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 중단에 국가의 허락은 필요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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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 중단에 국가의 허락은 필요없다
  • 박교연
  • 승인 2020.11.04 0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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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칼럼] 박교연 / '페이지터너' 활동가

2019년 4월, 헌법재판소는 형법상 낙태죄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헌법재판소가 이런 결정을 내린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자기결정권은 인간이 자신의 삶에 관해 근본적 결정을 자율적으로 내릴 수 있는 권리이며 침해받을 수 없는 기본권이다. 하지만 형법 제27장 자기낙태죄 조항은 임신한 여성에게 임신의 유지·출산을 강제하고 있으므로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제한하고 있다.

둘째, 여성의 자기결정권이 보장되려면 임신한 여성이 임신의 유지와 출산여부에 대해 결정을 하고 실행함에 있어 충분한 시간이 확보되어야 한다. 즉, 여성이 임신사실을 인지한 후 자신을 둘러싼 사회적·경제적 상황을 고려하고, 국가의 임신·출산·육아 지원정책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고, 주변의 상담과 조언을 얻어 숙고한 끝에 낙태하겠다고 결정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또한, 실제 병원을 찾아가 수술날짜를 예약하고 수술에 필요한 검사를 다 마치는 데에도 추가적인 시간이 더 필요하다.

이런 점들을 고려할 때, 헌법재판소는 태아가 모체를 떠난 상태에서 독자적으로 생존할 수 있는 시점인 임신 24주 전에는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존중해야한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2020년 10월 6일, “정부가 7일 ‘낙태죄’에 대한 형법·모자보건법 개정안을 입법 예고한다”는 내용이 보도됐다. 내용을 살펴보니 24주는커녕 기존의 낙태죄를 유지하면서 오직 임신 14주까지의 임신중단만을 처벌하지 않겠다고 한다. 다시 말해 14주 이전까지만 무죄이고, 그 이후의 임신중단은 여전히 유죄라는 것이다.

<배틀 그라운드 : 낙태죄를 둘러싼 성과 재생산의 정치>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여성에게 죄책감을 주입하면서 임신·출산으로 침해당할 기본권을 국가가 보장하지는 않는다.” 임신을 여성 혼자 하는 것도 아니건만, 낙태죄는 죄책감과 수치와 낙인은 오로지 여성의 몫이라 말하고 있다.

개정 전 형법 제27장 낙태죄는 5가지 조항으로 나뉜다. 물론 임신과정에 참여한 남자는 어떤 조항에도 속하지 않는다. 여성을 처벌하는 ‘자기낙태죄’, 의사를 처벌하는 ‘업무상동의낙태죄’, 의사가 아닌 사람이 낙태했을 때 처벌하는 ‘동의낙태죄’, 당사자의 동의 없이 낙태시킨 사람을 처벌하는 ‘부동의낙태죄’, 수술 받은 여성이 상해를 입거나 사망하면 가중 처벌하는 ‘낙태치사상죄’. 이중 부동의낙태죄를 제외하면 철저히 계획에 없던 임신을 한 여성을 처벌하기 위해 만든 조항들이다.

그렇다면 입법 예고된 낙태죄 개정안은 어떨까? 14주를 제외하면 문제없을까? 그럴 리가 없다. 정부는 각국의 낙태죄 입법 사례에서 가져올 수 있는 모든 제한을 다 끌어왔다. ‘배우자 동의’ 하나만 빼고 곳곳에 독소 조항을 넣었다.

