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 속 위기, 자가격리와 가정폭력
상태바
위기 속 위기, 자가격리와 가정폭력
  • 박교연
  • 승인 2020.06.03 06:3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여성칼럼] 박교연 / '페이지터너' 활동가

지난달 5월 26일에 서울역의 한 아이스크림 전문점 앞에서 신원불명의 남성이 30대 여성을 아무런 이유 없이 폭행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피해자는 “내가 건장한 남자였거나 남성과 같이 있었다면 과연 이런 사고를 당했을까”라며 SNS에 억울함을 호소했다. 피해자의 의문은 괜한 억측이 아니다. 지난해 7월 통계청이 발표한 ‘2019 통계로 보는 여성의 삶’을 살펴보면, 2017년 절도·살인·강도·성폭력 등 형법상 주요 범죄 중 여성 성폭력 피해자는 2만 9272명으로 남성 피해자 1778명보다 16배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강남역 살인사건 때도 그랬지만, ‘묻지마 폭행’의 주요 대상은 분명히 여성이다. 강남역 살인사건의 가해자는 여섯 명의 남성을 지나치고 여성만을 기다려 범행을 저질렀다. 서울역 폭행사건의 가해자 역시 서울역을 오가는 무수한 행인 중에서 혼자 있는 30대 여성을 특정하여 폭행했다. 한낮에 공공장소에서 여성을 폭행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여성혐오적인 생각이 사회에 만연하지 않았다면, 이는 결코 발생하지 않았을 일이다.

강남역 살인사건 당시 10번 출구에 붙은 포스트잇 1004장의 내용을 전수조사 했을 때, 추모의 메시지를 제외하면 ‘운 좋게 살아남았다’는 생존에 관한 메시지가 가장 두드러졌다. 이처럼 여성에게 생존과 안전은 가장 중요한 문제다.

코로나의 세계적인 확산 이후, 유엔인구기금(UNFPA)의 라미즈 알락바로프 사무차장은 지난 4월 미국 CBS뉴스에 나와 “가정폭력이 세계적으로 증가세”라며 “위기 안의 또 다른 위기가 자라나고 있어 최대한의 관심이 당장 필요하다”고 말했다. UNFPA는 193개의 유엔 회원국에서 지난 3개월간 가정폭력이 평균 20% 늘어난 것으로 추산했다. 증가한 확률을 사건 발생건수로 환산하자면 총 1500만 건에 달한다.

지난 3월 31일 프랑스 여성부 장관은 격리조치에 들어가자마자 프랑스 전역에서 가정폭력이 1주일 만에 32% 증가했다고 발표했는데, 이는 이미 우한 초기 격리조치 때 발생한 현상이다. 영국의 여성단체가 가정폭력 피해자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피해자 중 72%는 코로나19 자가 격리로 인해 자신들의 삶에 대한 가해자의 통제력이 커졌다고 말했고, 78%는 코로나19 이동 제한으로 인해 피신할 곳을 찾기 어려워졌다고 응답했다. UNFPA는 지금과 같은 엄격한 봉쇄 조치가 1년간 지속될 경우, 전 세계적으로 6100만 건의 추가적인 가정폭력 사례가 나올 거라고 분석했다.

가정폭력만큼이나 원치 않는 임신·출산의 위험도 점점 더 심화되고 있다. 유엔 여성기구는 일찍이 성폭력 지원 등 여성에게 매우 중요한 의료서비스가 코로나19에 동원될까봐 우려했는데, 바로 그 일이 지금 벌어지고 있다. 현재 봉쇄조치로 인해 114개 중·저소득국 4400만 명이 피임약을 구하지 못하고 있으며, 여성 본인이 의도하지 않은 임신 100만여 건이 계속해서 발생하고 있다.

국제육아연맹은 64개국에서 5000개 이상의 임신 시술소가 문을 닫는 바람에 앞으로 위험한 임신중단 시술이 270만 건, 임신 관련 사망이 1만 1000명 일어날 수 있다고 예측했다. 또한, 연맹은 각국에서 조혼을 막는 프로그램이 차례차례 중단되고 있어서 10년간 어린이 결혼이 1300만 건 이상 늘어날 것으로 보고 있다. 벌써부터 아랍, 동아프리카, 남아프리카 등지에선 제도적 장치가 작동하지 않는 틈을 타 남성들이 딸뻘이 되는 어린이와의 결혼을 서두르는 중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어떨까. 우리나라의 신고상황은 조금 다르다. 경찰청에 따르면 코로나19 첫 확진환자가 나온 지난 1월 20일부터 지난 4월 1일까지 112 가정폭력 신고 건수는 4만 5065건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의 4만 7378건과 비교해 4.9% 감소했다. 그러나 112 신고만으로 가정폭력의 증감을 예단해선 안 된다. 한국의 가정폭력 신고율은 1%에 그치는 등 신고율 자체가 낮기 때문이다. 또한, 가정폭력의 세계적인 증가추세를 볼 때 한국만 예외일 거라 생각하는 건 비합리적이다.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의 말처럼 “상자 윗줄의 사과가 썩었다면 아랫줄 사과도 썩었다고 생각하는 게 합리적이다. 윗줄이 썩었으니 아랫줄이 모두 온전할 거라 믿는 것은 희망사항(wishful thinking)에 불과하다.”

하지만 현재 정부는 신고율이 낮다는 이유로 경제적 문제에만 주목하고 가정폭력 문제를 도외시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정부가 신고 건수가 줄었다는 사실만으로 성급하게 가정폭력이 줄었다고 판단할 것이 아니라, 신고가 왜 줄어들었는지 분석하고 이에 걸맞은 대응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한다. 프랑스는 오래전에 약국이 가정폭력 신고 기관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했고, 영국은 가정폭력 피해자들이 코로나19 사태 속에서도 자유롭게 신고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했다. 아일랜드도 ‘(당신을 위한 도움이) 여전히 여기에 있다(Stillhere)’라는 제목의 공익 광고를 대대적으로 게시했다.

최선혜 한국여성의전화 소장은 “정부가 코로나19 확산을 막기 위해 이동을 제한해야 한다는 메시지만 줄 뿐이지, 코로나19 상황에서도 가정폭력에 대해 지원을 받을 수 있고 외부에 도움을 요청할 수 있다는 사회적 메시지는 전혀 주지 않았다”고 비판하며 “코로나19가 장기화할 수 있다는 전망도 있는데 정부가 앞으로 가정폭력 문제에 더 관심을 둬야 한다”고 강조했다. 여성에게 안전은 정말 최소한의 기본권이다. 그 누구도 한낮의 길거리에서 혹은 안전한 휴식처가 되어야할 집에서 두려움과 불안을 느끼는 일은 없어야한다. 정부는 하루라도 빨리 급증하는 여성대상 범죄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환기하고, 범죄에 강력하게 대처하는 모습을 보여야할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시민과 함께하는 인터넷 뉴스 월 5,000원으로 소통하는 자발적 후원독자 모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