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자나무 화답한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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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자나무 화답한 사연
  • 정민나
  • 승인 2021.03.08 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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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나의 시마을]
보 시 - 석의준
비자나무
비자나무

 

보 시

                                         - 석 의 준

 

집사람을 친동생처럼 대하던

아픈 어른이 계셨다

제삿날이 다가오는데 아내는 꿈을 꾸었다

삼계탕이 먹고 싶다는 그의 말을 듣고 직접 끓였다

다 살지도 못한 생이 아까워서

젖내 나는 햇병아리를 피하고

좀 더 산 중간 닭을 골랐다

미농지 깔 듯 가슴팍을 활짝 열고

밤, 대추 홍동백서에 전복 인삼을 더하고

강화에서 가져온 찹쌀 한줌을 채운 뒤

불을 지폈다

두 어 시간 지난 뒤

압력솥 공기 빠지는 소리

기차타고 극락을 간다

담 너머 이웃에

헛 제삿밥을 날랐는데

몇 분 뒤에 환생을 전해 왔다

바리때 다 비웠다고

비자나무 가지

끄덕끄덕 화답해 주었다

 

미국의 인류학자 베네딕트 앤더슨은 “내적으로 끈끈하게 연결돼 하나를 이룬다”는 이미지를 공유하면서 ‘네이션’이라는 언어를 썼다. 물론 ‘네이션’은 국가나 국민 • 민족이라는 뜻을 품고 있지만 앤더슨은 ‘상상의 공동체’ 이미지를 부여해서 궁극적으로 ‘평화와 사랑의 공존’이라는 가치를 재고한다.

석의준 시인은 위 시에서 아내가 행하는 이런 사랑의 보시 행위를 참으로 흐뭇한 마음으로 지켜본다. 가족이나 친척이 아닌 어른이 아내의 꿈에 나타나 삼계탕이 먹고 싶다는 말을 하자 그 말을 듣고 삼계탕을 끓여 제사를 지내는 아내의 모습을 그는 세밀하게 그리고 있다. 아내를 평소 친동생처럼 여겼던 그분(아픈 어른)은 아마도 제명을 다 채우지 못한 나이에 돌아가셨나보다. 둘째 연에 “다 살지도 못한 생이 아까워서” 햇병아리를 피하고 중간 닭을 골랐다는 내용에서 그러한 맥락이 상상된다.

아내는 “미농지 깔 듯 가슴팎을 활짝 열고/밤, 대추 홍동백서에 전복 인삼을 더하고/강화에서 가져온 찹쌀 한 줌” 채워 성심껏 삼계탕을 끓인다. “압력솥 공기 빠지는 소리/기차타고 극락을 간다”와 같이 사물의 비유와 이미지를 통해 아내의 삼계탕 보시를 점차 더 농도깊게 표현하여 시인은 그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있다.

그리하여 “담 너머 이웃에/헛제삿밥을 날랐는데/몇 분 뒤에 환생을 전해왔다”고 시의 포인트를 살리는데 “바리때 다 비웠다고/비자나무 가지/끄덕끄덕 화답해 주었다”는 시적 표현으로 이 시의 정점을 찍는다. 마지막 연의 ‘비자나무’는 심리적 이미지와 연결된 재미있는 언어놀이(fun)이라 할 수 있는데 고인이 저승에서 잠시 비자를 내어 이승에 내려온 듯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대승불교도에서 ‘보살’의 실천 덕목인 육바라밀(六波羅密) 가운데 제 1덕목인 보시는 자비의 마음으로 조건없이 널리 베푸는 것을 말한다. 시인의 아내는 내 붙이도 아닌 사람을 위해 삼계탕 제사를 지내고 그 제삿밥은 이웃에 보시하는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행하고 있다. 인정이 메마른 현대 사회에서 그녀가 보기드믄 일을 행하고 있으니 그러고 보니 시인에게는 시 보시까지 하게 된 셈이다.

시인 정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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