낙태죄 개정안의 핵심 메시지는 ‘형법 개정안 270조의2 3항’에 나온다. “임신한 여성이 모자보건법에 정한 상담 절차에 따라 임신을 지속, 출산 및 양육에 관한 충분한 정보를 제공받고 숙고 끝에 임신을 지속할 수 없다는 자기결정에 이른 경우”라는 말에서 우리는 정부의 의도를 읽어낼 수 있다. 정부는 어떻게든 여성에게 임신과 출산을 강제하고 싶어 하고, 여성이 자신의 몸에 대해 자기결정권을 자유롭게 내리는 걸 반대한다. 자기결정권을 행사하기 위해 정부로부터 정보를 제공받고 ‘숙고 끝에 결정’해야 한다니. 이는 여성이 정부의 개입 없이는 오롯이 한 인간으로서 성숙한 판단을 내릴 수 없다는 것처럼 들린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다. 그 어떤 형사법 조항도 숙고하란 말을 하진 않는다. 절도를 하지 말라고, 협박하지 말라고, 살인을 하지 말라고 얘기하지 절대 숙고하라고 말하진 않는다. 형법이 인간에게 생각을 강제하는 건 엄연한 기본권 침해이다. 한 인간의 자유로운 생각은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고유한 권리다. 심지어 역사에 길이길이 남을 독재자조차 말을 금할지언정 생각을 금하진 못 했다. 헌법을 정면으로 위배하는 ‘생각하라’는 명령은 오로지 상대가 임신한 여성, 임신을 중단하려는 여성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낙태죄 개정안의 극악한 조항을 모자보건법 개정안도 거들고 있다. 제14조의2를 보면 “여성의 인공임신중절에 관한 의학적 정보 접근성을 보장하고 반복적인 인공임신중절 예방을 위해, 시술 방법, 후유증, 시술 전·후 준수사항, 피임방법, 계획 임신 등에 관해 시술 전 의사의 충분한 설명 의무를 두고, 자기 결정에 따른 인공임신중절임을 확인하는 서면동의 규정 마련”할 예정이라고 한다. 즉, 임신중단을 위해 병원에 찾아간 사람은 앞으로의 피임과 계획임신에 대한 설명부터 들어야 하는 것이다.

피임에 대한 설명을 사후관리 차원으로 듣는 것도 아니고 임신중단의 요건으로 삼았다는 것은 굳이 그 의도를 설명할 필요도 없다. 이는 결혼 전까지 순결을 지키지 않고, 계획에 없는 임신을 한 여성을 비난하기 위함이다. 만일 피임했는데 임신했다면 뭐라고 할 건가? 아니, 그전에 왜 국가가 개인의 사생활에 대해 알아야하고 그걸 공문서로 남기기까지 하는 건가? 가뜩이나 계획에 없는 임신으로 몸과 마음이 다 지친 사람을 왜 몰아세우는지 알 수가 없다. 이로서 입법자들에게 임신과 출산은 결코 본인의 일이 아니며, 철저히 훈계의 대상이란 걸 알 수 있다.

심지어 제14조의2에 이어 제14조의3 1항을 보면 “의사의 개인적 신념에 따른 인공임신중절 진료 거부를 예외적으로 인정”한다는 말이 나온다. 이 조항으로 인해 임신중단은 개인의 판단에 의해 얼마든지 거부해도 되는 문제가 된다. 모든 의료법에는 정당한 사유 없이는 진료를 거부할 수 없다는 조항이 있는데, 유독 임신중단만이 신념의 문제며 가치판단의 영역으로 들어간다. 다른 나라에서는 설령 의사의 거부권을 인정하더라도, 반드시 인공임신중절이 가능한 의료인에게 연계할 의무를 같이 규정한다. 이를 실질적 연계 의무라고 한다.

환자의 치료받을 권리를 인정하고, 본인으로 인해 의료절차가 지연되지 않게 하는 것이 바로 의사의 의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부는 1항에 이어 2항에 이렇게 적어놓았다. “의사는 시술 요청을 거부하는 즉시 임신의 유지·종결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는 임신·출산 상담 기관을 안내하도록 규정”한다. 이 때문에 임신중단을 하겠다고 병원에 간 사람은 다시 상담소로 돌아가게 됐다. 거기서 또 270조의2 3항에 따라 “모자보건법에 정한 상담 절차에 따라 임신을 지속, 출산 및 양육에 관한 충분한 정보를 제공받고 숙고”하다보면, 시간이 지연되고 임신중단이 합법적으로 가능한 14주를 넘길 수 있다.

이런 경우엔 어찌할 건가? 낳으라고 말할 건가? 어제까진 위법이 아니었으나 오늘부터는 위법이니까? 진즉에 관련법을 잘 알고 대비를 했었어야지? 당신을 임신시킨 남자는 무죄지만, 당신은 여자니까 유죄?

실효성도 없고, 헌법에 정신을 모독하는 개정법은 당장 개정해야한다. 오직 평생 원치 않는 임신으로 고통 받을 가능성이 없는 사람만이 이 개정법에 찬성할 것이다. 낙태죄 폐지 때마다 언급되는 ‘낙태 남용’은 얼토당토 않는 말이다. 낙태죄의 유무와 관계없이 시술 혹은 수술을 겪는 건 여성의 몸이고, 그 과정 속에서 고뇌하는 건 여성의 정신이다. 애당초 여성은 원치 않는 임신 자체를 겪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피치 못하게 임신이 됐을 때, 여성에게는 한 명의 존엄한 인간으로서 자신의 삶과 관련된 문제를 온전히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있어야한다.

그리고 거기에 국가의 허락은 필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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