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늦도록 공부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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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늦도록 공부하는 이유
  • 김불위
  • 승인 2020.07.27 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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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칼럼] 김불위 / 인천노인종합문화화관 소통의 글쓰기반

얼마 전에 서지현 검사의 미투가 있어서 세상이 시끄러웠는데 최근에는 박원순 미투가 있어 급기야 서울 시장이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나의 유년기 시절에도 남존여비男尊女卑 사상 때문에 여자들은 억울한 피해자가 되었다. 아들이라면 전답을 팔아서라도 고등교육을 시키시면서 딸들에겐 삼강오륜三綱五倫만 강조하셨다. “자고로 여자는 출가하여 시부모 봉양하고 남편 잘 받들고 아들 딸 생산하여 훌륭하게 키우는 것이 여자의 도리니라. 또 하루에 참을인忍 세 번만 상기시키면 만사가 평온하니 명심하니라.”는 부모님의 말씀에 딸이라는 이유로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야 했다.

나는 아담한 시골 마을 20호가 넘는 류씨와 김씨가 다정다감하게 모여 사는 ‘모란’이란 동네에 선비의 가정에 1남 8녀중 7째 딸로 태어났지만 책만 펴놓고 글 한번 가르쳐 주시지 않는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 그 때까지 딸만 낳으셨던 부모님은 드디어 여덟째 득남得男하시어 온 동네는 물론 면사무소까지 축제분위기였다. 그러니 나의 남동생은 부모님께서 불면 날아갈세라 놓으면 꺼질세라 금지옥엽으로 키우셨다.

이른 아침이면 남학생들은 사랑방에 모여 앉아 글읽는 소리가 온 동네를 감쌓지만 나에겐 부러움의 대상이였다. 딸이라는 이유로 무관심한 부모님께 나는 불만을 터트렸다. “아버지 우리는 버려두고 남의 자녀들만 지도하시냐”고 했더니 아버지께서 “남자는 이 나라 기둥이지.” 하시며 화롯가에 담뱃대를 탕탕 두드리신다. 용기를 내어 “그럼 여자는 없어도 되나요?” 했더니 웃으시며 멋적어 하신다.

초등학교 때는 모내기 논매기 한다고 학교를 결석하고 동생 돌보느라 결석을 하였다. 학교에 빠지지 말고 출석하라는 선생님의 충고 말씀에 나는 시시때때로 얼굴이 붉어졌다. 그때는 생활이 왜 그렇게 어려웠던지 요즘 TV에 나오는 아프리카 어린이들을 보면 어린 시절이 생각나 마음이 아프다.

그럭저럭 국민학교을 졸업하고 상급학교에 진학을 못해 애태우던 때 사범대 갓 나온 오빠들이 우리가 사는 마을로 봉사를 나왔다. 그들이 중학과정을 지도해 준다기에 나는 너무 고맙고 기뻤다. 17세 나이로 나는 주경야독晝耕夜讀 하였다. 너무나 갈망하던 공부라 열심히 했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길을 호야불에 의지하면서 길섶에 개구리라도 뛰어나오면 소스라치게 놀라면서도 배움의 열정만으로 즐겁게 다녔다.

어느덧 나도 부모님의 성화에 못 이겨 결혼을 하여 직장 따라 인천에 정착하게되었다. 부모님 말씀대로 아들 딸 남매 두어 평탄한 가정 꾸리고 바쁘게 살다보니 언제 벌써 자식들은 결혼해 둥지를 떠나고 손주 칠팔년 키워주고 보니 텅 빈 집에는 남편과 두 식구만 남게 되었다. 허전함도 있지만 몸과 마음이 여유가 있어 만학이지만 공부를 하고 싶었다. 체계적으로 배우지는 못 했지만 항상 나에겐 배움의 갈증이 책을 가까이하게 됐다.

나는 2000년에 컴퓨터 학원에 무조건 수업료을 냈다 컴퓨터가 널리 보급되지 않아 첫날 입실을 하고보니 모두가 젊은 청춘들이였다. 시작은 했지만 노화된 두뇌로 따라갈 수 있을까 고민도 했지만 여기서 포기하면 아무것 못해 마음 다잡고 두 배로 노력하여 초급반에서 고급반까지 배우니 성취감에 시간가는 줄 몰랐다.

그러던 어느 날 동네 중학생이 한자시험 본다기에 옛날 어깨너머로 배운 한자가 생각나 마음에 끌렸다. 한국어문회에서 주관하는 시험이다. 인천대학교에서 오후 3시에 시험이 있는데 아침부터 마음이 설레어 약국에 가서 청심환 사서 먹고 점심도 먹는둥 마는둥 하고 1시쯤 집을 나섰다.

태양은 열기를 뿜어 나를 괴롭혔지만 마음만은 가볍고 달콤한 솜사탕 같았다. 벌써 많은 수험생들이 학부모와 학교 나무 그늘 밑에서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스피커로 20분 전에 입실하라는 소리가 들렸다. 교실에 들어와 둘러보니 5급 시험이라 장년은 이삼 명이고 모두 청소년들이었다.

내 수험표가 붙은 책상에 앉고보니 이 나이에 시험을 본다는 것조차도 영광이였다. 감독관의 주의 말씀을 듣고 답안지를 받아드니 쿵쿵 가슴은 뛰고 손은 덜덜 떨려 한문글씨가 삐뚤빼뚤 써졌다. 감독관이 지나가기에 “이 글씨 알아보시겠어요?” 하고 물었다.

감독관은 멋 적은 웃음을 지으며 “그럼요 충분히 알아봅니다 잘 보세요.” 했다. 시험은 너무 쉬웠지만 옛날 우리 때는 시험지에 답을 썼지만 지금은 답안지가 따로 있어 줄이 어긋나면 낭패를 보기 십상이었다. 정신이 헷갈렸지만 정신을 똑바로 하고 답을 써나갔다.

며칠 후 발표 날이 다가와 새벽 4시에 컴퓨터에 들어갔더니 ‘합격’이란 두 글자가 빛이 되어 두 눈에 꽂혔다 “그래 나도 할 수 있어” 용기를 얻어 4급 3급 2급을 합격하고 1급에 도전했다. 1급은 서울 연세대학에서 봤지만 불합격.

나의 실력은 여기에 만족하고 좀 쉬운 것을 배워보기로 했다 언젠가 친구가 만 60세 되면 노인복지관에 등록 가능하고 다양한 프로그램이 있다기에 친구랑 가 보았다. 어학과 예능 교실마다 수강생들의 활기찬 모습이 젊은이들 못지 않았다. 나도 원하는 과목에 접수했다. 배움의 보람도 느끼면서 친구도 사귀고 이것이야말로 일석이조一石二鳥가 아닌가! 이날 나는 좋은 기회를 제공해주신 복지관 관계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 인사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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