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論語)를 읽기에 앞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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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論語)를 읽기에 앞서
  • 이우재
  • 승인 2009.12.03 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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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재 선생님은 1957년 인천에서 태어나 인천송월초등학교, 인천중학교, 제물포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78년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동양사학과 4학년에 재학중 긴급조치 9호로 구속됐다. 이후 1980년 계엄포고령으로, 1988년 인천 5.3사태로 다시 옥고를 치렀다. 1992년까지 인천지역사회운동연합에서 활동했으며, 지금은 '溫故齋(온고재)'에서 논어를 강의하고 있다.




  논어는 공자(孔子, BC 552 또는 551~479)의 언행(言行)을 기록한 책이다.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 의하면 공자가 제자들을 비롯한 당시 사람들과 나눈 대화(語)를 후대의 문인들이 논찬(論撰)하였기 때문에 그 이름이 논어라고 한다. 한(漢)대 초기에는 세가지 종류의 논어가 전해지고 있었다고 한다. 노논어(魯論語), 제논어(齊論語), 고논어(古論語)가 그것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지금 어느 하나 전해지지 않고 있다. 지금 우리가 보는 논어는 위(魏)나라의 하안(何晏)이 중심이 되어 편찬한 『논어집해(論語集解)』를 따른 것이다.

  공자에 대한 기록은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를 위시하여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맹자(孟子)』 등 여러 곳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사기』 「공자세가(孔子世家)」를 제외하고는 모두 단편적인 것에 불과하며, 때로는 신빙성의 문제까지 제기되고 있는 형편이다. 현재 우리가 공자를 알려고 할 때 신뢰할 수 있는 유일한 전거(典據)는 오직 논어 뿐이다. 물론 논어 자체도 전해 내려오는 과정에서 착간(錯簡, 漢나라 때 종이가 발명되기 이전에는 책을 대나무로 만들었다. 대나무를 잘게 쪼개 그 위에 글을 쓴 후 그것들을 하나하나 묶어 책으로 만든 것이다. 따라서 그 대나무 조각들을 엮은 끈이 풀어질 경우 다시 엮는 과정에서 잘못 섞일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이런 것을 착간이라고 한다.)이나 변조되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전적으로 믿을 수 있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비판적인 연구를 통하여 극복하여야 할 과제이며, 현재로서는 달리 대안이 없다. 

  다른 인물의 경우도 마찬가지겠지만, 공자도 그의 사상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제일 먼저 그가 살던 시대 상황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인간의 삶은 주어진 시대 상황이라는 제약 속에서 이루어지며, 한 인간의 사상은 그 시대 상황 속에서 인간에게 주어진 제반 문제에 대한 그 나름의 총체적 대응이다. 따라서 한 인간의 사상과 그가 살던 시대 상황은 분리할 수 없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더군다나 공자와 같이 사회 개혁을 위해 일생을 바친 사람의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다. 마르크스(Karl Marx)를 19세기 유럽의 자본주의와 분리하여 생각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이하에서는 우선 공자가 살던 시대 상황부터 개략적으로 언급하고자 한다. 그럼으로써 독자 여러분이 논어라는 책을 통해 공자라는 인간의 실체에 접근해 가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역사적 배경


1, 공자 이전의 중국 역사


  1) 주(周)왕조의 성립


  사마천의 『사기』 〈본기(本紀)〉는 그 시작을 오제(五帝)로부터 하고 있다. 신화에 의하면 오제 이전에 삼황(三皇)이 있었다고 하나, 사마천은 삼황을 믿을 수 없는 전설로 치부한다. 오제는 중국 민족의 시조로 추앙받는 황제(黃帝) 헌원(軒轅)씨, 전욱(顓頊), 제곡(帝嚳), 그리고 만고의 성왕(聖王)으로 추앙받는 요(堯)와 순(舜)이다. 그러나 현대의 역사학계에서는 오제 또한 신화에 불과한 것으로 본다.

  오제 다음은 황하(黃河)의 치수(治水) 사업에 큰 공을 남겼다는 우(禹)임금이다. 그는 요와 순과는 달리 왕위(王位)를 선양(禪讓)하지 않고 자기 아들에게 물려 주었다. 그로써 하(夏)라는 중국 최초의 왕조가 성립된다. 사마천은 하나라의 역사를 〈하본기(夏本紀)〉에서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라의 실재 여부에 대해서는 아직도 이론(異論)이 많다. 하나라 시기로 추정할 수 있는 고고학적 유물이 많이 발견되고는 있으나, 하왕조의 문물이라고 확정할 만한 증거는 아직 발견되고 있지 않다.

