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방에 있던 모두를 처벌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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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방에 있던 모두를 처벌할 것
  • 박교연
  • 승인 2020.04.07 09: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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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중성’과 ‘확실성’의 실패 - 조주빈 체포 후에도 등장하는 채팅방
[여성칼럼] 박교연 / '페이지터너' 활동가

모바일 메신저 텔레그램을 통해 미성년자를 포함한 74명의 여성을 협박하여 강제로 영상을 찍고, 불법촬영 영상을 판매한 ‘텔레그램 n번방’이라 불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3월 25일에는 지난해 9월부터 악질적으로 여성을 착취한 박사, 조주빈의 얼굴이 공개됐다. 조주빈은 공개석상에서 “멈출 수 없었던 악마의 삶을 멈추게 해줘서 정말 고맙다”고 말했지만, 조주빈과 n번방에 참여한 수많은 가해자들은 절대 태생이 악마라서 이런 일을 벌인 게 아니다. 이런 일을 가능하게 하는 사회구조와 법적 부조리가 없었다면, 포르노를 위시한 여성멸시문화가 없었다면 악마는 결코 탄생하지 않았다.

텔레그램 n번방의 용의자 전원의 신상을 공개해달라는 국민청원은 237만 국민의 동의 얻어 역대 최다의 기록을 세웠다. 청원자는 “이러한 범죄의 관리자, 공급자만 백날 처벌해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다”면서 “이러한 형태의 범죄는 수요자가 있고, 수요자의 구매 행위에 대한 처벌이 없는 한 반드시 재발하고 또다시 희생양들이 생겨날 것”이라며 전원 신상공개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청원과 달리 경찰은 확실하게 ‘박사’, ‘직원’, ‘유료회원’, ‘단순이용자’들로 나누어 범죄요건을 입증할 예정이다. 유료회원은 불법영상물 착취와 제작에 필수적인 역할을 했지만, 단순이용자는 법적으로 그와 동등한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다고 보고 있다. 황교안 미래통합당 대표도 지난 1일에 같은 요지의 발언을 했다. “(n번방 참가자 중) 호기심에 들어왔다가 막상 보니 적절치 않다 싶어서 활동을 그만 둔 사람에 대해서는 판단이 다를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건 그 방에 입장하기까지의 착취에 기여한 맥락과 과정을 깡그리 무시한 발언이다.

N번방 강력처벌을 요구하는 “그 방에 입장한 너희 모두 살인자다” 시위의 문구처럼, 그 방에 입장하여 피해자의 고통을 뜯고 맛보고 즐긴 모두를 처벌하지 않는다면 언제든 또 다른 피해자는 나올 수 있다. 조주빈이 체포된 이후에도 3월 28에 N번방에 있었던 불법촬영영상이 ‘유품’이라는 이름 등으로 여러 채팅방에 버젓이 공유됐다. 심지어 4월 초에는 ‘우리가 박사다’라고 이름 붙은 텔레그램 비밀방도 생겼다. 참여자 167명은 “사법기관이 국민의 혈세로 무용지물 티에프(TF)팀을 만들어 국민의 메신저 텔레그램을 사찰하고 불법 감시하며 텔레그램 이용자는 성범죄자라는 프레임을 씌우고 있다. (성착취물의) 구매 및 단순 관람의 자유를 높여야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이 이런 주장을 당당하게 하고 있는 근저에는 본인이 잡히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과 설령 잡힌다 해도 처벌 수위가 낮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이런 믿음을 배상훈 프로파일러는 “소라넷, 양진호 사건 등 디지털 성범죄 사건들이 떠들썩해도 결국 몇 명밖에 처벌되지 않았던 걸 보고 얻은 학습효과”라고 설명했다. 그는 “지금까지 디지털 성범죄의 경우, 잡히면 중형을 받는다는 ‘엄중성’과 형량은 낮더라도 반드시 잡힌다는 ‘확실성’ 모두에 실패했다”며 이번에는 반드시 달라야 한다고 당국의 강경한 대응을 촉구했다.

김재련 변호사도 “그동안 온라인 성범죄는 잡는다고 해도 수사기관이나 법원에서 주로 10~20대인 피의자들의 사정을 참작해 관대하게 처벌했다”고 현 실태를 지적했다. 실제로 성범죄 판결을 보면 징역형이 나오는 경우가 거의 없고 거의 대다수가 벌금이나 집행유예 선고다. 이 모든 건 수사기관이 ‘피해자의 이익’에 큰 관심이 없고, 법원은 ‘피고인의 이익’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이다. 장윤미 한국여성변호사회 공보이사는 이를 “자신의 영상이 유통될지 모른다는 피해자들의 공포심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인데, 법원은 피고인의 반성이나 성정 등을 기준으로 판결하고 피해자가 얼마나 큰 피해를 입었는지는 크게 고려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판결이 이렇게 피의자에게 유리하게 편중된 이유는, 윤김지영 건국대 교수의 말처럼 우리 사회에 어릴 때부터 성인지 감수성 교육이 시행되지 않고 “여성을 전리품처럼 수집하고 과시하는 방식을 통해 남성 사회에서 인정받는 매커니즘이 통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포르노랜드> 역자 게일 다인스도 서문에서 성교육의 부재와 우리사회에 널리 통용되는 포르노의 위험성을 이야기했다. “포르노 섹스의 핵심은 사랑을 나누는 게 아니다. 포르노에서 남자는 혐오를 나눈다. 섹스가 매번 폄하를 최대치로 전달하도록 설계되기 때문이다. 남자가 음경을 여자의 입에 밀어 넣어 숨을 못 쉬게 하든, 항문을 세게 연타해 빨갛게 드러나게 하든, 포르노 섹스의 목적은 남자가 여자에게 얼마나 큰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것이다.”

그 방에 입장한 모두를 처벌하여 여성을 멸시하고 학대하는 범죄에 동조하는 것조차 잘못이라는 걸 명명백백하게 보여주지 않는다면, 또다시 여기저기에서 멈출 수 없었던 악마가 튀어나올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런 일을 가능하게 하는 사회구조와 법적 부조리가 없었다면, 포르노를 위시한 여성멸시문화가 없었다면 악마는 결코 탄생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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