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를 잘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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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를 잘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 전영우
  • 승인 2020.12.24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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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우의 미디어 읽기]
(57) 과도한 영어 집착

영어권에서 제작한 영화에 출연한 아시아 배우들, 그중에서도 특히 한국과 일본의 배우를 보면 묘한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바로 영어 발음이다. 대부분의 일본 배우들은 일본식 악센트를 가진 영어 대사를 구사한다. 반면 한국 배우들은 가급적 미국식 악센트 즉 미국 발음을 그대로 따라 하는 대사를 한다. 

그러니까 일본 배우들은 일본어 억양의 영어를 구사함으로써 자신이 일본인이라는 정체성을 드러내고 있는데, 한국 배우들은 미국인과 구별하기 어려운 영어를 구사하기에 굳이 한국인의 정체성을 표면적으로 드러내고 있지 않다. 미국 영화에는 아시아계 미국인 배우가 많이 등장하기에, 한국 배우가 매끄러운 본토 발음을 구사하면 한국인의 정체성은 드러나지 않는다.

이런 차이점은 아마도 양국의 배우가 맡은 역할의 차이에 기인하는 점이 크다. 즉 영어권 영화에 등장하는 일본 배우는 일본인으로 등장하기에 굳이 매끄러운 영어를 구사할 필요가 없고, 오히려 일본인임을 나타내는 억양을 구사해야 한다. 반면 한국 배우들은 굳이 한국인의 정체성을 강조하지 않아도 되는 배역을 주로 연기하는 듯하다. 따라서 언어 측면에서 영어권 배우들과 구별되지 않고 자연스러운 미국식 영어를 구사하는 편이다. 외국인으로서의 일본인을 나타내야 하는 배역과, 굳이 한국인임을 내세울 필요가 없는 배역이 가져온 차이라 보겠다. 

또 다른 측면에서 조명해 본다면, 한국 배우들은 영어권 국가의 교포 출신도 많고, 적극적인 해외 활동으로 영어에 매우 능통한 배우들이 많은 반면, 일본의 경우 해외 진출이 그렇게 활발하지 않다는 점도 고려해 볼 수 있겠다. 국제화 측면에서 한국은 오래전부터 영어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특히 미국식 발음의 영어회화에 지나치게 집착했던 측면도 있다. 영어에 관한 일종의 강박관념이 심했다.

영어에 관한 이런 집착은 국제 경쟁력을 강화했기에 오늘날 한국의 번영을 가져왔다고 할 수 있겠으나,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강남에서 어린아이에게 미국식 영어 발음을 수월하게 하기 위해 혀 수술을 시켰다는 보도도 있었으니, 과도한 집착의 폐단이다. 아무리 영어가 중요한 언어라 해도 오로지 미국식 발음을 따라 하기 위해 어린아이에게 수술까지 시킨다는 것은 엽기적인 일이다. 이런 과도한 영어 집착은 외국의 언론에 보도되기까지 했다.

영어에 관한 집착은 언어가 갖는 속성과 무관하지 않다. 외국어를 배우고 습득하는 능력은 선천적인 측면도 있지만, 집안의 환경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단순하게 말해서 어릴 때부터 외국어에 자연스럽게 노출될 기회가 많거나, 아예 외국 생활을 하거나 외국 학교에 다닐 수 있는 환경의 학생은 그런 기회가 없는 학생보다 더 월등한 외국어 능력을 가질 수밖에 없다. 즉 언어 능력, 특히 외국어 능력은 집안 환경에 크게 좌우된다는 말이다.

이런 사실은 외국어 특히 영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사람을 우대하는 사회에서는 뛰어난 장점이자 경쟁력으로 작용한다. 이것은 곧 계급의 고착화를 상징하기도 한다. 지적했듯이 영어 실력은 재력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재벌이나 상류층 사람들은 대부분 영어권 국가에서 학교를 다니고 아예 원정 출산 등으로 외국 국적을 가지고 있는 경우도 흔하다. 외국 한번 안 가보고 영어를 열심히 습득해서 잘하는 사람도 물론 있겠으나, 출신 집안 환경에 따라 애초 출발점부터 불공정한 것이 사실이다.  

대학 입학시험에서 외국어인 영어의 비중이 이렇게 크고 중요한 나라도 드물 것이다. 대학 입시는 물론이고 직장에 취업할 때도 토플이나 토익 점수는 필수이다. 영어와 전혀 관련 없는 직종의 인재를 채용할 때도 영어 점수가 지원자의 역량을 판단하는 중요한 척도가 되고 있다. 과도하게 영어를 중요시하는 풍조의 부작용이다. 이는 또한 재력을 가진 집 자녀에게 유리한 환경을 만들어 부와 권력이 자연스럽게 세습되는 환경을 만드는 것에 일조하고 있다.

외국어는 필요한 사람만 잘하면 된다. 지금처럼 모든 국민이 영어를 잘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질 필요가 없다. 과거 한국의 지식 환경이 열악하던 시절에는 영어로 된 원서를 읽어야 했기에 영어 능력이 중요했을지 몰라도 지금은 웬만한 서적은 한국어로 번역되어 나오고 있다. 특정 전문분야의 소수 전문가들에게는 아직도 영어가 필수일 수 있으나, 대다수 대중들이 지금처럼 영어 능력으로 자질을 평가받을 필요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부터라도 대학입시에서 영어의 비중을 줄여나가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구글 번역기 등 다양한 번역기가 거의 완벽에 가깝게 모든 외국어를 번역해주는 세상인데, 이제는 영어 강박증에서 벗어날 때도 되지 않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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