  중국 역사상 고고학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최초의 왕조는 은(殷)이다. 은은 그 시조인 탕(湯)임금이 하나라 최후의 왕 걸(桀)의 폭정을 타도하고 세운 나라이다. 중국 역사상 최초의 역성혁명(易姓革命)이다. 은은 상(商)이라고도 불리우며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일대를 중심으로 건설되었다. 상당한 수준의 청동기 문명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지금의 산동성(山東省), 산서성(山西省), 하북성(河北省), 섬서성(陝西省), 호북성(湖北省), 안휘성(安徽省) 일대까지를 세력범위로 하는 광대한 국가를 이룩 상다. 은나라의 실재(實在)는 나라이점을 칠 때 사용 상던 거북의 껍질이나, 소의 견갑골(肩甲骨)에 새겨진 갑골문(甲骨文)의 해독을 통해 증명되었다. 은나라의 연대얔사상략 BC  17세기부터 BC 12세기(혹은 11세기)까지로 추정된다.

  은의 뒤를 이은 왕조가 주(周)이다. 주족(周族)의 기원에 대해서는 확실치는 않지만, 『사기』 「주본기(周本紀)」에 의하면 그 족성(族姓)은 희(姬)씨이고 그 시조는 후직(后稷)이라고 한다. 후직은 요, 순 시대에 농업을 전담한 사람으로 큰 공을 세웠다. 태(邰, 섬서성 武功縣)에 피봉(被封)되어 희성(姬姓)을 부여받았으며, 후에 농업의 신(神)으로 받들어졌다.

  주족은 주로 섬서, 감숙성(甘肅省) 일대에서 활약했는데, 고공단보(古公亶父, 후에 太王으로 추존됨) 대에 이르러 남쪽으로 이주하여 위수(渭水) 지역에 정착하면서 그 세력이 크게 신장되었다. 고공단보는 왕위를 계력(季歷)에게 물려주었고, 계력은 아들 창(昌)에게 물려주었는데 그가 바로 그 유명한 주 문왕(文王)이다. 창의 시대에 주는 더욱 흥기하여 마침내 관중(關中) 지방의 지배자가 되었다. 창은 죽기 일년 전 도읍을 기산(岐山) 기슭에서 풍(豊, 섬서성 西安 부근)으로 옮겼는데, 그곳은 관중평야의 중앙에 위치한 요충지로 훗날 주가 은을 타도하는 거점이 되었다.

  창이 죽자 그의 아들 발(發)이 즉위하였는데 그가 바로 주 무왕(武王)이다. 무왕은 실력을 배양하면서 은을 칠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당시 은의 왕은 제신(帝辛)으로 훗날 하나라의 마지막 임금 걸(桀)과 더불어 폭군의 대명사처럼 불리운 주(紂)이다. 『사기』 「은본기」에 의하면 주(紂)는 주지육림(酒池肉林)을 만들고, 포락(炮烙)의 형벌(기름을 칠한 구리 기둥 아래 불을 피워 놓고, 죄인에게 기둥 위를 걷게 하여 미끄러져 떨어지면 불에 타 죽게 하는 형벌)을 제정하는 등 무도하기 이를 데 없었다. 주(紂)의 포악함은 날로 심해져 마침내 자기에게 충간하는 비간(比干)을 “내가 듣기로 성인(聖人)의 심장에는 구멍이 일곱 개나 있다고 하였소.”라고 하면서 그의 배를 갈라 심장을 꺼내 보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그러나 『사기』의 이 내용은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무리가 있다. 아마 무왕의 역성혁명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고의로 만들어진 전승(傳承)일 것이다.

  아무튼 마침내 기회가 왔다고 생각한 무왕은 드디어 군사를 일으켰다. 양 측의 군대는 목야(牧野, 하남성 淇縣)에서 마주쳤다. 은의 군대는 대패했고, 주왕(紂王)은 불 속에 몸을 던져 자살하였다. 이로써 은왕조가 멸망하고 주왕조가 창립되었다. BC 1122년경(혹은 1026)의 일이다.


  2) 서주(西周)시대


  BC 1122년 무왕이 은을 타도한 때로부터 BC 771년 이민족 견융(犬戎)의 침입으로 유왕(幽王)이 피살되어 주왕조가 한때 멸망한 때까지를 서주시대라고 부른다. 유왕이 피살된 이듬해인 BC 770년 유왕의 아들 평왕(平王)은 도읍을 낙읍(洛邑, 하남성 낙양 일대)으로 옮겨 주왕실을 재건한다. 이때부터 BC 256년 진(秦)에 의해 주나라가 멸망할 때까지를 동주(東周)시대라고 한다. 서주, 동주라고 한 것은 서주의 수도 호경(鎬京, 섬서성 서안 부근)이 동주의 수도 낙읍보다 서쪽에 있었기 때문이다.

  서주도 은과 마찬가지로 청동기 문명에 기초를 둔 사회였다. 종래는 서주의 청동기 문명을 은의 그것과는 계통을 달리하는 것으로 간주해 왔다. 그러나 지금은 서주의 청동기 문명을 은의 한 갈래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철기가 도입되기 시작한 것은 서주 말 무렵부터이다.

