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의 기의, 한 무정부주의자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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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의 기의, 한 무정부주의자의 기억
  • 정민나
  • 승인 2021.01.21 16: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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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나의 시마을]
도돌이표 엄마 - 박완호

 

 

도돌이표 엄마

                                        박완호

 

엄마를 떠올릴 때마다

자꾸 뒷걸음질을 쳐요

한 발짝만 뒤로 가도

바로 열다섯,

열 걸음 스무 걸음을 가도

또 그 자리,

엄마는

첫 소절만 부르다 마는 노래처럼

도돌이표로 떠오르고

엄마보다 늙은 나는

날마다 무럭무럭 자라나요

 

가족 이야기는 주로 현대인이 맺는 가족의 ‘관계’와 ‘사건’에 초점을 맞춘다. 그런데 박완호의 가족 이야기는 가족의 기원과 그에 대한 상흔, 그리고 그 후일담을 담고 있다. ‘어머니’혹은 ‘엄마’라는 기표는 대체로 ‘헌신’과 ‘사랑’의 기의(記意)를 포함하고 있지만 박완호 시인의 이번 시집 『누군가 나를 검은 토마토라고 불렀다』에서 드러나는 ‘엄마’는 대개 ‘부재’의 의미로 ‘가족 해체’나 그로 인한 결핍된 자아를 드러내는 기제로서 작용한다. 가령 「乙」이라는 시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사랑의 판에서 나는 언제나 을이었네/사랑한다는, 안녕이라는/첫 마디는 한 번도 내 몫은 아니었네//나는 다만/사랑이라는 말의 무한생산자이거나/낯선 기도문 앞에서 머뭇거리는 순례자였을 뿐,//그러니 사랑이여,/또 너를 위한 노래를 부르게 해 다오//깨물린 혀로 불빛을 스치는 바람 소리처럼,/영원의 어깨를 짚고 저물어가는 고요처럼,//창백한 글자들로 애인의 아침을 일으키기까지는//사랑에 눈먼 청맹과니가 되어/홀로 밤길을 헤매어도 좋으리- (박완호 「乙」 전문)

헤르만 헤세는 “시는 생명을 가진 영혼이 스스로를 보호하고 감정과 경험을 깨닫기 위해 표출하는 방출, 외침, 울부짖음, 한숨, 몸짓, 반응”이라고 했다. 사랑의 판에서 자신은 언제나 乙이었다는 시인의 고백은 세계와 존재에 대한 상실과 상처에 대한 이야기가 된다. 그의 시 「별책부록-K」에서도 “신이 인간을 만든 까닭은 외로움을 견디기 싫어서였을 거야 / 텅 빈 우주. 저 혼자 밖에 없는 / 공허를 감당하기 버거웠던 탓일 거야”라고 표출한 바 이 부분에서도 이 시 「乙」의 2연 3행에 묘사된 “낯선 기도문 앞에서 머뭇거리는 순례자, 곧 시인의 모습이 엿보인다.

단편적으로 드러나지만 그의 외로움과 슬픔의 연원이 가족이라는 사실은 「모르는 쪽으로 고개가 돈다」, 「엄마를 버리다」, 「도돌이표 엄마」, 「몸빛 아버지」, 「쑥꽃」 등에서 찾아 볼 수 있는데 시인은 자신 안에 폐칩(閉蟄)하고 있는 가족들을 꺼내 놓으며 내면화된 아비투스habitus를 조정하고 있다.

현대에 새롭게 상용되는 언어 중에 ‘키덜트’가 있다. 아이[kid]와 어른[adult]를 합한 ‘키덜트’는 “몸은 어른이지만 아이의 심상을 간직한”이란 의미를 지닌다. 순수한 아이의 이미지와 이성적 어른의 이미지를 동시에 표출하는 것이 ‘키덜트 문학’이라고 한다면 박완호의 이번 시집에도 그런 요소들이 엿보인다.

“피톨처럼 묻은 알갱이들, 엄마, 라고 하면 상투적인 것 같아 다른 발음으로 부르고 싶어지는”(「토마토 베끼기」), “보육원을 막 빠져나온 열아홉 살이 끝인지 시작인지 모를 걸음을 길 위에 얹다 말고 엄마, 사전에 없는 단어를 발음하듯”(「모르는 쪽으로 고개가 돈다」), “저만치 엄마가 혼자 흔들리는 게 보이나요. 난 아직 멀었다는 말이지요. 내일도 오늘처럼, 난 엄마를 버리러 또 어디든 가야만 하는걸요.”(「엄마를 버리다」)…

이렇게 ‘상처받기 쉬운 섬세한 관계’를 지시하는 언어로 ‘엄마’라는 시어가 시집 곳곳에서 보이지만 이것은 책임져야할 성인으로서 자신의 삶에서 도피하려는 행위로는 보이지 않는다. 다시 말해 성숙의 여부를 가늠하는 차원에서 ‘키덜트’라고 명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엄마’라는 기의는 그동안 자신 안에 박힌 채 빠져 나오지 못해 마찰하고 충돌을 일으켜온 근원적인 상처’를 가리키지만 존재론적 층위의 바깥에서 ‘엄마’를 호명하는 행위, 이것은 아픔의 싹을 제거하거나 상처를 해소하려는 적극적인 행위로 볼 수 있다. 이러한 행위를 통해 시인은 새로운 소통의 관계를 모색할 수도, 성숙의 계기를 가질 수도 있는 것이다. 이 시집 전체를 통해 그는 원초적인 외로움을 술회하고 있지만 시인 자신의 내면에서 뛰쳐나오는 이러한 감성적 언어는 역설적으로 ‘치유’라는 새로운 가능성의 공간을 만든다.

장자는 ‘수영 이야기’에서 “물이 소용돌이 쳐서 빨아드리면 저도 같이 들어가고 물이 자기를 물속에서 밀어내면 저도 같이 그 물길을 따라” 밖으로 나온다고 하였다. 박완호 시인 역시 “좋은 타자는 공의 결을 거스르지 않”고 “투수가 던진 공의 결을 따라 / 그대로 당겨 치거나 밀어” 친다고 하였다. 아나키즘은 국가주의(모든 근거나 근원의 토대)에 반항하는 자가 아니고 ‘자유’ 다시 말해 자신을 가두는 모든 국경을 지우는 행위라 할 수 있다. 마치 영국의 시인 예이츠가 비록 자신은 쓰레기나 고물상 같은 현실의 삶을 좋아하지 않지만 ‘고철’이나 ‘낡은 뼈’와 ‘찌그러진 캔’ 같은 경험의 그늘 안에 감춰진 언어들을 사랑한다는 것과 같다. 그것들이 절묘하게 성찰과 창조적인 시인의 삶의 일부가 되게 한 것처럼 이러한 것은 바로 박완호 시인의 역설적 경험 그 자체와 같고 이 과정에서 시인이 그 심원한 감정을 담아 쓴 치유적 글쓰기와 흡사한 예가 된다.

“풀잎의 결을 따라 바람은 불고 / 바람이 부는 결을 따라 풀들도 / 싱싱해진 어깨를 연신 우줄거리지 / 세상 살아가는 일이 뭐가 다를까”(「결」)… 따라서 시인이 자신의 외부적 현실을 새로운 현실로 변주하는 방식을 알아보는 일은 “좌초할수록 아름다운 혁명의 뒤안길을 걸어가는 / 한 무정부주의자의 엇박자 섞인 발소리”(「한 무정부주의자의 기억-W)를 듣는 일과 같다.

시인 정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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