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의 미국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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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의 미국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
  • 전영우
  • 승인 2021.01.14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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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우의 미디어 읽기]
(60) 소외됐던 사람들의 분노 대변했던 트럼프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던 날, 업무차 방문했던 베트남 호찌민의 어느 식당에서 쌀국수를 먹고 있었다. 옆자리에는 초로의 백인 남성이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영어를 할 수 있냐고 내게 묻더니 대화가 가능한 것을 확인하자 자신을 은퇴한 미국인이라 소개하고는 트럼프의 당선에 대한 견해를 물었다. 

처음 만나는 미국인과 미국 정치에 대한 논의를 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기에, 한국도 CEO 출신 대통령을 뽑아 봤었는데 결과가 별로 좋지 않았었다고 짧게 답하고는 식사를 계속하려 했다. 그런데 얼마나 트럼프의 당선이 기뻤는지 그가 식사 내내 계속 옆에서 트럼프 찬양을 늘어놓아서 매우 곤혹스럽고 쌀국수가 체할 지경이었다. 너무 흥분하여 다소 과하게 트럼프 찬양을 해서 주변 테이블 사람들이 그에게 노골적으로 눈치를 줄 정도였다.

당시에는 왜 평범한 미국인이 동남아 국가 식당에서 낯선 이방인에게 그렇게나 트럼프 찬양을 늘어놓았는지 이해하지 못했는데, 미국 의사당에 난입한 트럼프 지지자들의 뉴스를 접하고 그들의 정서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트럼프 열성 지지자들은 경제적으로 어렵고 소외된 백인들이 많고, 이들은 그동안 기존 정치권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대변하지 못했고 차별받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단순히 공화당이나 민주당, 즉 보수와 진보라는 성향과는 관계없이 미국 사회에서 상대적 박탈감을 오랫동안 느껴왔고 철저히 무시당해서 무기력했던 사람들이다. 정치권에서 자신의 입장을 대변해줄 사람을 찾지 못했고, 그저 조용히 묵묵하게 경제적으로 넉넉지 않은 삶을 꾸려왔던 사람들이다. 트럼프는 그런 그들에게는 혁명이었고, 혁명을 이루었다는 사실에 감격스러웠던 그가 먼 이국땅 베트남의 식당에서 누구 건 붙잡고 그 기쁨을 나누고 싶어 했던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미국은 얼핏 자유와 평등의 나라라고 착각하기 쉽지만, 사실 매우 계급적인 나라이다. 돈과 권력을 가진 자와 못 가진 자간 차이가 극명한 나라이다. 지배 엘리트 계급은 그들만의 리그를 철저하게 유지하고 있으며 일반 서민들이 그 구조에 편입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흔히 아메리칸드림이라 포장되어 누구에게나 평등한 기회가 주어지는 기회의 땅인 것처럼 묘사되지만, 현실은 철저하게 계급체계로 유지되는 엘리트 사회이다. 

미국 지배층을 구성하는 이들 엘리트들은 자유, 평등, 아메리칸드림으로 상징되는 미국의 이미지를 만들어 기득권 유지에 활용하고 있다. 세계에서도 가장 심한 부의 편중과 불평등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미국 사회가 비교적 평온했던 이유이다. 하지만 억눌린 불만은 차곡차곡 쌓였고, 소외되고 좌절한 대다수 일반 서민들의 쌓인 불만이 폭발했던 것이 트럼프의 당선이었다.

기존 정치인과 전혀 다른 완전한 아웃사이더인 트럼프는 정확하게 판을 읽고 이들에게 어필할 메시지를 계속 던졌고, 그 결과 트럼프는 소외되었던 사람들의 분노를 대변하는 대변인으로 자리 잡았다. 그런 충성 지지자들은 이번 선거 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고, 바이든의 당선을 저지하기 위해 사상 초유의 국회의사당 난입과 점거라는 행동을 보이고 있다.

트럼프는 비록 이번 선거에서 졌지만, 충성 지지층이 공고한 현실로 볼 때 앞으로도 그는 미국 정치에서 중요한 상징으로 자리 잡을 것 같다. 새로운 정당을 창당할 가능성도 충분히 있으며, 어쨌거나 미국 사회의 정치지형은 이제 과거와 사뭇 다를 것이라 보인다.

이런 미국 사회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 크다. 동일하게 소외되고 박탈감을 느끼지만 자신들을 대변해 줄 정치 세력이 존재하지 않기에 그저 숨죽이고 하루하루 고달픈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은 한국에도 많다. 시끄럽게 떠드는 목소리에 가려서 보이지 않고 느껴지지 않을 뿐, 평범한 우리 이웃들의 좌절은 소리 없이 쌓이고 있다.

180석이라는 의석을 몰아주어도 여전히 개혁이 지지부진하다고 느끼고 절망한 다수의 쌓인 불만이 한국에서도 트럼프와 같은 인물로 표출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권력은 이미 시장에 넘어간 지 오래인 것은 알고 있지만, 그래도 뭔가 개혁의 노력이라도 가시적으로 보여야 할 텐데, 그저 답답하기만 한 사람들이 상당히 많다. 개천에서 용이 나는 것은 이미 불가능하다는 현실은 받아들인다 해도, 염치없는 엘리트들의 노골적인 기득권 지키기는 더 이상 지켜볼 수 없다는 불만이 쌓이고 있다.

최근 차기 대권 주자들 중 이재명 지사의 지지율 변화가 두드러진 것은 그런 의미에서 시사하는 바 크다. 혁명적 변화까지는 아니어도, 의미 있는 변화를 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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