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호와 소남, 수백통 친필 편지를 정리하면...
상태바
성호와 소남, 수백통 친필 편지를 정리하면...
  • 허경진
  • 승인 2021.03.23 14:1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다시 부르는 소남 윤동규]
(6) 소남의 친필 편지
인천의 잊혀진 실학자, 소남(邵南) 윤동규(1695~1773) 탄생 325주년를 맞아 지난 12월 30일 인천 남동문화원이 기념사업준비위를 발족시키고 본격적인 연구사업에 들어갔습니다. [인천in]은 남동문화원의 소남 연구사업을 지난해 12월 [소남 윤동규를 조명한다]는 제목으로 3회에 걸쳐 특집기사로 소개했습니다. 이어 새해에는 소남의 삶과 업적을 총체적으로 조명하는 특집기사를 기획해 격주로 연재합니다. 이번 6회는 지난해 12월 '소남 윤동규 총서 1권(성호학파의 좌장 소남 윤동규)를 출간한 허경진 연세대 명예교수가 집필했습니다. 앞으로 허경진 교수와 인천대 인천학연구원 원재연 박사, 5회까지 연재한 송성섭 박사 3분이 교대로 집필합니다. 

 

 

성호가 80세 되던 해에 68세 된 제자 윤동규가 『성호사설』을 교감하면서 보낸 편지. 종이를 아끼느라고 세 번이나 방향을 바꿔가면서 썼다.
성호가 80세 되던 해에 68세 된 제자 윤동규가 『성호사설』을 교감하면서 보낸 편지. 종이를 아끼느라고 세 번이나 방향을 바꿔가면서 썼다.

 

나의 지도교수인 연민(淵民) 이가원(李家源)선생이 쓰신 「한문 문체연구」를 보면 한문으로 쓴 편지 종류가 15가지나 된다. 그러나 이것은 민간인 사이에 주고받는 서독류(書牘類)만 헤아린 것이고, 왕이나 외국에 보내는 주의류(奏議類) 가운데도 넓은 의미의 편지들이 있으니, 모두 20가지가 넘는다. 서(書)는 긴 편지고, 독(牘)은 짧은 편지인데, 신하가 목숨을 걸고 올리는 상소문이나 임금이 온 백성에게 보내는 교서도 모두 편지이다. 스승의 장례에 지은 제문은 영전(靈前)에서 읽어드리는 편지이다.

옛 사람들은 편지 하나도 자신의 이름을 걸고 썼다. 뒷날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서, 또는 자신의 문집을 엮을 때 원고로 삼기 위해서도 반드시 편지 초고를 남겼고, 편지를 받은 사람도 그 편지를 잘 간직했다. 삼백년이나 된 윤동규의 편지를 그의 후손이 여지껏 간직하고 있는 것도 조상의 손길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성호가 안산에 살던 집 바깥채를 중형 이서(李漵)가 육영재(六楹齋)라고 이름지었는데, 글자 그대로 기둥이 여섯 개인 초가 3간이었다. 앞의 한 칸은 토청(土廳)이고 뒤의 두 칸을 방으로 만들었는데, 살림도 넉넉지 않아 제자들이 오래 머물 수도 없었다. 그러다보니 대부분의 제자들은 처음에 찾아 뵙고 제자로 받아주시기를 청한 뒤에, 기본적인 학문이 갖추어지면 자기의 집에 살면서 편지로 내왕하였다.

조선시대에는 멀리 떨어져 있는 스승과 제자 사이에 편지를 통해 질문하고 대답한 경우가 많은데, 퇴계 이황과 고봉 기대승 사이에 7년 동안 오간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 같은 경우는 세계적인 서간문학이자 철학논문이다. 이 편지들은 뒷날 『양선생 왕복서』 3권, 『양선생 사칠이기 왕복서(兩先生四七理氣往復書)』 2권으로 묶였으니,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보기 드문 편지의 나라다. 그러나 윤동규는 성호 문하에 18세에 입문한 뒤에 60년 동안 몇백 통의 편지를 주고받았으니, 그에 비길 바가 아니다. 소남 윤동규가 스승, 후배, 제자들과 주고받은 친필 편지는 640통에 이른다. 그 친필 원본이 거의 그대로 남아 있다. 

