목적지를 찾아가는 것은 나의 욕망이 그곳을 향하고 나의 목표가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그 욕망의 목표 지점을 찾아가야 하는데 그 수단인 열쇠를 찾지 못하고 있는 화자의 난처한 상황, 화자는 바로 물질적 욕망을 따라 줄달음질치는 현대인의 모습이다. 어서 욕망을 좇아 목표 지점에 가야 하는데 그 수단인 키를 잃어버린 상황, 곧 목표를 잃고 방황하는 현대인의 자화상이다.

끝내 키를 찾지 못한 화자의 어깨 위로 자동차 한 대가 나비처럼 날아올랐다고 하는 것은 곧 목표의 상실이며 하나의 목표가 다른 목표로 이행되는 현상 곧 다른 목표를 설정해야 할 분기점에 다다랐음을 보여 준다. 욕망을 충족시켜줄 자동차 키를 분실하고 화자는 어떤 행보를 취할까.모든 예술과 신앙은 결핍에서 출발한다. 처음부터 완벽하게 제 조건이 구비된 상황에서는 예술과 신앙이 태동될 수 없다. 자동차라고 하는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욕망을 상실한 화자가 나아갈 출구는 이제 자명하다. 존재의 의미를 찾아 행보를 이어가지 않을까. 나비라고 하는 상승의 이미지가 그 방향을 가늠케 한다. 현대에 와서 가치의 전도 현상이 심각하지만 물질이라고 하는 세속적 가치는 신앙이라고 하는 절대적 가치에 비하면 하위 개념이다. 그 가치의 충돌 지점에 이 시가 위치하여 화자의 상황을 나타내고 있다.

*류인채: 충남 청양 출생. 인천대학교 대학원에서 「정지용과 백석의 시적 언술 비교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음. 2014년 제 5회 『문학청춘』 신인상 수상. 2017년 제 9회 《국민일보》 신춘문예 대상 당선. 시집 『소리의 거처』 『거북이의 처세술』 출간. 2914년 제 26회 인천문학상 수상. 경인교대, 성결대, 유한대, 인천시교육청 평생학습관 등에서 시와 글쓰기와 자서전 쓰기를 강의하고 있음. 2080moo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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