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림동 수도국산 달동네에 실망한 예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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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림동 수도국산 달동네에 실망한 예비신부
  • 권근영
  • 승인 2020.09.16 10: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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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림1동 181번지, 수도국산 달동네를 기억하며]
(19) 인구와 연희와 만남

<송림1동 181번지, 수도국산 달동네를 기억하며>는 1954년부터 1998년까지 수도국산 달동네 송림1동 181번지에 살던 정남숙님과 그의 가족들의 구술을 바탕으로 격주 연재합니다. 어린 시절을 송림동에서 보낸 남숙의 손녀 영이가 가족들을 만나 그 시절, 그 이야기를 듣고, 글로 옮깁니다. 어렵고 가난했던 시절, 서로를 의지해 살아가던 가족들의 이야기를 하나씩 풀어보려고 합니다.

 

서울 용산구 남영동에 위치한 충무공예가구. 일하는 남자들이 한 자리에 소란스럽게 모여있다. 창경원에서 보라색 원피스를 입고 서 있는 한 여자의 독사진을 앞에 두고 말이다. 기붕은 20대 초반의 여자를 알고 있는 것이 자랑인 양 조금 으쓱이며, 사진 속 여자가 옆집 아주머니의 조카라고 소개했다. 친구들에게 중매할 것이며, 자신은 그 여자에게 관심이 하나도 없다는 듯 말했다. 인구가 가만히 살펴보고는 정말 사진 속 여자한테 관심이 조금도 없냐고 물었다. 기붕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인구는 사진을 빼앗아 주머니에 넣었다. 여기 총각들이 많은데 왜 사진을 다른 데 갖고 나가려고 그러냐며, 내가 만나볼래! 하고 말했다.

여자에게 그 소식이 도착하기까지는 며칠이 걸렸다. 여자는 경상남도 진주 시내에서 버스를 타고 30분은 더 들어가야 하는 시골에 살고 있고, 집에 전화기가 없기 때문이다. 마을에서 전화기가 있는 집은 이장댁이 유일했다. 이장댁으로 전화가 오면 방송으로 누구 어르신, 자녀 누구에게 연락이 왔다는 내용이 확성기로 온 마을에 시끄럽게 퍼졌다. 이런 낯부끄러운 상황이 싫으면 시내에 나가서 공중전화를 이용하거나 편지를 쓰는 게 편했다. 서울 이모는 연희에게 편지를 보내왔고, 선을 보라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이모의 제안은 달콤했지만, 어떤 사람인지, 얼굴도 모르면서 당장 서울에 올라갈 수는 없었다. 연희는 일단 사진을 편지로 부치라고 했다. 편지가 서울에 도착하고 다시 답장이 오는데 2주가 넘게 걸렸다. 연희는 답장을 받고, 다음날 바로 기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갔다. 인구의 사진이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인구와 연희는 1982년 초가을에 서울 남영역에서 처음 만났다. 인구가 출·퇴근할 때 눈 여겨봐 두었던 고급 한정식집으로 안내했다. 비빔밥 두 그릇을 주문했는데 값이 꽤 비쌌다. 연희는 긴장되고 떨려서 밥이 잘 넘어가지 않았다. 한 그릇을 다 먹지 못하고 반이나 남기고 말았다. 인구는 연희에게 다 먹었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했더니, 반쯤 남은 밥그릇을 가져가서 남김없이 싹싹 맛있게 비벼 먹었다. 평소에 짜장면을 곱빼기로 먹을 정도로 식성이 좋기도 했고, 내심 거리감 없는 친근한 첫인상을 주고 싶었다. 연희는 깨끗이 비워진 그릇을 보며 털털하고 검소한 사람인듯한 호감을 느꼈다.

연희는 서울 성동구 옥수동 이모 집에 머물렀다. 방 하나에 부엌 하나 딸린 작은집에 이모, 이모부, 조카 둘이 살았고, 연희까지 다섯 명이 한 방에서 같이 지내기는 쉽지 않았다. 2~3일 동안만 서울에 있기로 했다. 인구는 일을 마치면 서울에서 데이트하고, 막차를 타고 인천으로 돌아갔다. 다음날 새벽에 일어나 남영동 충무공예가구에 출근하고, 퇴근하면 다시 연희를 만나러 갔다. 잠자는 시간이 줄었는데 이상하게 하나도 피곤하지 않았다. 조각하다가, 도시락을 먹다가 자꾸만 연희가 떠오르고 웃음이 나왔다. 인구는 연희가 경상남도 진주에 내려가 만날 수 없게 되었을 때 오히려 기운이 없고,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매일 집에 도착하자마자 편지가 왔는지부터 확인했고, 그리운 마음을 담아 밤마다 연희에게 편지를 썼다.