 

마음 속의 사람이 뜻밖에 와주니

정신이 통해서 은연중 재촉했던 게지. (줄임)

백로와 제비 좇아 동서로 헤어진 뒤에

이별의 심정을 응당 편지 가득 써 보내올 테지.

 

윤동규가 처음 안산으로 찾아오던 시기에 성호가 그에게 지어준 시 「송윤유장(送尹幼章)」인데, ‘마음속의 사람[心內人]’인 제자 윤동규가 연락도 없이 찾아오자 “정신이 통해서 은연중 재촉했던 게”라고 반가워했다. 성호도 오늘쯤 소남이 왔으면 좋겠다고 기다렸던 것이나 아닐까.

“동서로 헤어진 뒤에 이별의 심정을 응당 편지 가득 써 보내올 테지.”라고 성호가 기대한 것처럼, 촛불을 켜놓고 며칠 밤을 지새워 학문을 토론하다가 인천으로 돌아온 소남은 하루가 멀다 하고 편지와 시를 써서 스승에게 보냈다. 물론 이들이 주고받은 편지는 안부만 물은 것이 아니다.

어떤 날은 도남촌(도림동)에 살던 윤동규의 형제들이 함께 토론해서 의견을 수렴해 답장을 보냈기에, 성호가 1741년 아우 윤동기에게 보낸 편지에는 “형과 잘 의논해서 회답을 보내라[須與伯公商量回報也]”고 하였다. 아우 동진이 1735년에, 동기가 1756년에 세상을 떠나자, 그뒤에는 손자들이 편지를 가지고 안산 성호에게 찾아갔다.

성호가 1758년 윤동규에게 보낸 편지 「답윤유장(答尹幼章)」 첫머리에 “손자가 지금 봉함편지를 가지고 와서 전해 주었는데, 겹겹이 들어 있는 몇 장 편지에 색색으로 깊은 뜻이 담겨 있어 얼마나 위로받는지 모르겠소”라고 하였으니, 맏손자 신이라면 21세, 작은손자 위라면 14세에 안산으로 성호를 찾아가 편지를 전달하고, 성호학파의 강석(講席) 끄트머리에 앉아서 배운 셈이다.

『소남선생문집』 영인본은 전체 14권 가운데 8권이 서(書)이다. 편지가 이렇게 많은 이유는 소남이 인천에 살고 스승 성호는 안산에 살아, 주로 편지를 통해 질문하고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이다. 성호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소남이 좌장 역할을 했으므로, 권철신, 이가환 등 천주교 신자 후배들과도 편지를 주고받게 되었다.

종가에는 윤동규가 스승 성호에게 보낸 편지가 49통, 성호에게서 받은 편지가 221통 남아 있다. 스승의 편지가 네다섯 배나 남아 있는 이유는 손자 윤신이 『소남선생문집』을 편집하려고 안산 성호장(星湖莊)을 방문하였지만, 다 찾아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편지는 비슷하게 오갔을 텐데, 윤동규는 스승의 편지를 물론 소중하게 간직하였기에 스승의 편지만 네다섯 배나 남게 된 것이다. 『성호전집』에는 윤동규 형제에게 보낸 편지를 다 합해도 65통 밖에 실려 있지 않다. 윤동규가 받아서 후손들에게 물려준 편지의 4분의 1만 실려 있는 셈이다.

윤동규 종가에 소장되어 있는 편지를 다 정리하면 『성호전집』도 다시 편집할 필요가 있다. 윤동규가 스승, 후배, 제자들에게 보낸 편지를 차례로 소개하여, 인천 바닷가에 살면서 학문의 세계에 몰두하였던 윤동규의 네트워크를 몇 회에 걸쳐 재구성하여 보겠다.

 

인에 처하고 의를 따르는 선비의 마음가짐 표명한 윤동규의 편지(1760)
인에 처하고 의를 따르는 선비의 마음가짐 표명한 윤동규의 편지(1760)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시민과 함께하는 인터넷 뉴스 월 5,000원으로 소통하는 자발적 후원독자 모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