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서 배우기보다 편지로 질문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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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서 배우기보다 편지로 질문하라
  • 허경진
  • 승인 2021.04.06 09: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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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부르는 소남 윤동규]
(7) 편지의 효용성
인천의 잊혀진 실학자, 소남(邵南) 윤동규(1695~1773) 탄생 325주년를 맞아 지난 12월 30일 인천 남동문화원이 기념사업준비위를 발족시키고 본격적인 연구사업에 들어갔습니다. [인천in]은 소남의 삶과 업적을 총체적으로 조명하는 특집기사를 기획해 격주로 연재합니다. 허경진 연세대 명예교수와 인천대 인천학연구원 원재연 박사, 송성섭 박사(동양철학) 3분이 집필합니다.

 

소남 윤동규가 성호 이익에 보낸 편지. '소남유고' 72쪽에 수록돼있다.
소남 윤동규가 성호 이익에 보낸 편지. '소남유고' 72쪽에 수록돼있다. 소남은 쓰다가 생각이 바뀌면 몇 글자를 지워버린 채, 다시 옮겨 쓰지 않고 그대로 보냈다.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고 했던 것처럼, 조선시대 스승과 제자 사이는 부모보다도 서열이 위였다. 그랬기에 윤동규는 선조들의 제삿날을 기록하면서 스승 성호의 제삿날도 함께 기록하였다. 그러나 성호는 제자들에게 형식적인 예절에 매이지 말고, 멀리서 일부러 찾아오지 말며, 간단히 편지로 질문하라고 가르쳤다. 멀리서 찾아오는 시간을 아낄뿐더러, 가장 충실한 대답을 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백과사전인 『성호사설』 제7권에 「서독승면론(書牘勝面論)」이라는 항목이 있는데, “편지를 주고받으며 의논하는 것이 직접 얼굴을 대하여 의논하는 것보다 낫다”는 뜻이다.

“말이란 하기는 쉬우나 흔적이 없고, 편지란 세심하게 생각해서 상세하게 고찰하므로 깊은 경지에 이를 수 있다. 만나는 때는 짧고 헤어져 있는 때가 기니, 날마다 의문나는 점을 주워모아 글자로 적어서 서로 되풀이해가며 토론한다면, 자주 중단되는 걱정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헤어진 뒤에 무한한 토론이 있다.’고 말한 것이다.”

성호는 “시골 서당(書堂)에서도 그래야 하니, 하물며 임금의 법강(法講)이겠는가?”라고 질문을 던지고, “위세(位勢)가 아주 차이나게 높은 자리이므로 삼가고 두려워하는 마음만 치우쳐서, 임금이 질문하면 스승들이 아무리 잘 알고 있더라도 감히 말하지 못하고, 이미 강의가 끝난 뒤에는 거리가 하늘과 땅처럼 되어버린다. 3일이나 5일 동안에 걸쳐 보고 들은 내용이 있더라도 다 책(冊) 속에 들어 있는 것이 아니니, 어떻게 자세히 찾아내어 중단하지 않고 왕에게 올릴 수 있겠는가?”라고 문제점을 설명하였다. 제자가 갑자기 물으면, 스승이 알고 있는 내용도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는 수가 있다는 것이다.

성호는 그래서 제자인 임금이 스승인 경연관(經筵官)들에게 미리 질문을 보낸다고 하였다. “경연(經筵)이 열리지 않더라도 임금은 마땅히 질문들을 기록하여, 꼭 강의하는 글이 아니라 혹 경사(經史)라도 날마다 두어 조목씩 꼭 질문을 보내어 숙직하는 자가 각각 자기 의견으로 답변하게 하고, 임금은 이를 받아서 판별하여 마치 서로 마주앉아 문답하는 것처럼 취사 선택하고 이를 합쳐서 기록하는 것이 좋다.”고 하였다. 그러면 스승들도 감히 공부하지 않을 수 없고, 질문과 답변을 모은 글들이 출판되어 또 하나의 교과서가 된다는 것이 「서독승면론(書牘勝面論)」의 결론이다. 성호가 임금을 예로 들었지만, 그 자신도 제자들과 주로 편지를 통하여 학문을 토론하고 학설을 집대성하였다.