  무왕은 은을 정벌한 후 얼마되지 않아 곧 병사하고 만다. 이어 무왕의 아들 성왕(成王)이 즉위하였으나 나이가 어려 무왕의 동생인 주공(周公) 단(旦)이 섭정을 한다. 그 와중을 틈타 멸망한 은의 유족들과 무왕의 동생인 관숙(管叔), 채숙(蔡叔) 등이 연합하여 대규모의 반란을 일으킨다. 이른바 삼감(三監)의 난이다. 주공은 성왕을 보필하여 이들의 반란을 진압하고 이들 지역의 원활한 지배를 위하여 지금의 하남성 낙양 부근에 대규모 도읍을 건설한다. 그것이 낙읍이다. 낙읍은 주의 제2의 수도로서 성주(成周)라고도 불리운다. 주공은 이 성주를 중심으로 은의 유족들을 제압하면서 주의 각종 체제를 정비해 간다. 이러한 주공의 활약으로 주나라는 차츰 안정되어 갔다.

  서주의 정치 제도는 봉건(封建)제와 종법(宗法)제로 상징된다. 서주는 광대한 영토를 지배하기 위하여 봉건제를 실시하였다. 우선 주왕실은 수도 호경(주왕실의 종묘가 있었던 관계로 宗周라고도 불리움)과 성주 일대를 직접 지배 하에 두었다. 그것이 이른바 왕기(王畿) 지방이다. 왕기 지방을 제외한 광대한 피정복지는 주왕실의 자제, 일족(姬姓諸侯) 및 동맹 부족 출신자(異姓諸侯)들을 파견하여 제후로 분봉(分封), 배치하고 은의 유민들과 주변 이민족들을 감시하게 하였다. 그 밖에 주에 복속한 지방 토호(土着諸侯)는 소제후로서 그 지역을 지배하였다. 또한 제후도 자신의 봉토를 자신의 근친(大夫)에게 나누어 주었다(采地 또는 采邑). 봉건제는 주왕(天子)을 정점으로 하여 제후, 대부에 이르는 정치적 피라미드를 형성하였다.

  천자와 제후 사이에는 권리와 의무 관계가 수반되었다. 천자는 제후에 대한 임명권을 장악하고 있었으며, 또 봉국(封國) 내에서 주왕실의 정령(政令)을 시행할 것을 강요하였다. 뿐만 아니라 제후는 일정 시기마다 천자를 조현(朝見)해야 했으며, 일정량의 군사, 공납(貢納)의 의무도 부과되었다. 만일 제후가 이와 같은 의무를 소홀히 할 경우에는 탈작(奪爵), 전봉(轉封) 및 봉지의 회수, 삭감 등의 조치가 취해졌다. 반면에 천자는 제후에 대한 책명(冊命)을 통해 제후의 봉지에 대한 지배권을 정당화하고, 내란이나 외침으로부터 제후를 보호할 의무가 있었다. 또한 제후에게는 자신의 영역 내에서 일정 정도의 통치의 자율성이 보장되었다.

  이러한 봉건제에는 당연히 주왕실이 천하의 모든 토지와 인민을 소유한다는 왕토(王土) 사상이 전제되어 있었다. 그러나 주왕실과 제후의 정치적 결합을 더욱 공고히 한 것은 주왕실인 대종(大宗)에 대한 제후인 소종(小宗) 간의 혈연적 관계를 규정한 종법제도였다. 원래 종법제도는 부족 사회 내에서 씨족 조직이 발전하면서 체계를 갖춘 종족(宗族)제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즉 종족(氏族)은 총본가(總本家)인 대종을 중심으로 단결하며, 각 지파(支派)는 소종으로서 대종에게 예속된다. 상속은 적장자(嫡長子)에게 우선권이 주어지며, 상속자 이외에는 모두 별자(別子)로서 소종을 이루면서 신분은 한단계씩 낮아진다. 이 종법제도에 의거하여 천자와 제후, 대부들 사이는 모두 혈연 관계로 의제(擬制)되었다. 

  은(殷) 대 이후 중국 사회를 구성하는 기본 단위는 읍(邑)이었다. 읍은 보통 성곽으로 둘러싸인 집단 취락(聚落)지를 의미하나, 모든 읍이 성곽으로 둘러싸인 것은 아니었다. 작은 호(濠)로만 둘러싸인 소규모 취락지도 읍이라고 불리워졌다. 이 읍은 공자가 살던 시대인 춘추(春秋)시대를 지나 전국(戰國)시대에 중앙에 직할된 현(縣)으로 재편될 때까지 당시 사회를 구성하는 기본 단위였다.

  서주 시대 읍은 대체로 다음과 같이 셋으로 분류된다. 우선 제후가 거주하는 중심적 읍인 국(國), 국 이외의 중요한 읍인 도(都), 그리고 국이나 도 이외에 단지 읍으로 지칭되거나 또는 비(鄙)라고 일컬어지는 일반읍이 그것이다. 국의 주위에는 광대한 원야(原野)가 펼쳐져 있는 데 이를 흔히 야(野)라고 부른다. 이 야 중에는 국의 축소 형태인 도가 제후 일족의 분읍(分邑)으로서 요충지마다 자리잡고 있었다. 이 국과 도를 둘러싸고 원야의 여기저기에 산재해 있는 것이 바로 비의 읍이다. 국과 도는 주변의 비의 읍를 속읍(屬邑)으로 영유하였다. 국의 지배권이 미치는 야의 끝에는 산림이나 계곡 등 자연을 이용한 봉강(封彊)이 타국과의 경계로 설정되어 있었으나,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뜻하는 식의 국경(國境)은 아니었다. 당시는 영토 개념이 뚜렷하지 않아 국은 읍을 지배하는 것이지 영토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국의 속읍이 봉강을 넘어 다른 국 안에 있는 경우도 간혹 있었다.

