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말, 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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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말, 아서
  • 윤희자
  • 승인 2020.03.06 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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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칼럼] 윤희자 / 인천노인종합문화회관 회원

 

‘아서’는 어린 날 아버지께 가끔 듣던 말이다.

뒤뜰 터주까리가 궁금해서 볏짚으로 엮은 이엉을 들추고 그 안을 보여달라고 조르면, 아버지 정강이에 숭숭 돋아난 다리털을 뽑으려 하면, 문지방에 올라서면, 아버지는 훈풍 같은 목소리로 “아서!”라고 하셨다. 우리 옆집 순자 아버지는 순자나 순자 동생 마사오가 잘못을 저지르면 이웃이 다 들릴 만큼 거칠고 큰 목소리로 나무라며 회초리를 드는데 우리 아버지께서는 한 번도 목소리를 높이거나 회초리를 든 기억이 없다.

 

나는 어릴 때 잔병치레로 부모님 애를 태웠다. 조금 놀라면 경기를 했고 여름이면 학질을 달고 살았다. 어머니의 이층 장롱 서랍엔 항상 붉은 영사와 노르스름한 금계랍이 있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일이다. 그날 내가 몹시 아파보였던지 선생님이 조퇴를 시키셨다. 집은 10리길. 한 시간 거리를 타박타박 걸어 고능리 벌판을 지나 마봉재 산길로 접어들었을 때였다. 갑자기 정수리 위로 노란 해가 떨어지는 것 같더니 정신이 아득해졌다.

잠에서 깨듯 눈을 뜨니 머리맡에 어머니와 아버지가 나를 지켜보고 계셨다. 찬 물수건이 이마에 얹혀있고 어머니는 나를 보듬어 안으며 울음을 터뜨리셨다.

“우리 애기 착하다, 우리 애기 착하다”

붉게 충혈된 눈으로 나를 들여다보시며 어머니는 이 말씀만 되풀이 하셨다. 어머니는 옆집 오빠가 하굣길에 마봉재 길섶에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나를 업고 왔다고 한다. 찬물수건으로 온 몸을 씻기고 이마에 물수건을 얹어도 한동안 깨어나지 않아 팔다리를 주무르던 차에 내가 눈을 떴다고 하셨다.

 

뱀도 많고 독충도 많은 마봉재에서 땡볕에 정신을 놓은 딸이 목숨을 부지한 것은 부처님 음덕이라 하셨다. 이튿날 어머니는 쌀을 담은 조그만 보퉁이를 이고 20리가 넘는 고려산 백년사 부처님 전에 치성을 드리고 오셨다.

그 일이 있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늘 물주전자와 먹을 것을 들고 마봉재까지 마중을 나오셨다. 안산이 큰 고개 아름드리 소나무 아래 앉아 맛나게 먹던 찐감자, 수수팥떡, 어느 날은 귀한 계란까지. “늙막에 낳아 애가 허약하다”며 아버지는 측은한 듯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이 기억들은 내 가슴에 금석문처럼 새겨져 70년이 지난 이날까지 한 획도 훼손되지 않고 살아있다.

 

내 나이 20대 초반에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이런 저런 일을 겪으며 안산이 고개 소나무 아래 앉아 있노라면 근심어린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시는 아버지가 떠올라 그리워 한 날이 많았다.

홍예문 예식장에서 결혼식을 올리던 날, 24살 위 오빠가 나의 손을 잡고 식장으로 걸어갔다. 혼주석에 바싹 마른 어머니가 아버지의 빈 의자 옆에 앉아계신 모습에 울컥 가슴이 떨렸다. 아버지가 계셨다면 저리 쓸쓸해 보이지는 않았을 텐데…. 삼켜도 눈물은 사정없이 볼을 타고 흘렀다. 아버지가 떠나신 후 이 날처럼 처연하게 쓰린 날은 없었다.

새댁인 내가 사냥거리 채마 밭 밭고랑에 떨어진 돌맹이를 톡 차는 보습을 보고 신랑은 “아서, 발 다치면 어쩌려고” 걱정스럽게 말하였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처음 듣는 말 ‘아서!’가 그리운 목소리로 내게 돌아왔다. 중매로 결혼하여 남편과 아직은 서먹한 마음의 장막을 아서라는 말 한마디가 말끔히 걷어내었다. 부족한 딸을 두고 떠나시며 당신 닮은 짝을 채워 달라는 간곡한 원이 신에게 닿았는지 남편은 친정아버지를 많이 닮았다. 술을 마시지 못하는 것도, 과묵한 것도, 나를 걱정해 주는 마음까지.

 

결혼 전 어머니께서 남편에게 하신 당부가 있다.

“무서움을 많이 타는 우리 딸아이에게 절대 악 쓰지 말게”

다행이 남편은 천성이 큰소리를 내는 사람이 아니여서 나를 놀라게 한 기억이 없다.

한 달 전 남편은 허리 디스크가 갑자기 악화되어 수술을 받았다. 일주일 후 퇴원을 하고 지금은 집에서 요양 중이다. 음식도 신경 쓰지만 움직이는 것이 자유롭지 못해 머리 감기고 발 닦는 것이 내 담당이다. 잔병치레로 평생 남편 힘들게 했으니 보답을 하리라 힘을 내는데 남편이 “아서 그러다 어지러움증 도지겠어” 하고 또 정감있게 말한다. 세상에 따뜻한 말이 많지만 아서라는 말보다 따스한 말을 나는 아직 듣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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