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수의 지극 정성 막내 딸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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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수의 지극 정성 막내 딸 사랑
  • 권근영
  • 승인 2020.10.28 09: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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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림1동 181번지, 수도국산 달동네를 기억하며]
(21) 송림동에 살게 된 경수네 식구들

2020년 새 기획연재 <송림1동 181번지, 수도국산 달동네를 기억하며>는 1954년부터 1998년까지 수도국산 달동네 송림1동 181번지에 살던 정남숙님과 그의 가족들의 구술을 바탕으로 격주 연재합니다. 어린 시절을 송림동에서 보낸 남숙의 손녀 영이가 가족들을 만나 그 시절, 그 이야기를 듣고, 글로 옮깁니다. 어렵고 가난했던 시절, 서로를 의지해 살아가던 가족들의 이야기를 하나씩 풀어보려고 합니다.

 

1977년 왼쪽부터 혜숙, 남숙, 경수, 가운데 아이는 경수의 막내 딸 명화. 오른쪽에 아이는 동네 아이.
1977년 왼쪽부터 혜숙, 남숙, 경수, 가운데 아이는 경수의 막내 딸 명화. 오른쪽에 동네 아이.

 

땡전 한 푼 없이 아이 셋만 데리고 송림동 집에 들이닥친 경수를 보자 남숙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한때는 카투사로 미군 부대에서 돈도 잘 벌고, 이후엔 작은 구멍가게를 운영하며 껌과 초콜릿, 깡통 음식을 팔면서 장사 수완도 제법 있던 남동생이 아니던가.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세상을 등질 뻔했지만, 지극정성으로 돌봐 드디어 건강을 되찾았는데 이혼이라니. 남숙은 하늘이 노래졌다. 게다가 아무리 사랑에 눈이 멀었어도 그렇지. 모든 재산을 부인 앞으로 해 놓고 빈털터리로 쫓겨 온 모습에 할 말을 잃었다. 경수는 당분간 신세를 좀 지겠으니 방 하나만 달라고 했다.

다음 날 남숙은 경수의 첫째 명진과 둘째 명근을 데리고 송림초등학교에 가서 전학을 시켰다. 10년 전 즈음 남숙의 여동생 혜숙이 보따리를 싸 들고 갑자기 들이닥쳤을 때, 혜숙의 큰아들 해성을 송림초등학교에 전학시켰던 일이 떠올랐다. 새로운 학교에 와서 어리둥절한 것도 있겠지만, 갑작스럽게 변한 환경에서 말없이 고개만 푹 숙이고 있는 아이들을 보자 남숙은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어른들 때문에 고생하는 아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어서 가만히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경수는 며칠째 일은 구하지 않고 집에서 술만 마셨다. 술이 떨어지면 현대시장으로 내려가 막냇동생 인순이 하는 담뱃가게를 찾아가 돈을 달라고 했다. 인순은 진절머리가 났다. 서울 마포에서 만두 장사를 할 때도 찾아와 가판을 엎어버리고 행패를 놓던 게 싫어 도망 왔는데, 인천에서 또 만나게 돼서 끔찍했다. 여자 둘이서 장사한다고 겁박 주고 무시하는 꼴은 견디기 힘들었다. 경수가 깽판을 칠수록 인순과 선애는 바득바득 대들었다. 지난번처럼 당하고만 있지는 않을 거라며.

남숙은 경수에게 아이 셋 입에 풀칠이라도 해야 하지 않냐며 자신이 일하는 곳에 같이 나가보자고 권했다. 당시 남숙은 용광로 내부 벽돌을 만드는 공장에 다니고 있었다. 원래 일하던 와룡소주가 다른 회사에 팔렸기 때문이다. 사장은 서울 영등포에 있는 진로 회사에 가서 같이 일해보자고 제안했다. 남숙은 거절했다. 서울을 왔다 갔다 하는 차비와 시간이 아깝기도 했고, 원래 와룡회사 사람들과 하는 일이 좋아서 다녔기 때문이다. 남숙이 새로 구한 회사는 부평에 있었다. 회사에 경수를 소개했고, 그날부터 바로 일을 시작했다. 경수는 부평에서 일하기도 하고, 지방으로 파견을 나가기도 했다. 운동선수들이 많이 들고 다니는 이민 가방에 일복을 담아 나가는 날이면 며칠씩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경수의 막내 딸 명화가 4살이었다. 이민 가방이 집에서 사라지는 날이면 아빠가 언제 돌아올지 몰라서 불안하고 무서웠다. 울다가 잠들고 다시 깨서 울다가 잠들고를 반복하던 나이였다. 경수가 집에 돌아오면 명화가 경수를 꼭 껴안았다. 경수의 품에 꼭 파묻혀 킁킁 냄새를 맡고는 가슴을 쪼물딱거리다 잠이 들곤 했다.