스승에게 예를 차리려면 좋은 종이에 앞뒤로 인사말이 장황하게 들어가야 격식에 맞다고 생각하겠지만, 성호는 소박한 종이에 요점만 적어서 보내자고 하였다. 역시 『성호사설』 제5권 「학사단간(鶴沙短簡)」에서 할아버지가 받은 편지를 예로 들었다. 학사는 5형제가 문과에 급제한 김응조의 호이고, 제목은 “학사의 짧은 편지”라는 뜻이다.

“우리 할아버지가 (평안도) 성천부사(成川府使)로 있을 때에 평양감사는 바로 학사(鶴沙) 김응조(金應祖)였는데, 그가 우리 할아버지에게 보내온 편지 한 장이 지금까지 상자 속에 간수되어 있다. 자로 재면 세로는 아홉 치, 가로는 한 자 두 치에 불과하며 종이 또한 품질이 얇고 나쁘다. 평안도는 서쪽에서 풍요로운 지방이었고 감사는 존귀한 벼슬인데도 재정을 이와 같이 절약했으니, 그 당시 풍속도 짐작할 수 있다.

지금 수령들이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를 보면 종이 품질이 제일 나쁜 것도 길이와 두께가 이보다 갑절은 되니 종이 값만 따져도 옛날의 예닐곱 배가 넘는 셈인데, 상관에 보내는 편지종이는 이보다 더 좋은 것을 쓰게 되니, 값을 따지면 몇 갑절이나 된다. (줄임)

종이는 사대부 자신이 직접 만드는 것이 아니고, 만들자면 그 재정이 반드시 민간에서 나와야 하는데, 위에서 쓰기만 하는 자는 이를 걱정하지 않으니, 백성을 못살도록 하는 것은 이 종이 한 가지만 봐도 알 수 있다.”

편지는 종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마음이 중요하다. 성호가 『성호사설』 제11권 「정처사(鄭處士)」라는 글에서 형식적인 편지를 꾸짖었다.

“상가(喪家)에 보내는 위문 편지의 서식(書式)이 《가례(家禮)》에 실려 있어서, 잘난 사람 못난 사람을 막론하고 자제들을 시켜 그 서식대로 베껴 보낼 뿐이고, 친히 거들떠보지 않으니, 정리(情理)에 맞지 않는다. (줄임) 내가 상(喪)을 당했을 때에 마침 처사 정하령의 아들이 서울에 있었으나 미처 인사가 없어서, 그 역시 서식대로 나에게 편지를 보내 왔다. 정처사가 이를 듣고 따로 편지를 써서 보내오기를 ‘어리석은 자식이, 결례할 수 없다는 정분(情分)만 알고, 겉치레를 하면 안 된다는 의분(義分)을 몰랐으니, 이는 제 마음대로 한 짓입니다. (줄임) 이미 지난 일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나, 바로잡지 않으면 의리가 나타나지 않으므로 사실대로 고하고서 질정(質正)을 바랍니다.’고 하였다. 이 또한 독실한 선비요, 영남의 아름다운 풍속을 볼 수 있다.”

한동안 제자들이 전화나 메일로 질문하는 것이 미안해서, 간단한 질문 하나를 하려고 일부러 연구실에 찾아왔다. 이제는 비대면 강의 상황이 되어 그런 일이 없어졌지만, 여전히 편지는 유효하다. 여러 책을 찾아보며 한번 더 생각해본 뒤에 질문을 모아서 할 수 있으며, 그 동안 알고 있던 것들을 되살려볼 뿐만 아니라 미심쩍은 것까지 찾아서 확인해본 뒤에 대답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편지에는 언제나 그 시점에서 그려낸 자신의 모습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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