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시대 기본권의 충돌, 그 전제는 생명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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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시대 기본권의 충돌, 그 전제는 생명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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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0.09.08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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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칼럼] 이수석 / 프리랜서

 

지금 여기서 행복하게 살기

‘지금 행복하게 살아야지!’라는 마음으로 명예 퇴직했다.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다양하다. 가족들, 특히 아내의 반대는 심했다. 학생들의 돌발적인 질문에 나의 대답은 늦어지고 있었다. 재기발랄한 학생들의 언행을 미처 이해하지 못했다. ‘선생은 옳고 학생은 틀리다.’는 꼰대의 기질을 발휘하던 2019년 이었다.

‘박수 칠 때 떠나라!’ ‘흐르는 물이 못된다면, 너와 학생을 위해 교단을 떠나라!’는 선친의 말씀을 따라 나는 교단을 떠났다. 그리고 지금 나는 조금은 부끄럽고 미안하게도 행복하게 살고 있다.

 

‘8.15 광복 75주년 기념 개성∙연평도 평화선언’

소통과 화해와 평화를 위한 강화도 교사들의 모임활동을 하면서, ‘8.15 광복 75주년 기념 개성∙연평도 평화선언’ 참석차 8월 14~15일의 일정으로 연평도 평화여행을 다녀왔다.

8월 14일 연안여객터미널 12시. 남북한 평화를 염원하는 사람들 12명이 모였다. 그리고 연평도. 어촌 계장의 환영과 안내로 ‘연평도 포격 희생자 추모비에 헌화’, ‘연평도 망향비 추모’를 하고 <고려 개성정도 1101주년 > 역사·생태탐방을 하였다.

이병록 전 해군제독의 ‘연평도와 대만 중의 소삼통’이란 주제의 특별 강연을 시작으로 ‘평양 자전거 여행’, ‘한반도 평화전망’. ‘개성-연평도 서해 5도 비행기 관광’, ‘개성 연평도 개성 팔경, 서해팔경 문화체육 관광교류’에 대한 간단한 발제를 하고 <개성 연평도 평화선언 비전>이란 주제로 토론을 가졌다. 그리고 다음날인 15일에는 ‘연평도 조난 어업자 위령비 헌수’로 대추나무를 심고, ‘서해 평화수역 현장 체험’으로 구리동 해변을 산책하였다.

그리고 오후 5시 30분 인천 연안부두에 도착하였다. 이 시각 서울 광화문에선 전날 이야기했던 ‘8·15 광화문 집회’가 열리고 있다.

 

행복하기 위한, 기본권의 충돌

코로나 19의 위험스런 전염 상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런 집회를 여는 까닭은 무엇일까? 나와 ‘8.15 광복 75주년 기념 개성∙연평도 평화선언’ 참석자들이 연평도는 왜 갔을까? 왜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고 관철시키려 하는 것일까?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다. 국가는 국민들이,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며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기본권’으로 이를 보장해주고 있다. 자유권, 평등권, 사회권, 참정권, 청구권 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 기본권의 주장은, 개인과 개인, 개인과 집단, 그리고 집단 대 집단으로 충돌할 수 있다.

광화문 집회를 정부는 코로나 19의 집단감염 예방과 국민의 생명권 확보를 위해 불허하였다. 하지만 법원에서는 '법리적 해석'을 통해 허락했다. 기본권의 충돌이고 해석의 차이다. 중요한 것은 기본권의 전제는 ‘생명권’이라는 것이다. 내 생명도 중요하지만 다른 사람의 생명은 더욱 중요하다. 공동체 사회를 살아가는 국민들의 묵인된 약속이다. 이 약속을 어긴 광화문 집회는 그런 면에서 비판받아야 한다.

 

행복하기 위한, 기본권의 제한

대한민국 헌법은 국민의 기본권 제한의 필요성을 두고 있다.

<제37조 ② 국민의 모든 자유와 권리는 국가 안전 보장, 질서 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 법률로써 제한할 수 있으며, 제한하는 경우에도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인 내용을 침해할 수 없다.>가 그것이다.

이 세상 모든 것들은 변한다. 변하지 않는 것은 단 하나, ‘모든 것은 변한다.’는 말 뿐이다. 기본권은 시대마다 상황마다 다르게 변한다. 개인의 생명과 건강, 그리고 사회의 안전이 집회와 결사, 사상과 종교의 자유보다 우선한다. 그래서 광화문 집회는 잘못되었다. 안정화 되어 가던 코로나 19의 방역을 망가뜨렸다. 국민의 생명과 건강권, 경제활동을 위험에 빠뜨렸다.

 

양비론과 양시론을 넘어서, 지금 여기서 행복하기

'전쟁터에서 오십 걸음 도망한 사람이나 백 걸음 도망한 사람이나 전쟁터에서 도망친 것은 마찬가지다' 는 〈맹자〉의 《오십보백보(五十步百步)》의 논리가 있다. ‘그놈이 그놈이다.’는 이야기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며, 양비론과 양시론을 외치는 사람도 있다. 물론 전쟁터에서 도망친 것은 똑같이 비겁하고 잘못된 일이다.

그럼에도 최초의 원인자가 누구였는지, 왜 그리 하였는지, 누가 더 큰 벌을 받아야 하는지 시시비비(是是非非)는 제대로 가려져야 한다. 그것이 현재 우리가 살고있는 사회의 규범이다.

'정답(正答)이 아닌 정답(定答)을 찾고 추구하는 시대, 나와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한 정답(定答)을 찾는 시대'가 되기를 바란다. 어떤 때는 ‘선생이 틀리고 학생들이 옳을 수도 있다. 방송이 틀릴 수도 있고, 전문가가 틀릴 수도 있다.’는 열린 사고가 숨 쉬는 사회가 만들어 져야 한다.

그리고 이 나라의 어른들이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해를 떠나 옳은 것을 옳고, 틀린 것은 틀리다고 어른답게 말해야 한다. 언행을 일치시키며, 행복하고 평화롭게 사는 사회를 만들어 가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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