경수는 명근이에게 항상 동생 명화를 잘 챙겨야 한다고 일렀다. 명근이는 말수가 적고 차분했다. 얌전하고 다소곳해서 남숙이 명근을 볼 때마다 꼭 엄마를 닮았다고 말했다. 남숙은 경수의 부인을 처음 만났을 때를 자주 떠올리며 묘사했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미장원에서 머리를 해서 아주 세련되었고, 마치 천사가 걸어오는 것처럼 참 아름다웠다고 말이다. 명근이는 어디를 가든 동생 명화를 데리고 다녔다. 동네 친구들과 놀 때도 꼭 명화를 데리고 갔다. 명화는 자연스럽게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언니 오빠들과 어울려 지냈다. 같이 놀던 영훈이와 영복이는 형제인데, 둘 다 축농증이 심했다. 누런 코가 흘러내렸다. 마늘을 구워서 코에 꽂으면 낫는다며 형제가 양쪽 콧구멍에 구운 마늘을 꼽고 돌아다니는 날이 많았다. 명화도 한 데 어울려 수도국산 달동네를 돌아다니며 까마중도 따 먹고, 사루비아(샐비어)도 빨아 먹으며 지냈다.

명화가 초등학교에 갈 나이가 되었다. 명화의 엄마는 입학 선물로 노란색 블라우스와 다홍색 멜빵 치마를 사서 송림동에 왔다. 예쁘게 차려입고 송림초등학교 입학식에 갔다. 명화는 멀리서 엄마가 빼꼼히 지켜보는 걸 보았다. 그게 명화가 기억하는 엄마의 마지막 모습이다. 오래 앓아온 지병으로 갑자기 쓰러졌고, 죽음과 동시에 외갓집과도 연이 끊기게 되었다. 명화는 너무 어려서 엄마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지만, 운동회 날이 되면 엄마가 그리워졌다. 운동회 하는 날에는 학교 앞에서 찐 밤을 하얀 명주실에 꽂아서 목걸이처럼 만들어서 팔았다. 명화는 운동회 나온 아이들이 그걸 목에 걸고 하나씩 까먹으면서 엄마가 싸 온 김밥을 먹는 모습이 너무 부러웠다.

경수는 엄마와의 추억이 적은 명화가 안쓰러웠다. 그래서 명화를 특별히 아꼈다. 술에 취해있는 날이 많았지만, 명화가 학교에 가기 전에는 꼭 깨워서 아침을 먹였다. 라면을 먹을 땐 만두랑 빨간 소시지를 썰어서 듬뿍 넣었다. 밀가루만 먹으면 배가 금방 꺼진다며 고기와 소시지를 먹이며, 속 든든하게 학교에 가야 한다고 말했다. 경수는 명화에게만큼은 특급 요리사였다. 먹는 것만큼은 잘 챙겨주고 싶었다. 한 번은 명화가 도시락을 깜빡하고 가져가지 않았는데, 경수가 그걸 들고 학교에 왔다. 명화는 그게 너무 부끄러워서 화를 냈다.

다음날도 경수는 명화에게 아침을 먹으라고 깨운다. 학교에 가기 전에는 속이 든든해야 한다고. 명화는 최고의 요리사가 챙겨준 아침을 먹는다. 명화는 미안하다는 말 대신 경수의 볼에 뽀뽀한다. 그리고 도시락을 들고 학교에 간다.

 

선화여상 졸업식 때 해성과 명화 그리고 인구
선화여상 졸업식 때 혜숙의 아들 해성, 경수의 막내 딸 명화, 남숙의 아들 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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