연일 우편함을 기웃거리고 서울 갈 궁리만 하는 연희에게 아버지가 물었다. 서울에서 만난 그 남자가 어떤 사람이냐고. 연희는 인구가 19살 때부터 조각 일을 배워 장롱이나 장식장 같은 가구에 무늬를 새겨 넣는 10년 차 된 기술자이고, 부모님과 함께 사는 착하고 성실한 장남이라고 말했다. 아버지는 시골에서 다섯 명의 동생을 챙기며 살뜰하게 살아온 연희가 혹여나 상처받을까 걱정했고, 도시에 사는 남자는 믿을 수 없으니 약혼식부터 올리라고 완강히 말했다.

1983년 2월 6일 서울에서 양가 가족끼리 모여 약혼식을 올렸다. 몇 주 뒤, 인구는 직장에 휴가를 내고 처음으로 경상남도 연희네 집에 가게 되었다. 지도에서 인천과 진주를 선으로 그어보며 막연하게 멀다고만 생각했는데, 직접 6시간 넘게 서울에서 기차를 타고 진주역에 내린 다음 중앙시장 옆에서 조그만 빨간 시외버스를 타고 장인 어른댁에 도착하니 거리가 몸으로 체감되었다. 피곤이 몰려왔다. 이 먼 거리를 그동안 연희가 자신을 만나기 위해 오갔다고 생각하니 고맙고 미안했다.

 

인구와 연희의 약혼식 사진 

 

다음날은 비교적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마루에 걸터앉아 처남과 바둑을 두고 있었는데 순간 갑자기 라디오에서 민방위 훈련 사이렌 소리와 함께 다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것은 실제 상황입니다. 이것은 실제 상황입니다. 미그-19 전투기를 몰고 북괴군 조종사 1명이…”로 시작하는 방송이 나오기 시작했다. 온 식구가 당황해서 이도 저도 못 하는 상황이었다. 그새 피난 보따리를 싸서 자식 손을 꼭 붙들고 이동하는 동네 사람도 보였다. 잠시 후 정부는 북한 공군 조종사 이웅평이 귀순하였다고 발표했다. 인구는 안도했지만, 전쟁을 경험한 연세 많은 부모님이 걱정되어 서둘러 인천으로 올라갔다.

인구는 연희에게 인천 동구 송림동 집에 한번 놀러 오라고 했다. 처음 소개 때부터 ‘인천 사람’이라고 했고, 편지 끝에 항상 ‘인천에서’를 덧붙이고, 자신을 ‘짠물’이라고 표현하며 남다른 인천 사랑을 표하던 예비 신랑이 사는 곳을 지금껏 가본 적이 없던 것이다. 시골에서만 살아온 연희는 인천이라는 곳을 조금은 동경했다. 서울과 가깝고, 바다가 있고, 일하는 사람이 많은 인천에 대한 막연한 환상이 있었다. 전철이 점점 서울을 벗어났다. 부평쯤 오니 아파트보다 논이 더 많았다. 동인천역에 내려서 송림동 쪽으로 걸었다. 수도국산 언덕 꼭대기에 집이 있다고 했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집들 사이로 난 골목을 지나 송림1동 181번지에 도착했다. 연희는 자신이 기대했던 인천이 아님을 직감했다.

나무로 만들어진 대문을 열고 들어가니 마당이 길게 나 있고, 끝에 푸세식(재래식) 화장실이 하나 있었다. 오른쪽으로 방이 네다섯 개 있었고, 연희는 방마다 세를 주는 줄 알았다. 그런데 방에서 인구의 외갓집 식구들이 나오는 게 아닌가. 첫 번째 방에는 둘째 시이모(혜숙)와 아들, 두 번째 방에는 셋째 시삼촌(경수)과 아이 셋, 세 번째 방에는 막내 시이모(인순)와 같이 사는 여자(선애)와 아이 하나. 나머지 방 하나에 인구네 다섯 식구가 살고 있었다. 열네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연희를 보기 위해 방문을 열고 나왔다. 연희는 황당했다. 시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건 알고 있었지만, 시이모와 시삼촌네 식구들까지 같이 사는 건 상상도 못 했다. 경상남도 진주 시골집보다 더 바글바글하고 징글징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가 차서 아무 말도 못 하고 인구를 바라보았다. 약혼을 무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연희는 착하고 성실한 장남이자 예비 남편인 인구가 미워졌다.

 

약혼 후 인구가 연희에게 보내는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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