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의 자화상 - 울타리에 갇혀있는 제1호 문화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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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자화상 - 울타리에 갇혀있는 제1호 문화유산
  • 배성수
  • 승인 2021.04.13 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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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학동 인천도호부 관아 - 배성수 / 시립박물관 전시교육부장
인천in이 이달부터 배성수 인천시립박물관 전시교육부장이 집필하는 인천 문화유산을 연재합니다. 인구 300만의 대한민국 3대 도시로 급팽창해온 인천은 계속된 도시개발에 밀려 우리도 모르게 문화유산을 소홀히 하거나 훼손할 수 있습니다. 이번 연재를 통해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을 되돌아 보며 도시의 정체성을 일깨우고자 합니다.

 

조선시대 인천의 중심, 문학동

어느 도시건 그 도시의 중추적 기능을 수행하는 도심이 있게 마련이다. 도심은 도시 내에서 관공서가 밀집해 있고, 교통이 발달해 있으며 대규모 상권이 형성된 공간을 말한다. 지금 인천의 도심이라면 시청과 교육청, 대형 백화점이 위치한 구월동 일대이겠지만, 불과 3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중구 중앙동과 신포동이 인천의 도심 기능을 수행했었다. 이곳 역시 1883년 개항 이후 조계와 개항장이 조성되면서 도시의 중심이 옮겨온 곳이기에 도심으로서의 역사는 100년이 조금 넘을 뿐이다. 그렇다면 개항 이전 인천의 도심은 어디에 있었을까? 지금과 마찬가지로 전통시대 어느 고을이든 그 중심은 관아가 위치한 지역에 있었고, 인천도 예외는 아니어서 관아가 있었던 미추홀구 문학동이 인천도호부의 중심이었다. 조선시대 인천의 행정과 교육 중심지이자 도로망이 모이고 흩어졌던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지방유형문화재 제1호 인천도호부 관아

문화유산에 붙는 번호는 그것이 갖는 가치와는 관계가 없다. 지정된 순서대로 붙여질 뿐이다. 다만, 국보나 보물 등 국가지정 문화재나 지방 문화재의 제1호는 국가나 지역을 대표하는 문화유산이라는 상징성을 지닌다. 2008년 발생한 숭례문 방화사건이 온 국민을 충격 속에 빠뜨렸던 이유는 문화유산이 방화로 소실되었다는 전대미문의 사건이라는 점도 있지만, 그것이 대한민국의 문화유산을 상징하는 국보 제1호였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목조 누각이 완전히 소실되었음에도 문화재 지정을 취소하지 않았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국보 제1호인 숭례문이 우리나라 문화유산을 대표한다면, 인천을 대표하는 문화유산은 인천광역시 지방유형문화재 제1호 인천도호부 관아일 것이다.

관아는 조선시대 지방 행정을 수행했던 공간을 말하며, 행정을 맡았던 수령은 고을의 격에 따라 목사, 부사, 군수, 현감, 현령 등으로 불렀다. 수령의 임무는 행정뿐 아니라 사법, 경찰, 군사에 이르기까지 넓은 범위에 걸쳐 있어 그 권한은 지금의 자치단체장보다 막강했다. 인천의 수령이었던 인천도호부사는 종3품의 벼슬아치가 부임할 수 있었다. 관아에는 수령이 집무를 보던 동헌(東軒)과 임금의 위패를 모셔놓고 정기적으로 예를 갖추거나 손님을 맞이했던 객사(客舍)가 있었다. 그 외에 수령의 생활공간인 내동헌과 아전들의 집무소인 작청(作廳), 군관청 등이 있었다.

19세기말 그려진 화도진도를 통해서 당시 인천도호부 관아의 주요 건물과 규모를 살필 수 있는데 관아의 출입구에 해당하는 외삼문은 이층 누각으로 지어졌고, 동헌을 기준으로 동쪽에 내동헌이, 서쪽에는 객사가 배치되어 있었다. 동헌과 함께 관아의 핵심 공간인 객사는 건물 중앙에 임금의 위패를 모신 정청(正廳)을 두고 그 좌우에 손님을 맞이했던 공간인 익헌(翼軒)을 연결하는 길쭉한 형태였다. 중앙부의 정청은 양쪽의 날개 건물인 익헌보다 지붕이 높게 솟아 있는 독특한 외관을 가지고 있었다. 인천광역시 지방유형문화재 제1호 인천도호부 관아는 문학동 문학초등학교 교정에 위치하고 있으며, 지금은 동헌과 객사의 가운데 건물인 정청만 남아있다.

 

화도진도 인천부
화도진도에 보이는 인천도호부 관아 (1879년 제작,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두 개의 인천도호부 관아

월드컵 개최를 1년 앞둔 2001년 4월 문학경기장 맞은편 인천향교 좌측으로 인천도호부 관아가 복원공사를 마치고 시민에게 공개되었다. 복원된 관아는 문학초등학교 내에 있는 지방유형문화재 제1호 인천도호부 관아와는 다른 건물로 화도진도에 근거하여 동헌과 객사 외에 외삼문과 내삼문, 회랑 등을 복원한 것이었다. 그러나 문학경기장이 월드컵 경기장으로 결정되면서 경기장을 찾는 외국인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한다는 이유에서 공사를 서두른 감이 없지 않았다.

