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미’라는 오브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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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미’라는 오브제
  • 정민나
  • 승인 2020.02.27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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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나의 시 마을]
가수 승미 - 문계봉

 

가수 승미

                   - 문계봉

 

그녀는 불모지 위에 피어나는 들꽃

몰락하는 왕국의 마지막 사관(史官)

갇힌 새장 속에선 울지 않는 카나리아

오래된 그림의 당당한 얼룩

멈춘 시간 위를 날아가는 그리움의 화살

 

때로는 순명(順命)하는 꽃들의 비장함으로

때로는 저 들판의 바람 소리로

 

가수 승미가 실재하는 인물인지 가상의 인물인지는 알 수 없으나 시인은 제목을 가수 승미로 정하고 승미의 모습, 승미의 성향, 승미의 특정 행위를 명제로 시를 써내려 간다. 이러한 제시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가수 승미는 적어도 시인이 볼 때 거칠고 메마른 땅에 피어나는 들꽃 같은 존재이고, 몰락하는 왕국에서 왕을 지키는 사관생도 같은 인물이다. 만약 실재하는 승미가 있다면 승미를 아는 모든 사람이 가수 승미를 이렇게 단정할 수 있을까? 있다면 그런 그녀를 시인처럼 사랑하게 될까?

 

이쯤에서 독자는 독자 나름으로 상상의 시를 써내려 간다. 시인이 이런 정의를 내릴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일까? 가수 승미는 노래를 잘 불러 시적 화자의 아픈 마음을 위무하였기 때문일까? 화자의 사적인 애인이 되어 이라는 남성적 힘을 상징적으로 되살려 주는 역할을 해 주었기 때문일까. 아무려나 이 시에 등장하는 가수 승미는 시인이 사랑할 수밖에 없는 존재임에 틀림없는 것 같다. 갇힌 새장 속에서 울지 않는 카나리아, 오래된 그림의 당당한 얼룩, 멈춘 시간 위를 날아가는 그리움의 화살 같은 승미.

 

시인은 가까운데서 가수 승미라는 천연적인 시의 소재를 찾은 것 같다. 그럼에도 단서는 많이 주지 않는다. 승미 같은 가수? 가수 같은 시인? 시인 같은 들꽃?, 들꽃 같은 새들?, 얼룩들?…… 궁금해 하는 독자가 있고 아직 밝혀지지 않은 승미가 있다. 승미를 열 수 있는 키를 시인이 갖고 있으므로 승미라는 수수께끼를 스스로 찾아 나서는 독자가 있다.

 

시적 화자가 사랑하는 승미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 꿋꿋하게 순명하는 존재이다. 고전적인데 당당하고, 들꽃 같은데 비장하고, 새장 속에 갇힌 새인데 자유스러운 승미…… 순명(順命)하는 꽃들의 비장함이란 이런 것일까?

 

오래된 그림의 얼룩은 대대로 내려오는 우리네 어머니의 모습을 하고 있다. 참고 인내하면서 당면한 환경이나 현실을 의연하게 받아 안는. 오늘을 사는 가수 승미의 모습에도 이런 태고 적 부터의 여성성이 비춰 보인다. 하여, 저 들판의 바람 소리로 다가서는 승미. 그리움의 화살로 날아오는 승미는 시적 화자가 찾아 헤매는 오래된 시적 오브제가 아닐까.

 

새장 속에서 울지 않는 카나리아나 오래된 그림의 당당한 얼룩은 시적 화자가 바라보는, 대상이 지닌 고유한 성질이나 품성을 말한다. 또한 멈춘 시간 위를 날아가는 그리움의 화살은 시적 화자나 시적 대상을 공통으로 지칭하는 오브제로 그런 객체와 주체를 동일화 시킨 감정일 수 있다.

 

하지만 이 시에 나오는 승미를 여러 번 읽어도 승미는 단일한 인물로 다가오지 않는다. 혹시 시인은 지상에 존재하지 않는 승미를 노래한 것은 아닐까? 시인이 평소 좋아하는 여성성을 시적 대상에 투사하여 원 없이 그의 여성들을 불러낸 것은 아닐까. 그러므로 시인에게 가수 승미가 실재로 어떤 존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런 시적 대상을 통해 시인은 자신의 이상향을 노래한 것인지도 모르니까.

 

시인 정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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