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 버스를 실어나르던 엠보트 - 추운 겨울 갑제호 뒷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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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버스를 실어나르던 엠보트 - 추운 겨울 갑제호 뒷이야기
  • 이효철
  • 승인 2021.02.05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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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칼럼]
이효철 / 실버미추홀신문 기자

얼마 전에 인천 바다가 얼었을 때 강화로 가던 갑제호가 얼음에 부딪쳐 침몰했던 1963년도 겨울 이야기를 쓴 적이 있다. (1.7일자 독자칼럼 - 그해 그 추운 겨울바다의 기억) 그 글 중에 당시 그 배를 탔었던 고교 동창 김일섭의 이야기가 나온다. 김일섭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모임에서 계속 만나는 절친한 사이로 오십 년 이상 사귀어온 벗이다.

그 글에서 갑제호가 침몰할 당시의 이야기를 자세히 적을 수 있었던 것은 고교시절에 들려줬던 일섭이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갑제호 침몰은 추위가 극심했던 1963년 2월6일 일어났다. 그 2월6일에 맞춰 다시 그 시절을 회상한다.

지난 1월7일자 인천in에 올린 글을 고교 동창 카페에 올렸다. 그리고 그 후 동창들과 부부동반 모임을 가졌는데, 일섭이 한 마디 했다.

“효철아, 네 글 보고 정말 놀랬다. 너는 나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갑제호 이야기를 나보다 더 생생하게 글로 썼더라.” 하고 말했다.

“야 일섭이 네가 나한테 이야기 한 그대로 적었을 뿐이야. 그때 네 이야기 들으면서 그 사고 나기 며칠 전에 나도 강화에서 인천 올 때 갑제호를 탔고 네가 있었던 자리에서 바다구경 했다고 너한테 말 한 기억도 있는데.......”

“그래? 응? 그래, 그래....... 네가 이야기하니 글쎄 그런 이야기 기억나는 거 같기도 하고....... 하여튼 너 기억력 한번 대단하다.”

“그건 말이야. 내 기억력이 대단한 것이 아니고........ 내가 그 일은 그 후 갑제호가 인천항에 끌려온 후에도 일부러 구경갔다올 정도로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네 이야기도 기억하고 있을 거야. 그날 갑제호에 올라가보니 말이다 겉으로는 말짱한데 구멍 난 앞쪽 선실은 연탄난로가 뒹굴고 있고 짐들도 어지럽고 그렇더라. 배 앞에 뚫려있는 구멍은 우리 머리는 들어가도 몸은 안 들어갈 정도로 크지 않은 거 같았는데 그 바람에 배가 가라앉았다니 실감 안 나데....... 나중에 갑제호가 다시 운항할 때 보니까 그 뚫렸던 자리에 철판을 덧대서 리벳박고 용접한 것도 기억한다.”

이렇게 하여 자연스럽게 그때의 이야기가 다시 이어지기 시작했다.

다른 친구 하나도 그때 입학시험 치르러 강화에서 인천으로 올 때의 고생담을 꺼낸다.

입시 전날 인천으로 오려면 갑곶나루를 건너야 하는데 성애(늦겨울 한강 얼음이 풀려 바다를 메우는데 그 얼음 덩어리를 성애라 한다.)가 심해 배가 건너지 못해서 그 추운 날 종일 갑곶에 나와 기다려야 했다. 그러다 많은 수험생과 학부형 그리고 선생님들은 다시 강화읍의 여관에서 그날을 지내고 시험 당일 새벽에 다시 갑곶까지 나와 그 아침 특별히 운행된 해병대의 배로 사람들만 바다를 건넜단다. 그리고 건너편에서 버스 두 대를 대절하여 수험생들과 인솔교사를 각각 싣고서 먼저 인천으로 달려 시험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고 했다.