  국의 구성원 중 최고의 우두머리는 흔히 공(公)이라 불리우는 제후였고, 따라서 중요한 국사에 대한 최종 결정은 공의 권한이었다. 공은 국정의 최고 책임자이면서 국 구성원 전체의 정신적 지주이자 대표자로서 종교적 카리스마에 호소하는 공동체 수장의 성격도 함께 갖고 있었다. 그것은 공이 국의 지배 계급을 구성하는 일족의 총본가로서, 당시 우주를 주재하는 최고의 신으로 숭배된 천(天)과 함께 신계(神界)에 머물면서 천에 유효하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일족의 조상신(祖上神)인 선공(先公)에게 제사지낼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당시 국의 가장 중요한 일은 전쟁(戎)과 제사(祀)였다.

  국의 지배 계급 중 공 다음의 지위를 차지한 것은 대부(大夫)였다. 대부는 대부분 공의 일족으로서 복수의 부계 가족을 거느리는 씨(氏)의 종주(宗主) 내지는 그에 버금가는 유력자로, 국의 주요 관직을 세습 독점하였다. 이들은 공으로부터 분여(分與)받은 비(鄙)의 채읍(采邑)을 물질적 기반으로 하여 일족 자제들을 부양하였고, 아울러 이들로 병단을 구성하여 전쟁에 참여할 의무를 부여받았다. 대부 중 일부는 분여받은 봉읍(封邑) 중 일부를 본거지로 삼아 독자적인 기반을 구축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도(都)이다. 대부 중 국의 최고 직책을 관장하는 유력 명문씨족의 장을 경(卿)이라 칭하였고, 그는 국정을 총괄하는 집정(執政)과 군(軍) 최고사령관직을 겸임했다.

  공과 경대부 이외에 국의 기저를 이루는 최말단 지배계급이 사(士)이다. 사는 원래 조상이 공이나 경대부였으나, 계속된 분족(分族)과 인구증가로 말미암아 혈연관계가 소원해지면서 말단지족(末端支族)으로 전락한 사람들이다. 사는 국에 거주하였으며(國人), 국의 바깥에 전지(田地)를 보유하여 이를 경제적 기반으로 하는 작은 영주와 같은 경우 외에도, 직접 생산에 종사하거나 국의 하급 관리, 경대부의 가재(家宰)나 읍재(邑宰) 등 다양한 존재 형태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사는 모두가 전쟁에 종사하는 전사(戰士)로서의 공통점이 있었다. 이들은 공이나 경대부의 지배를 받았으나, 때로는 국의 중요 정치 결정에 직접 참여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것은 당시 국이 공, 경대부, 사로 구성되는 일족의 혈연공동체였기 때문이다.

  원야에 산재하는 비읍(鄙邑)은 원래 농경 가능한 지역마다 형성된 자연 취락으로 혈연 관계에 입각한 자립적인 생산공동체였다. 경대부의 채읍으로 예속된 이후에도 그와 같은 성격에는 전혀 변함이 없었다. 이와 같은 비읍에 대해 국의 경대부 등이 취한 지배 방식은 읍내의 기존 공동체질서를 그대로 온존시키면서 읍 단위로 파악하는 이른바 총체적 지배였다. 즉 읍 단위로 할당된 일정량의 공납(貢納)과 역역(力役)을 공동체의 수장을 통해 착취하는 방식이었다. 경대부의 지배는 공동체의 수장을 통해 관철되었지, 직접 읍의 구성원 개개인에게 미치는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지배 방식이 채택된 데는 공동체 구성원들의 강한 반발도 문제가 되었겠지만, 무엇보다 당시의 낮은 생산력 수준이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목기(木器)나 석기(石器)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로서는 분산적인 개체노동보다는 집단적인 집체노동이 보다 효율적이었기 때문이다. 비읍의 구성원들은 비록 읍의 수장의 지배를 받고는 있었으나, 균등한 토지 점유 하에 거의 계층분화가 없는 공동체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서주 시대의 농업 생산은 은보다 진일보하였다. 아직도 석기나 목기가 보편적인 농기구였지만, 예리한 날을 가진 청동낫 같은 상당한 수준의 청동제 농기구도 보급되고 있었다. 아울러 농업 기술의 면에서도 초보적인 관개 기술과 더불어 지력을 보강하기 위한 휴경(休耕) 농법이 시도되었으며, 두사람이 한 조가 되어 경작하는 대규모 집단우경(集團耦耕)이 출현하였다. 이에 따라 농산물의 품종도 증가하여 기장, 조, 밀, 보리, 벼, 고량 등 백곡(百穀)이라고 불릴 만큼 다양한 작물이 재배되었다.

