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의 계급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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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의 계급사회
  • 안태엽
  • 승인 2020.05.19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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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칼럼] 안태엽 / 인천노인종합문화회관 글쓰기반

어느 날 저녁 뉴스를 시청하면서 충격을 받았다. 만화영화 겨울 왕국의 주인공 ‘엘사’가 초등학생들 사이에서는 전혀 다른 단어로 쓰인다고 하였다. ‘엘사’는 LH에 사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주변보다 저렴한 임대 아파트에 사는 사람을 비하해서 이르는 말이라는 것이다. 일본 만화 제목인 ‘기생충’ 역시 ‘기초생활 수급자’를 줄인 말이다. 이뿐만 아니라 돈을 적게 버는 친구의 부모에게는 벌레를 표현하는 ‘충’자를 붙여서 부르기도 한다니 도대체 믿기지가 않는다. 사실, 임대 아파트가 뭔지? 기초생활수급자가 뭔지? 아이들이 어떻게 알겠는가? 어른들이 한 말을 듣고 배우고 따라 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임대 아파트에 사는 아이들이 다니는 초등학교에 내 아이는 보내지 않으려 하고 그 아파트에 사는 아이들과 노는 것도 꺼려하는 어른들을 자녀들은 보고 배우게 된다. 이러한 분위기 때문에 멀쩡한 아파트 이름을 바꾸기도 하고 임대 아파트를 연상시키는 단어를 빼어버리기도 한다. 아이들이 가난한 동네에 산다고 차별을 받을까봐 임대아파트에 산다고 왕따라도 당할까봐 부모들은 걱정을 한다.

어른들은 아이들의 거울이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행동 하나하나를 보며 배우고 자란다. 차별 있는 사회에 사는 것이 너무 속상하다고 가난한 아빠는 말한다. 어른들의 경쟁주의와 물질만능 주의가 동심까지 멍들게 한다고 슬퍼한다. 빈부의 격차 때문에 아이들이 벌써부터 계급 사회를 느껴야 하는 상황에서 그늘진 이웃을 둔 부자 이웃은 과연 행복할 것인가.

나는 사랑을 강조하는 교회 안에서도 이러한 모습을 보며 종종 안타깝다는 생각을 가져왔다. 티없이 맑은 아이들을 가리키며 예수는 천국이 저런 아이들 것이라며 깨끗한 마음을 갖기 원하셨다. 나는 교회학교 중·고등부 후원회에서 봉사를 하며 50여 명의 학부모를 모시고 간담회를 연 적이 있다. 학부모와 학생들은 한 달 4주 동안 부모님은 자녀에게 자녀들은 부모에게 그동안의 고마운 점과 좋은 점에 대해 일주일에 한 장씩 글을 쓰도록 하였다. 서로 어떻게 마음을 나누었는지 부모님의 반응과 자신의 감정을 발표하기로 했다. 이번 기회를 통해 부모님과 아이들이 가까이서 서로를 지켜보며 평소에 보지 못했거나 느껴보지 못한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시간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학부모 간담회하는 날이 돌아왔다. 나는 간담회에서 사용할 대야, 수건, 의자, 물통, 호스, 음악 등을 준비했다. 아이들은 아침에 집에서 보고 나온 부모님을 교회에서 마주 대하며 이산가족이라도 만난 것처럼 소리를 지르며 좋아했다. 잔잔한 찬송가가 배경으로 흐르고 호명하는 학생은 단상 마이크 앞에 나와 그동안 부모님을 관찰하며 느낀 것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이어서 그 학생의 부모님도 단상앞으로 나와 자신의 자녀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아이들과 부모들은 칭찬을 안 하다가 하려니까 처음에는 굉장히 어색한 표정을 지었는데 점차 진지한 표정으로 발표에 임하였다.

