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복 유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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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복 유감
  • 공주형
  • 승인 2011.05.23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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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칼럼] 공주형 (미술평론가, 인천대 기초교육원 초빙교수)

지난 4월 서울시내 한 유명 호텔 뷔페 레스토랑에서 한복을 입은 여성 고객이 입장을 거부당한 사건에 사회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호텔 측은 밥값을 치르고 밥을 먹겠다는 그 고객의 드레스코드(복장 규정)를 문제 삼았다. 당시 거절당한 드레스코드는 한복이었다. 호텔 측이 뷔페 출입에 부적절한다고 내부적으로 판단하고 있는 복장에는 트레이닝복과 함께 한복이 들어 있다는 얘기가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더 어이없는 것은 해당 호텔이 자신들의 홈페이지에 ‘전통과 모던의 결합’을 추구하는 호텔이라고 자부한다는 아이러니이다.

드레스코드가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것은 비단 21세기 서울 한복판의 일만은 아니다. 1865년 프랑스의 미술대전 살롱에서 드레스코드로 인해 최악의 스캔들이 된 그림이 있었다. 인상주의의 거장 마네(Eduard Manet 1832~1883)가 그린 〈올랭피아〉가 바로 그 소란의 주인공이었다.


마네, 올랭피아, 1863년, 103.5x190cm, 캔버스에 유채

그림 속 여인은 목걸이와 슬리퍼만 신고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누워 있다. 이 그림을 바라보는 19세기 당시 프랑스 사회의 시선은 마치 점잖은 파티에 홀로 선정적인 ‘바니 걸’ 복장을 하고 나타난 의외의 인물을 대하듯 차가웠다. 하지만 당시 이런 드레스코드라고 해서 미술계에서 모두 조롱의 대상이 된 것은 아니었다. 

1863년 카바넬(Alexandre Cabanel, 1823~1889)과 1879년 브궤로(William Bouguereau, 1825~1905) 그림 속에도 〈올랭피아〉와 같은 드레스코드의 인물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이들은 미술 동네에서 마네가 문전박대를 당한 것과 달리 열렬한 환호 속에 무사통과한다. 동일한 드레스코드에 대해 어떤 화가의 그림은 복장을 이유로 선정적이라고 비난을 받고, 다른 화가의 그림은 숭고하다고 극찬을 받았다니 그 판단의 잣대가 궁금해진다.


카바넬, 비너스의 탄생, 1863년, 130x225cm, 캔버스에 유채

이유는 이렇다. 당시 여성의 누드는 그 대상이 종교와 신화 속 존재일 때에만 그리도록 허용되었다. 따라서 많은 남성 화가들은 숱한 여성 누드를 그리면서 이들이 현실 속 인물이 아님을 각인시키는 장치를 잊지 않았다. 당대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카바넬과 부궤로의 그림을 보면 어김없이 날개 달린 꼬마가 등장한다. 이들의 존재를 통해 화가들은 그림 속 여인이 옆집 아무개가 아니라 신화 속 여신임을 분명하게 전달하고자 했다.

그렇다면 〈올랭피아〉를 보자. 그 옆에는 비너스의 동반자인 사랑스러운 에로스 대신 꼬리를 빳빳하게 치켜세운 검은 고양이가 등장한다. 동시대인들은 화가가 위반한 것이 단순히 드레스코드가 아니라 시대의 금기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격양된 목소리로 한 가지 질문을 던졌다. ‘대체 이 음란한 여인은 누구인가?’ 물론〈올랭피아〉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몰라서 던진 질문은 아니었다.


부궤로, 비너스의 탄생, 1879년, 300x215cm, 캔버스에 유채

1853년부터 1870년까지 프랑스 파리는 대대적인 도심 재개발이 진행되었다. 효율적인 폭동과 반란의 진압이라는 재개발의 목적은 파리의 환경 개선이라는 명분으로 포장되었다. 새롭게 파리 시장이 된 오스망((Baron Georges Eugene Haussmann, 1809~1991)은 파리 도심 개발 사업에 박차를 가했고, 그 결과 파리는 한결 쾌적한 도시로 탈바꿈했다. 새롭게 분위기를 쇄신한 도시는 쾌락을 찾는 이들로 북적거렸다.

공공연한 성매매가 등장했고, 점원이나 세탁부 같은 직업을 가진 일부 여성들도 성매매로 돈을 벌었다. 또한 상류층 남성들은 은밀한 쾌락을 즐기기 위해 그녀들에게 집과 생활비를 제공하는 경우도 있었다. 마네가 그린 것은 성매매 여성인 동시에 바로 그런 사회의 현실이기도 했다. 그림 속 비너스의 실제 모델이었던 그들을 여신과 요정으로 그려낸 화가들과 이들을 옹호하던 미술계 그리고 그런 그림에 위안을 받았던 당대인들에게 이 그림은 불쾌한 진실이었을 것이다.〈올랭피아〉는 말랑말랑한 거기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여기의 불편한 현실이었기 때문이다. 

유명 호텔 뷔페 레스토랑의 드레스코드 사건 후 해당 고객이 유명한 한복 디자이너였다는 신분도 밝혀졌고, 호텔 측에서 즉각 사과했다는 후일담도 전해졌다. 한복 사건의 논란의 초점은 우리 것에 대한 홀대에 대한 비판에 초점이 맞추어졌지만, 이 사건이 한복 입은 고객에게 할인 혜택을 주는 등 속 보이는 경쟁 업체의 이벤트에 그치지 않기를 바란다. 부디 이 사건이 명절 즈음 연례행사처럼 우리 것의 소중함에 대한 띄엄띄엄한 호들갑이 아니기를 바란다.

‘눈앞에 놓인 시대의 위선을 외면할 수 없어 결코 신화나 역사로 돌아가지 않겠노라’고〈올랭피아〉로 선언했던 마네가 그러했듯, 우리가 직시해야 할 것은 우리 현실 속 수많은 ‘벽’으로 존재하는 ‘문’의 안과 밖 문제여야 할 것이다. 그래서 헤아려 볼 일이다. 나의 편의적 잣대로 누군가의 밥 먹을 기회를 박탈한 경험은 없는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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