  농업의 발달과 함께 수공업, 특히 청동주조법이 급속히 발달하였다. 그에 따라 청동기 중 제기(祭器)의 비중이 줄어들고 반면 식기, 무기, 농기구(낫)와 같은 실용적인 제품이 점점 많이 생산되었다. 수공업이 발달하면서 상업도 따라 발달하기 시작했다. 당시 상업은 기본적으로 물물교환 형태였으나, 은대보다 많은 조개껍질(貝)이 화폐로 사용되었고 구리가 상거래의 매개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이것은 금속화폐의 원초적 형태라고 할 수 있다.


2, 격동의 춘추전국(春秋戰國)시대 ― 공자의 시대

  

  1) 춘추전국시대란?


  서주의 마지막 임금 유왕(幽王)은 걸주(桀紂)와 더불어 중국 역사상 폭군으로 이름이 높다. 그는 미희 포사(褒姒)를 총애하여 정후(正后)였던 신후(申后)와 태자 의구(宜臼)를 폐하고, 포사를 정후로, 그의 아들 백복(伯服)을 태자로 삼았다. 이에 분개한 신후(申侯, 申后의 아버지)는 섬서성 북부에 있던 견융(犬戎)과 연합하여 종주(宗周)를 함락하고 유왕을 죽인다. 이로써 서주는 멸망하였으니 BC 771년의 일이다.

  유왕의 원래 태자였던 의구는 동쪽의 성주로 도망가 제후들의 도움을 받아 주왕실을 재건한다. BC 770년의 일로 이때부터 BC 256년 동주가 진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를 동주시대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 시기는 흔히 춘추전국시대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져 있다. 춘추는 『춘추(春秋)』라는 책에서 그 이름이 유래했다. 『춘추』는 원래 노(魯)나라의 연대기였던 것을 공자가 편집, 개정한 것이라고 전해지는데, BC 722년 노나라 은공(隱公) 원년부터 BC 479년 애공(哀公) 16년까지의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다(공자는 춘추 후기의 인물이다). 전국이라는 이름은 『전국책(戰國策)』이란 책에서 유래했는데, 동주시대 후반기에 활약했던 외교가들의 언론을 중심 내용으로 하고 있다.

  춘추시대와 전국시대의 분기점을 언제로 하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그러나 흔히 춘추시대를 명목상으로나마 주왕실의 권위가 인정되고(尊王攘夷) 서주 이래의 질서(周禮)가 다소나마 시행되고 있던 시대, 전국시대를 주왕실이 권위를 완전히 잃고 주례가 붕괴된 시대라고 규정하고 있음을 비추어 본다면, 진(晉)의 대부였던 한(韓), 위(魏), 조(趙) 3가(家)가 진을 삼분하여 사실상 독립했던 BC 453년을 그 분기점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렇게 본다면 춘추시대는 BC 770년부터 BC 453년까지고, 전국시대는 BC 452년부터 진(秦)이 전중국을 통일한 BC 221년까지다.

  그러나 이는 편의상의 구분이고, 보통은 춘추전국시대라고 통칭하여 부르는 경우가 많다. 이 시기 동안 종래 토착적 기반 위에서 폐쇄성을 견지해 왔던 읍은 권력의 집중화와 지배력의 심화 과정 속에서 독자성을 상실하고 강력한 중앙 권력의 행정단위로 재편되었다. 또한 서주 사회의 기저를 이루었던 씨족공동체가 해체되면서 소농민 경영이 정착, 보편화되었으며, 국가는 이들을 직접 지배 하에 두었다. 종래 인간 세상을 지배한다고 간주되어 왔던 천(天)은 이제 단순한 자연 현상에 불과한 것으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학문이 만개하여 제자백가(諸子百家)라는 중국 역사상 보기 드문 문화적인 황금기가 열리기도 하였다. 이러한 속에서 마침내 정치적, 문화적, 경제적, 민족적 단일체로서의 중국이 형성되었다. 춘추전국시대는 한마디로 분열로부터 통일로 가는 시기라고도 할 수 있다.

 

  2) 춘추전국시대의 정치

  

  주의 정치 체제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종법제는 그 안에 심각한 모순이 내재되어 있었다. 종법제가 의제한 혈연관계라는 것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소원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주의 봉건제는 이념적으로는 종법제에 의한 혈연관계에 기초하였지만, 실제로는 주왕실의 무력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주의 정치 체제의 내재적인 모순은 주왕실이 이민족의 침입을 받아 동천(東遷)한 동주 시대 이후 표면화된다.