사실 그 이야기는 그날 처음 듣는 이야기도 아니지만 그래도 모두 재미있게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우리며 옛적을 회상한다. 당시 강화사람들은 교동이나 삼산, 아니면 서도 등 강화의 부속 섬에 사는 사람들을 보고 오히려 섬사람이라고 부르면서 강화도는 그래도 큰 섬이라고 웬만한 불편은 그러려니 하며 살았다. 그러나 한겨울 성애가 나면 무척이나 유별나게 섬사람다운 고생을 해야만 했었다. 그러니 추운 겨울이 오면 강화사람들이 섬이라 부르는 곳의 섬사람들 고생은 더 말할 나위가 없었을 것이다.

 

1956년부터 강화대교 개통(1970년) 전까지 승객을 태운 대형 버스를 강화 갑곶나루에서 김포 월곶면 성동리까지 실어나른 엠보트 (사진 = 강화사)

강화와 김포사이에 다리가 놓인 때가 내가 대학교 다니던 1970년 1월인데 그 전까지 강화에서 살아온 것을 되돌아보면 정말 어떻게 그렇게 살아왔는지 답답할 때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래도 60년대에 이르러서는 다리만 없었을 뿐이지, 이미 강화에서 서울로 그리고 인천으로 시외버스들이 빈번히 다녔다.

다리가 놓이기 전, 불하받은 상륙용 군용선인 소위 엠뽀드(엠보트)라 부르는 배가 강화 갑곳에서 해협 건너 김포 성동리까지 버스 등 차량을 실어 날랐는데 빠를 때는 십 분 이내 늦어도 보통 반시간 안에는 갑곳나루를 버스에 탄체로 건너다녔던 것이다. 

그 이전, 하루 한번 씩만 다니던 인천행의 세 노선에 의존하던 여객선 똑데기(강화에서는 똑딱선을 똑데기라 불렀다) 시절보다는 훨씬 좋아진 것이다. 강화읍에서는 엠뽀드를 이용해 한 시간마다 한 두 대의 버스가 서울이나 인천으로 출발했는데 거의 두 시간 반 정도 걸렸어도 똑데기보다 훨씬 빨랐을 뿐 아니라, 부평을 지나 동인천을 종점으로 다니는 길 편이 선창가 부두에서 내리는 경우보다 여러모로 편리했다.

그러나 늦겨울에 성애가 나면 사정이 확 달라졌다. 배가 건너기 어려워져 하루에 서너 번 조류가 약해질 때를 기다려 사람들만 배로 건넜다. 어떤 때는 건너는 중간에 얼음에 갇혀 엠뽀드가 조류에 밀렸는데, 북방 한계선 쪽으로 밀리면 해병대에 비상이 걸려 헬기가 뜨고 난리를 쳐야했다. 게다가 배에 갇힌 승객들은 선실도 없는 추운 배안에서 서너 시간동안 추위와 공포에 떨어야했단다. 그래도 똑데기타고 다니던 시절에는 추운 겨울에 아예 배가 못 다니는 경우가 흔했기에 그 난리를 쳐도 엠뽀드로 건너는 것이 더 나은 것이라 했다니 참 기가 막히는 시절이다.

 

강화 연미정 앞바다, 밀물에 미려 떠다니는 성엣장 ⓒ황효진
강화 연미정 앞바다, 밀물에 밀려 떠다니는 성엣장 ⓒ황효진

시외버스가 다니기 전에는 갑곳에서 초지를 거치는 뱃길과 교동에서 석모도를 거쳐 외포, 건평, 선수를 지나 장봉도 시도를 돌아 인천을 향하는 뱃길, 그리고 선두리의 사골에서 출발하는 뱃길 이렇게 세 뱃길에 똑데기가 다녀 인천을 다닐 수 있었다.

물때 때문에 하루에 한 시간 정도 뱃 시간이 늦어지므로 당시 인천 왕래가 자주 있는 집에서는 매달 동양기선 사무실에 들러 배 시간표를 받아 챙기기도 했다.

황보호, 갑제호, 5통운호, 2통운호, 수원호, 구길호 등은 그 옛적 강화사람들에게는 낯익은 똑데기의 이름들이다.

내가 대학교 다닐 때 방학이 되어 강화 집에 있을 적에 보면 거의 빈 배 상태로 앞바다를 지나는 갑제호나 2통운호의 모습을 심심치 않게 목격했는데 이미 초지나 사골 뱃길은 손님이 끊겨서 없어졌고 교동 뱃길은 어쩔 수 없이 운항되고 있었던 모양인데 그 뒤 언제 그 노선도 끊겼는지는 잘 모르겠다.

