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님의 사랑은 철따라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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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님의 사랑은 철따라 흘러간다
  • 정민나
  • 승인 2020.08.20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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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 - 성기덕

 

소나무

                                                - 성 기 덕

 

새 생명이 태어나면 푸른 가지를 문간에 내어 걸었지

보릿고개 초근목피로 연명할 때도 새순을 피웠고

향이 좋아 아버지 목침이 되었던 너는

곧게 뻗은 것보다 이상하게 굽어 자란 네가 더 멋있고

우리네 인생도 조금은 휘어 돌아가는 길이 여유 있지

거북등처럼 생긴 쭈글쭈글한 껍질이 용의 비늘과 흡사하여

언젠가 금방이라도 솟아오를 것만 같은

너한테 깜빡 속았다. 사시사철 푸른색 하나만 보여줘

옷 한 벌만 있는 줄 알았더니

너는 때 묻고 낡은 옷을 남모르게 바꿔 입더구나

떨어진 낡은 잎사귀 밑엔 버섯이 조용히 살고

 

한 그루 소나무를 완상하면서 시적 화자는 기억 속의 소나무를 떠올리고 있다. ‘새 생명’ ‘새순’ ‘푸른’

‘향이 좋’은… 이런 어휘를 연이어 반복하는 것은 대상에 대한 좋은 이미지와 그런 기억에 대한 회감(回感) 때문이다.

“새 생명이 태어나면” 너의 “푸른 가지를 문간에 내어 걸”었고 “보릿고개 초근목피로 연명할 때도” 소나무는 “새순을 피웠”다. 에서 화자의 소나무에 대한 고마운 마음이 역력히 드러난다. 옛날 사람들은 딸을 낳으면 오동나무를 심었고 아들을 낳으면 소나무를 심었다고 하는데 아들을 낳은 화자는 소나무를 심는 대신 아마도 솔청 가지를 내어 걸었던 모양이다. 가난한 시절이었지만 탄생의 기쁨은 덜하지 않아 푸른 솔가지로 자신의 기쁜 마음을 외부 사람들에게 알렸고 초근목피로 연명하는 사람들에게는 새순을 무럭무럭 피워 그들의 허기를 달래 주었다. 향기로운 아버지 목침이 되기도 하여 언제나 기쁨의 자리에 소나무는 함께 하였다.

어린 시절에는 이렇게 소나무가 온통 생명의 원천으로만 존재 했는데 이제 나이가 들어 바라보는 소나무는 그 때와 다른 모습 다른 양상을 지닌다. “곧게 뻗은 것보다 이상하게 굽어 자란 네가 더 멋있고” 그와 동일한 관점으로 “우리네 인생도 조금은 휘어 돌아가는 길이 여유” 있어 보인다. 시대가 흘러 먹고 사는 모습도 달라지고 그러한 풍경을 바라보는 화자의 시심도 여유롭게 변해간다. “내 님의 사랑은 철따라 흘러간다~”라는 대중 가수 양희은이 부르는 노래 가사도 있지만 어린 시절의 연한 속살 같던 소나무는 “용의 비늘” 같은 소나무의 강인하고 거친 외피의 모습으로 대조를 이루게 되었다.

순수어 ‘새순’이나 ‘새생명’, ‘향이 좋’은 으로 대변되는 소나무는 ‘껍질’, ‘용의 비늘’ ‘솟아오름’ 과 같은 욕망을 드러내는 사물로 변모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변해가는 풍경에 자신을 투사하여 바라보던 시적 화자는 곧 객관적 거리두기를 통해 새로운 성찰의 계기를 찾게 된다. “너한테 깜빡 속았다. 사시사철 푸른색 하나만 보여줘 /옷 한 벌만 있는 줄 알았”는데 “너는 때 묻고 낡은 옷을 남모르게 바꿔 입더”라고 발견을 통한 깨달음에 이르른다.

사물은 고정된 하나의 현상으로만 존재하지 않고, 사람 또한 고정관념에 물들지 않는다. 좋거나 즐겁거나 간혹 욕망의 무게로 자리바꿈하는 소나무, 단 하나의 의미나 이미지로 세상을 비추던 화자는 이제 시선을 확장하여 다른 사물에도 눈길을 돌린다. 그리하여 “떨어진 낡은 잎사귀 밑엔 버섯이 조용히 살고” 있더라는 전언을 남긴다.

시인 정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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