  주왕실의 동천 자체가 이미 주왕실의 몰락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듯이, 동주 이후 주왕실은 명목상으로만 존재하였을 뿐 이미 제후들을 통제할 물리력을 상실하고 있었다. 게다가 소위 종법제에 입각한 혈연적인 유대는 봉건 이후 몇백년이 지난 상황 속에서 이제 아무런 의미도 가질 수 없었다. 주왕실을 정점으로 한 정치적 피라미드는 그 맨 꼭대기에서부터 붕괴하기 시작했다.

  주왕실의 통제가 사라지면서 제후들 간에는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삼키는 약육강식의 무한경쟁이 시작되었다. 춘추시대 초기 170여개나 확인되던 제후국은 춘추 말기에 이르러 13개 정도만 존재하게 된다. 이는 전국시대 진(秦), 초(楚), 연(燕), 제(齊), 한(韓), 위(魏), 조(趙)의 7대국으로 병합되고 결국 진(秦)의 전국 통일로 마감된다.

  그러나 이러한 통일 과정이 일률적으로 진행된 것은 아니었다. 춘추 초기에는 아직 강대국이 약소국을 무력 병합하는 단계로까지 이르지는 않았다. 춘추기의 정치 질서는 패자(覇者)라 불리우는 강대국이 그 무력을 바탕으로 제후간의 회맹(會盟)의 주재자가 되어 주왕실을 명목상으로나마 받들면서 기존의 열국(列國) 체제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패자는 전쟁을 통해 타국을 정벌하였어도, 그 나라 자체를 멸망시키지는 않았다. 그것은 아마 한 제후국을 멸망시켰을 경우 받게 될 그 나라 조상신의 노여움이나, 또는 해당 주민들의 집단적 반발이 우려되어서였을 것이다. 따라서 약소국의 경우라도 패자가 강요하는 굴욕적인 맹약만 받아들인다면, 나라의 조선(祖先)에 대한 제사로서 상징되는 자국의 독자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전쟁이 계속되고, 동맹과 배반이 빈번해지면서 더 이상 이러한 상태가 영속될 수는 없었다. 결국 춘추 중기를 전후하여 진(秦), 진(晉), 초(楚) 등 강대국은 종래의 회맹을 통한 지배 방식에서 탈피하여, 소국을 멸하고 이를 현(縣)으로 삼아 직접 지배하는 이른바 멸국치현(滅國置縣)의 지배방식으로 전환하게 된다. 물론 이러한 지배 방식에 대한 저항도 격렬하였으나, 강대국은 피정복국의 종묘를 파괴하고, 주민을 집단 이주시키는 등의 방법으로 이를 관철하였다. 이후 전국시대에 이르러서는 대부분의 국이 멸망하고 전국칠웅(戰國七雄)으로 표현되는 강대국만이 살아남게 되었으며, 그마저도 BC 221년 진(秦)에 의해 통일된다. 진(秦)은 전중국에 걸쳐 군현제(郡縣制)를 실시함으로써 중국 전역을 군주의 직접 지배 아래 두는 역사상 최초의 중앙집권적 통일 국가를 수립하는데 성공한다.

  춘추시대 이후 나타나기 시작한 제후국 내부에서의 중요한 정치적 변화는 공실(公室)의 쇠퇴와 사가(私家, 世卿家)의 대두였다. 원래 공(公)은 일족의 조상신에 대한 제사자로서의 주술적 권위에 그 권력의 기반을 두고 있었다. 그는 일족의 대표자였지, 일족에 대한 절대적인 지배자는 아니었다. 이 점에서 그의 권력은 처음부터 약점이 내재되어 있었다. 게다가 계속된 분족(分族)은 공과 경대부, 사와의 혈연적 유대마저 약화시켰다. 이런 상태에서 공이 열국 간의 무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군주권의 강화를 시도할 경우 자칫 국인(國人) 내부로부터의 집단적인 저항을 초래할 가능성이 높았다. 이러한 경향은 주나라의 전통(周禮)이 강하게 남아 있었던 노(魯), 진(晉), 정(鄭), 송(宋), 제(齊) 등 중원 지역의 제후국에서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이들 제후국에서 공은 점차 실권을 잃고 명목상의 존재로만 남게 되었다. 

  한편 유력 대부(세경가)들은 노(魯)의 삼환(三桓)씨의 경우에는 공실(公室)을 삼분(三分)하면서, 진(晉)의 이성세족의 경우에는 세족(世族)간의 투쟁을 통해 점차 자신의 세력을 확대해 갔다. 이들은 주변의 채읍을 복속시켜 경제적 기반을 확장하고, 다시 그것을 발판으로 삼아 자신을 추종하는 무력집단을 확대했다. 이들 무력 집단은 혈연 의식에 근거한 종래의 봉건적인 주종 관계가 아니라 주군(主君)과 가신(家臣)이라는 가부장(家父長)적인 관계로 맺어졌다. 세경가들은 이들 무력 집단을 정규군으로 편제했고 이것을 바탕으로 삼아 진(晉)의 한(韓), 위(魏), 조(趙) 삼가(三家)는 마침내 BC 453년 진(晉)을 삼분한다. 이로써 주례(周禮)로 표현되는 주의 정치 질서는 마침내 붕괴됐고, 이어 전국시대로 접어든다. 제(齊)의 경우도 전(田)씨에게 BC 386년 결국 나라를 찬탈당하고 만다. 그리고 이런 과정을 통하여 군주권의 성격도 변화하여 전국시대의 가부장적인 전제 군주가 등장하게 된다. 전국시대 열국의 군주들이 서로 앞다투어 왕(王)이라 칭한 것은 바로 이러한 군주권의 변화를 나타낸 것이다.