한 학생은 편지 쓴 내용을 발표했다. 내용은 이러했다. “엄마, 아빠가 싸웠다. 경찰차까지 올 정도로 격렬하게 싸웠다. 나는 울면서 “엄마 아빠 싸우지 마세요. 나는 어떡하라고요.” 싸움이 끝난 후 아빠는 눈물을 흘리며 미안하다고 했다. 또 어떤 학생은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엄마 미용실 갔다 오니까 예뻐졌어요.” 그러자 엄마는 “야! 이 녀석아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공부나 열심히 해!” 하셨다. 엄마는 속으로는 좋으면서 안 그런 척 하신다. “비가 오는 날 학교에서 집으로 가는데 우산이 없었다. 버스에서 내렸는데 아빠가 마중을 나와 나를 기다렸다. 아빠에게 고맙다고 했다. 멋있는 우리 아빠…“

학생들이 자신이 쓴 글을 다 읽자 이번에는 부모들의 차례가 되었다. 부모님들의 편지 내용은 이러했다. “내가 너무 내 욕심만 부려 너를 쉼 쉴 틈 없이 뺑뺑이를 돌리고 학교에서 학원까지 차에 실어 보내고 차 안에서 도시락을 먹인 것이 마음에 걸렸다. 한밤중까지 너를 힘들게 하고 나의 불안한 마음을 충족시키기 위해 너에게 전가한 것 같아 미안한 생각이 든다…. “공부만을 강요하고 너와의 시간을 못 가진 것을 미안하게 생각한다. 이제부터라도 너와 많은 시간을 가지려고 노력하마 아들아….” “그동안 먹고살기 위해서 너를 학교와 학원에 모든 것을 맡기고 아버지로서 무관심하게 보낸 것 같아 미안하다. 그래도 네가 아무 사고 없이 잘 자라줘서 고맙구나….”

서로의 마음을 다 읽고 난 후 세족식을 거행했다. 부모님들은 신발을 벗고 의자에 앉아있었다. 자녀들은 자기 부모님 앞에 앉아 경건한 손을 들어 부모의 발을 씻긴 후 깨끗한 수건으로 닦아주는 거였다. 부모님의 발을 씻기는 가운데 잔잔한 음악이 흘렀다. 조용한 가운데 진행되는 이 모습에 나 자신도 마음속에서부터 올라오는 뭉클함을 억제할 수 없었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긴 것처럼 진정한 성김의 세족식은 그렇게 끝이 났다.

이 일이 있은 후 얼마동안 아이들은 집안일에 적극 참여하고 부모들은 아이들을 일정한 틀에 끼워 맞추려 하지 않고 나 역시도 부모의 역할을 잠시 돌이켜 볼 것이다. 하지만 무한경쟁시대에 조급한 마음을 가진 부모는 곧 아이들을 채근할 것이고 아이들 역시 쫓기는 마음에 불안하여 새로 출시된 스마트폰이나 유행하는 물건에 집착하는 등 대리만족을 하게 될 것이다.

핸드폰이 나오기 전 삐삐가 막 나올 때 일이다. 그 당시 삐삐는 항상 대기해야 하는 의사나 전문 직업인이 사용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마약을 몰래 사려는 사람이나 파려는 사람, 밀수하는 사람, 불순한 동기가 있는 사람들이 많이 사용했다. 어느 날 중학생인 딸아이가 “아빠 나 삐삐가 사고 싶어.”라고 말했다. 나는 “네가 왜 삐삐가 필요하니?”라고 말했다. “친구들은 다 가지고 있어요. 삐삐 가졌다고 자기들끼리만 어울리고 나를 왕따시키는 느낌이라고!” 하며 딸은 볼멘 소리를 했다.

“물건을 가지고 학생들 속에서 튀고 돋보이면 뭐 하겠냐”고 나는 딸을 설득했다. “그래도 갖고 싶어” 딸아이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했다. “시간이 늦었으니 잠들기 전에 깊이 생각해 보아라,” 나는 전화기 밑에 돈을 놓아두고 방을 나왔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딸은 돈을 가지고 나갔다. 나는 실망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토록 설득했는데 통하지가 않았다는 서운한 생각마저 들었다. 딸아이가 삐삐를 산 뒤, “아빠 나 한데 삐삐 좀 쳐줘!”라고 말했다. 그리고 보름쯤 지난 후에 삐삐는 방바닥에 버려진 상태로 굴러다녔다.

오월은 어버이날이 있는 가정의 달이다. 유교 500년 사상에 우리 부부도 알게 모르게 자식이 부모에게 효도해야 된다는 사상이 몸에 배어 있어 이날만큼은 자식들이 베푸는 효도 행위에 호사를 누린다. ‘효’는 하늘이 준 첫 번째 덕목이지만 ‘나는 얼마만큼 자녀들의 허물에 대하여 오래 참았으며 그들의 실수에 포용하는 마음을 가졌던가’ 돌아보게 하는 계절이다. 아이들의 거울인 나는 이제 진정한 어른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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