일섭의 갑제호 침몰 사건의  뒷이야기로 대화가 이어졌다.

하여튼 일섭이는 구조선을 타고 인천으로 돌아왔고 그 후에는 입학식이 있을 때까지 교동의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고 했다. 그래서 2월말 중학교 졸업식 때에도 인천에 머물렀는데 교동에 한 번 들어가게 되면 입학식에 맞춰 인천으로 나올 배편이 더욱 어려워질까 봐서 아예 인천의 친척집에 머무르면서 인천 구경만 잘 했다고 했다.

“일섭아 그런데 너는 인천에 입학시험 보러 올 때는 언제 온 거니?”

“응, 그러니까 올 때는 며칠, 그러니까 삼사일 여유 가지고 큰 배 통운호 타고 왔거든.”

“그럼 5통운호네. 교동 다니는 배는 5통운 아니면 2통운혼데 5통운이 큰 배였거든.”

“난 2통운혼지 5통운혼지는 잘 모르겠고 하여튼 그때가 처음 인천에 와본 거야.”

“그래? 넌 영렬이 모양 갑곳에서 기다리던 그 고생은 안 했구먼”

일섭이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졌다.

그 때 배를 함께 탔던 선생님은 교감선생님으로 영어도 가르쳤다 한다. 그리고 배에 물이 차 들어오며 엔진이 꺼지니 재빨리 유빙으로 뛰어내린 사람 중의 하나가 같이 배 앞에서 얼음을 구경하던 친구였다고.

일섭이는 그 교감선생에게 세배를 드리러 간 적이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 교감선생님께 세배 드리고 나니 한 말씀 하시더라. ‘자네 형님 참 대단한 사람이다,’라고 말이야. 사실 그때 우리 작은 형님도 같이 갑제호를 탔었는데 선생님의 말씀이 그날 죽은 사람들의 시체를 다 작은 형이 수습하셨다는 거야. 구조선이라고 미군 배가 왔었는데 미군들은 물론 같이 배를 탓던 승객들 모두 궂은일에 주저주저 했는데 작은 형님이 처음부터 끝까지 거의 혼자 하셨다는데 난 그 일을 지금까지 까맣게 모르고 있었는데 선생님이 그러시잖아.”

이 이야기에 분위기가 조용해졌다. “그래? 형님이 같은 배 탔다는 것도 처음 듣는다. 그 형님은 금년 몇이신데? 뭐하시고?”

그 형님은 김일현(84)님이시다. 6세때 부모님과 북한 옹진에서 교동으로 건너와 농사를 지으시다 교회 장로도 은퇴하시고 섬에서 작은 철물점 가게도 하셨다. 

"일섭이 학교 관계로 인천에 갔다가 갑제호를 타고 교동으로 가는 길이었지요. 배가 속력을 내다가 꽝하고 배 앞 얼음덩이와 부딪친 거예요. 배 철판도 두꺼웠는데 오래된 것이라 그런지 메가리 없이 꽤 크게 뚫리고 삽시간에 물이 차들어왔어요"

김일현 형님의 말이다. 형님은 사고가 나자 돛대로 올라가 상황을 살폈는데, 배는 사고 후 전속력으로 인근 갯벌로 달려 섬(모도) 마을 앞 바위에 얹쳤다. 

그러나 배 지하실칸으로 밀려든 물은 6명의 희생자를 낳았다. 사고 난 배는 다시 교동이 아닌 인천으로 되돌아가야 하는데 6구의 시신을 배 지하실에 두고 갈 수는 없었다. 배사람 외 누구도 갑판위로 시신을 끌어 올리려 하지 않았는데, 형님이 나선 것이다.

“그래? 형님은 지금이라도 인천시에서 표창을 해야 하겠구먼... 일섭의 앞날과 일섭 형님의 평안하심을 위하여 건배하자.” 누군가의 이야기에 모두는 잔을 채워 술잔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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