  춘추시대의 정치는 한마디로 주례로 표현되는 주의 정치 질서, 즉 위로는 천자로부터 제후, 대부에 이르는 정치적 피라미드가 총체적으로 붕괴되는 과정이었다. 천자는 제후에게 능멸당했고, 제후는 잦은 전쟁 속에서 점차 멸망해 갔으며, 약소국은 강대국의 현으로 흡수되었다. 국(國) 내부에서는 공이 점차 실권을 잃고, 유력 대부들이 실권을 장악했으며, 또 대부들은 서로간의 세력 투쟁의 과정에서 하나씩 강자에게 흡수되었다. 주의 정치 질서(주례)는 총체적으로 붕괴됐으며, 그것을 단적으로 나타낸 것이 진(晉)의 삼분(三分)이었다. 이후 전국시대에 이르러서는 이미 어느곳에서도 주례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았다.    

   

  3) 춘추전국시대의 사회, 경제, 문화


  춘추 중기 이후 본격화한 멸국치현의 새로운 지배 방식은 피정복지의 구질서를 해체해 갔다. 피정복지의 구질서를 온존시킨 채로는 효율적인 지배를 기대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강대국들은 피정복국의 구질서(씨족공동체 질서)를 상징하는 종묘를 파괴하고, 그 지배 씨족을 처형하거나 강제이주시켰다. 이에 저항할 경우에는 피정복민 전체를 강제 이주시키는 극한적 방법도 불사하였다. 이런 과정을 통해 적어도 피정복지 내에서는 구래의 씨족적 질서가 외부로부터 점차 해체되어 갔다.  

  한편 철기(鐵器)의 보급에 따른 농업 생산력의 발달도 구래의 씨족적 질서를 내부로부터 해체해 갔다. 서주 말기부터 도입되기 시작한 철기는 BC 7~6세기경 기존의 목제 농구나 석제 농구의 댨체하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우경(牛耕)이 시작되면서 이전에는 엄두도 낼 수 없었던 심경(深耕)과 기타 토양가공, 중경(中耕), 제초(除草) 등이 용이해져 단위 면적 당 생산량이 급격히 증가했다. 이와 함께 노동생산성이 크게 높아짐과 기타괠대한 황무지와 원야(原野라 우대한 개간이 확대되어 공동체적 토지 소유의 규제의 받지 않는 농경지가 출현함은 물론 토지 점유의 불균형도 심화되었다. 그 결과 낮은 생산력 때문 우불가피하게 유지되어 왔던 씨족제적 읍공동체질서는 계층분화에 따라 내부로부터 붕괴되었고 가족단위의 소농경영이 출현하였다. 이러한 과정은 춘추 중기 이후 전국 초엄두도 낼진행석제 농구의전국 이후에는 가족 단위의 소농경영이 보편화되었다.

  이렇게 내외부적 요인에 의해 씨족공동체가 붕괴되면서 그에 따른 부작용도 크게 나타났다. 계층분화가 진행되면서 빈부의 격차가 심화되었으며, 다수의 농민들이 몰락했고, 심지어는 토지로부터 방기되어 유랑하는 경우도 많았다. 게다가 전국 이후 총력전의 양상으로 변모한 전쟁은 보다 많은 전비와 병사를 필요로 했고, 그에 따라 백성의 주류를 이루는 농민의 삶은 더욱 피폐해졌다.     이러한 사회 불안 요소를 해결하기 위하여 전국(戰國)의 열강들은 앞다투어 변법(變法)을 실시했다. 위문후(魏文侯) 때 이회(李悝)를 필두로 하여 한소후(韓昭侯) 때 신불해(申不害), 진효공(秦孝公) 때 상앙(商鞅) 등으로 대표되는 변법의 목적은 크게 두가지이다. 하나는 구래의 공동체적 질서의 잔재를 파괴하여 군주를 정점으로 하는 일원적인 법치질서를 전지역에 관철하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공동체로부터 분리된 소농민에게 안정적 재생산구조를 보장하는 것이었다. 후자를 위하여 열국들은 농민에게 적정한 규모의 토지를 공급하고, 또한 광대한 규모의 치수, 개간 사업을 진행하였다. 이로써 농민은 직접 군주에게 예속하게 되었고, 그것은 결국 가부장적 군주를 정점으로 하는 중앙집권체제의 확립에 크게 기여하였다. 전국 시대 군주들이 왕을 칭하게 된 것은 바로 이러한 사실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춘추 시대 이후 열국 간의 잦은 전쟁과 공과 대부간, 대부 상호간의 세력 투쟁의 결과 봉건제 하에서의 구 지배층은 점차 몰락해 갔다. 그에 따라 봉건제 하에서의 신분 질서가 붕괴되었고, 또한 구 지배층에 의해 독점되었던 관료 기구도 변화를 맞이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한편 열국 간의 무한 경쟁에 처한 군주의 입장에서는 그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하여 보다 유능하고 보다 자기에게 충성하는 그런 집단이 필요하였다. 그것은 유력 대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멸국치현에서 보이듯이 직할통치 지역이 확대되면서 군주를 보좌할 관리들이 점차 크게 요구되었으며,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행정 사무가 복잡화, 전문화됨에 따라 전문 행정 관리에 대한 수요는 더욱 증대되었다.   

