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손자가 태어난 날 - 허 회 숙
첫 손자가 태어난 날
- 허 회 숙
말라버린 내 감성의 펌프에
네가 부어준 마중물 한 바가지
남모르게 자리한 내 마음속 끝 방까지 닿아
먼지 앉은 녹슨 문이 열린다
새로운 세상으로 순간이동을 한 것일까
내 심장이 새 것으로 바뀌어 버린 것일까
잃어버린 내 기쁨을 되찾아준 너
너를 위해
‘새 생명의 환희'라는 통장 하나 만든다
철철 흐르는 한 바가지 물은
흐르고 흘러 언젠가 너에게 닿으리라
나도 너에게 마중물이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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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는 100세 시대여서 3세대는 물론 4세대, 5세대까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하지만 늘어난 수명만큼 노인들의 삶의 질이 향상되었는지는 의문이다. 사회적 활동이 늘어난 한국의 젊은 여성들 역시 여전히 출산과 육아를 어려운 문제로 생각하여 꺼리는 형편이 되었다.
사람들은 베이붐 세대니 X 세대니, N, Y, C , G, E로 세대 정리를 하기도 하는데 이렇게 각 세대마다 다른 이름이 붙여졌던 것은 그동안 세대 차이에 따른 세대 갈등이 세대 공존보다 많았다는 것을 암시하기도 한다. 이런 문제는 역시 ‘사랑’이 가장 좋은 치유법이 된다. 그것은 “말라버린 내 감성의 펌프에” 마중물 한 바가지 부어 넣는 일과 같은 행위일 수 있다.
이 시의 화자는 첫 손자가 태어난 날 축복의 마음을 담아 ‘새 생명의 환희’라는 이름으로 통장 하나를 개설한다. 아마도 그것은 손자가 커 나가는 동안 ‘기쁜 일’, ‘반가운 일’, 어떤 ‘기념할 만할 특별한 일’이 생길 때마다 이 통장 안에 꼬박꼬박 채어 넣을 사랑의 통장일 것이다.
그것은 비록 자본주의 시대 금전으로 행하는 저축을 말하겠지만 메말라가는 자신의 생명에 손자가 부어준 ‘마중물’에 대해 시인이 손자에게 부어주는 ‘화답의 마중물’이 된다. 이 시대 새로운 ‘사랑법’은 이렇듯 솔직하고 시원하여 세대 공존의 물줄기는 푸르게 이어진다.
시인 정민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