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득권과 언어권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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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득권과 언어권력
  • 전영우
  • 승인 2020.10.29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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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우의 미디어 읽기]
(49) 공공기관의 영어쓰기

 

언어는 의사소통의 도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권력 유지 도구이기도 하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들 때 지배계급 양반들의 반대에 직면했다. 누구나 습득하기 쉬운 언어가 만들어지면 자신들이 독점하던 지식에 일반인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될 것이고, 곧 자신들의 권력기반이 흔들릴까 두려워해서였다. 그래서 지배계급은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자신들만의 언어로 소통하는 경향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한자가 언어 권력을 상징했다. 외국어인 한자가 지배계급 사대부 귀족들의 언어였던 것은, 서민들이 배우기 쉽지 않았기에 자신들의 권력구조를 공고히 하는데 유리한 도구였기 때문이다. 한글이 만들어진 이후에도 권력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한자에 통달하는 것이 필수였고, 재력을 갖춘 귀족들 자제만이 교육을 통해 지배 언어인 한자를 익히고 고급 정보와 지식을 습득하고 이용할 수 있었다.

정보를 전달하는 매체인 신문에서 한자가 사라진 것은 그리 오래 전이 아니다. 90년대까지도 신문에서는 한자가 혼용되었다. 신문이 완전히 한글로만 발행되기 시작한 것은 한글의 역사에 비하면 그야말로 최근 일이다. 가장 최근까지도 어려운 한자를 익혀야 정보와 지식에 접근할 수 있었던 것이다. 

기득권 유지 도구로서 한자의 효용성은 사회 변화에 따라 점차 소멸되었고, 근래에 지배계급이 기득권 유지 수단으로 사용하는 언어는 단연 영어이다. 영어가 과거 한자의 역할을 대체한 것인데, 더 많은 정보와 깊은 지식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영어가 필수이다. 조선시대에 한자를 익힐 수 있던 계층이 귀족계층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현대 한국 사회에서 영어를 효과적으로 습득하고 활용할 수 있는 계층은 자본과 권력을 갖춘 지배계급 자녀들이다. 영어를 사용하는 국가로 자녀를 일찌감치 보내서 교육시키는 조기 유학 열풍의 근저에는 배타적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기득권 계급의 의도가 깔려있다.

영어가 이렇듯 특수한 목적으로 사용되다 보니, 국민 편익을 최우선시해야 할 공공기관에서도 영어를 남발하고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공공 영역에서 영어가 빈번하게 사용되면서 새 귀족 지배 체제를 강화한다는 우려와 비판이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공공언어 개선의 사회철학 세우기”라는 주제의 토론회에서는 일반 국민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는 정책을 시행하는 공공기관에서 조차 무분별하게 영어를 사용하여, 마치 알아듣기 어려운 말로 위에서 일방적으로 명령하는 행태를 보이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용인시 동천역 앞의 Kiss & Ride라는 표지판이 대표적 사례로 지적되었다. 역 앞에서 배웅하기 위해 잠깐 차량을 정차할 수 있다는 의미의 표지판인데, 영어에 익숙한 사람조차 언뜻 이해하기 어려운 표지판이다. 어린이 식품 안전 구역을 의미하는 Green Food Zone 표지판은 정부에서 법령으로 시행하는 탓에 전국 1만여 학교 앞에 세워졌다. 

이런 현상은 표면적으로 민주주의 사회이지만 내면적으로는 교육과 학벌에 따른 사회 계층화가 굳어지고 있으며, 소수의 엘리트 집단이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것을 반영하는 것이라는 지적도 나왔다. 소수 엘리트가 정치와 사회를 지배하는 데 있어서 언어가 강력한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새로운 귀족들의 지배체제라고 할 수 있는 체제하에서 특별한 종류의 언어, 즉 영어를 사용할 수 있는 사람들이 공론장을 장악하고 배타적 권력을 휘두른다는 것이다. 곧 영어라는 언어가 신 귀족의 지배 수단이 된 것이다.

법조계에서 사용하는 언어나, 의료계에서 사용하는 언어를 보면 일반인이 이해하기 어려운 자신들만의 언어를 사용하여 일반인의 접근을 차단하고 자신들의 권력을 공고히 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법조계에서는 어려운 한자어와 이미 죽은 언어라 할만한 단어를 사용하여 일반인들이 법조문에 접근하는 것을 원천 차단하고 있으며, 의사들도 간단한 처방전에도 영어를 사용하여 일반인들이 혹시라도 쉽게 이해하지 못하도록 정보에 대한 접근을 차단하려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그나마 법조계나 의료계는 비교적 특수한 집단들이 자신들만의 권력과 이익을 지키기 위해 특별한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니, 백번 양보해서 그러려니 할 수 있지만,  공공기관에서조차 이해하기 어려운 영어를 남발하고 있으니 문제가 심각하다. 공공기관은 자신들이 일반 국민을 위해 봉사하는 기관이라는 사실을 명심하고, 쓸데없이 권위를 내세워 군림하려는 생각을 지워야 한다. 최소한 공공기관에서만큼은 서민들과 같이 호흡하고 서민들 눈높이에 맞춰서 일을 집행하는 것이 맞지 않겠는가. 공공기관 본연의 자세를 항상 잊지 않고 봉사하는 자세를 가다듬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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