  이에 따라 실제적인 행정능력과 정치적 식격을 가진 유능한 인재가 대거 필요해졌다. 이제 신분은 관리가 되는 데 더 이상 장애 요인이 되지 않았다. 관직을 독점했던 구 지배층도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으며, 또한 남아 있다 하더라도 그들로서는 이 새로운 요구를 충족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 모든 제자백가들이 신분의 귀천에 관계없이 능력 본위로 인재를 발탁해야 한다는 이른바 상현(尙賢)을 주장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따라 하층의 사(士)나 심지어는 미천한 신분의 사람들까지도 학식을 통해 관직에 오르는 것이 가능해졌다. 이들 새로운 관리들은 구 봉건제의 옹호자가 아니었다. 신분제에 기반을 둔 구 봉건제는 그들의 성장에 방해가 되는 질곡일 뿐이었다. 그들은 자신을 등용해 준 군주를 도와 봉건제를 타파하고 군주권의 강화에 힘썼다. 그에 따라 관료제에 기반한 중앙집권적 통일국가로의 길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한편 학문을 통한 출세의 길이 열리면서 새로운 교육의 장이 열렸다. 가문 안에서 비전(秘傳)의 형식으로 이루어져 왔던 전통적 교육은 신분제가 붕괴되면서 함께 무너져 갔다. 또한 사회가 커지고 복잡해지면서 새로운 지식이 요구되었다. 이에 부응하여 나타난 것이 이른바 사학(私學)이다. 중국 역사상 사학의 비조(鼻祖)라 불리우는 공자의 문하 제자들을 살펴보면 알 수 있듯이, 제각기 다른 출신 성분의 수많은 젊은이들이 신분상승의 뜻을 품고 유능한 스승의 문하에 몰려 들었다. 그들은 스승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히고 그것을 발판으로 삼아 관직의 길에 올랐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는 당연히 학문을 만개시켰다. 이른바 제자백가(諸子百家)라고 불리우는 중국 역사상 보기드문 문화적 황금기가 열린 것이다. 그러나 이 문화적 황금기는 사회 전반에 걸친 신분상승 욕구에 편승하여 이루어졌다는 한계 때문에 정치, 행정, 군사 등 소위 입신에 필요한 학문으로만 한정되고 말았다. 비슷한 시기 그리이스 학문이 “학문을 위한 학문”, 자연과학에 깊은 관심을 보인 것과 크게 대조되는 것이다.

  BC 7~6세기 이후 철제 농구가 보급되면서 농업이 비약적 발달한 것은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 있지만, 수공업과 상업도 함께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수공업은 서주 시기까지 주로 왕실이나 공실에 예속된 직업적 씨족이 주된 담당자였었다. 그러나 춘추 시대 이후 씨족이 해체되면서 한 편으로는 관영공장으로 재편되고, 또 한편으로는 독립의 자영 수공업자가 출현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수공업 생산품의 성격도 변화했는데, 춘추시대에는 지배층을 상대로 한 군수품이나 사치품이 주종을 이루었던 것이 전국시대에는 일반인을 위한 일용품이 많아진다. 철제 농구의 보급도 이에 따른 결과였다. 제염업, 제철업, 칠기, 피혁, 직물 등 다양한 수공업이 발달하였으며 이에 따라 지역적 특산품의 생산도 발전하였다.

  농업, 수공업이 발달하면서 많은 잉여가 발생하고, 분업에 따른 지역적 편차가 심화되면서 교역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특히 계층분화에 따라 부민(富民)층이 성장하면서 대상인도 출현하였다. 이에 따라 시장권도 확대되어 이미 국의 경계를 넘어서고 있었다. 공자의 제자인 자공(子貢)이 조(曹)나라와 노나라 사이에서 장사를 하여 거금을 모았다는 『사기』 「화식열전(貨殖列傳)」의 기록은 그러한 사실을 잘 말하여 주고 있다. 청동제 화폐도 유통되었으며, 대도시도 출현하였다. 전국 후기 제(齊)의 수도 임치(臨淄)의 호수가 7만 호(戶)였다고 하는데 1호당 평균 5명으로 계산하면 대략 35만명의 인구가 살고 있었던 것이 된다. 이들 중 상당수는 수공업자나 상인이었을 것이다. 당시 수공업과 상업의 발달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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