당시 시민 사회에서는 인천도호부 관아의 복원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심심치 않게 들려왔다. 먼저 문화재로 지정된 도호부 관아가 엄연히 존재하는 데 전혀 다른 위치에 지도 한 장을 근거로 건물을 짓고 여기에 ‘복원(復元)’이라는 용어를 쓰는 것이 맞는 것인가에 대한 문제 제기가 있었다. 복원의 사전적 정의는 “원래의 상태나 모양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으로 이미 없어졌거나 파손된 문화유산을 원형에 가깝게 복구하는 것을 말한다. 물론 도로 건설 등 불가피한 상황에서 제3의 장소로 문화유산을 옮기는 이전 복원도 있겠지만, 인천도호부 관아 복원사업은 엄밀히 말해서 ‘복원’이 아닌 ‘재현’이었다.

또 문화재로 지정된 인천도호부 관아(당시 공식명칭은 ‘인천도호부청사’, 2019년 10월7일 변경)는 문학초등학교 교내에 있어 일반인들의 접근이 쉽지 않은 데 비해 새롭게 조성된 인천도호부 관아는 큰 길 가에 위치하고 있다. 당시만 해도 어린이들이 전통문화를 학습할 만한 장소가 많지 않았던 터라 복원 후에 어린이집과 유치원, 초등학교의 견학 코스가 될 것은 분명한 일이었다. 자칫 이곳을 찾은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재현된 관아를 문화재로 착각할 수도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기도 했다. 왜 인천시는 지방유형문화재 제1호 인천도호부 관아에서 불과 500m 밖에 떨어지지 않은 이곳에 또 다른 관아를 재현해야 했을까?

1993년 인천시는 낡은 숭의동 공설운동장을 대체할 신식 경기장을 문학산 기슭에 건설하고 그 맞은편에 관아와 민가가 어우러진 ‘인천 민속마을’을 조성하는 계획을 수립했다. 그러나 월드컵이 열리는 2002년을 목전에 둔 상황에서 토지매입이 원활치 않았고, 급기야 시유지를 활용해서 ‘인천도호부 관아’만이라도 먼저 복원하는 것으로 계획을 변경해야 했다. 결국 두 개의 인천도호부 관아가 존재하는 촌극을 빚게 된 것이다. 최근 인천시는 안내표지판에 ‘재현 시설물’이라고 명기하여 이 건물들이 복원이 아닌 재현된 것임을 밝히고 있지만, 그런 사실을 알고 관람하는 시민들이 몇이나 될까?

 

2001년 복원된 인천도호부 관아 동헌
2001년 복원된 인천도호부 관아 동헌

 

학교로 사용된 관아 건물

1883년 개항 후 해관(지금의 세관)의 관리감독 및 출입국 사무, 개항장 질서유지를 위해 중구 내동에 감리서가 설치되었다. 초대 감리로 조병직이 부임하였고, 뒤를 이어 감리로 부임한 홍순학이 1885년부터 인천도호부사를 겸하게 되었다. 처음 인천항 감리서는 화도진 관아를 사용하다가 1884년 내동에 감리서 건물을 신축했는데, 감리서에는 지방관아에 속해있던 아전과 달리 서기와 서리가 배속되었다. 인천도호부사를 겸했던 인천항 감리는 문학동 관아와 내동 감리서 중 어느 한 곳에 머무르며 사무를 보았던 것이 아니라 두 곳 모두를 근무처로 삼았던 것으로 보인다.

문학동 관아가 행정기능을 상실하게 되는 것은 1906년 10월 1일이다.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된 후, 개항장의 외국인 관련 사무를 맡아보던 인천 감리서를 폐지하고 그 자리로 인천부를 이전시키면서 문학동 관아는 빈 건물로 남게 되었다. 문학동 도호부 관아가 다시 사용된 것은 1914년 4월경이다. 한일병합 후 조선총독부는 전국의 지방행정제도를 개편하면서 지금의 중구와 동구만을 인천부로 정하고, 나머지 인천 지역과 부평군을 통합해서 경기도 부천군을 신설했는데 이때 비어있던 문학동의 인천도호부 관아 건물을 부천군청으로 사용하게 했다.

 

1910년 전후 촬영된 인천도호부 관아 건물 (화도진도서관 소장)
1910년 전후 촬영된 인천도호부 관아 건물 (화도진도서관 소장)

 

한동안 부천군청으로 쓰이던 인천도호부 관아는 1918년 4월 부천공립보통학교(지금 문학초등학교)가 설립되면서 그 일부가 학교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일제강점기 지방에 설립된 초등교육기관은 대개 학교 건물을 새로 짓기 보다는 비어있던 조선시대 관아 또는 향교 건물을 활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인천의 경우 이미 관아의 일부를 부천군청으로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머지 공간을 학교로 썼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1921년 부천군청이 내동으로 이전하면서 군청으로 쓰던 건물까지 부천공립보통학교가 사용하게 되었다.

당시 학교로 사용했던 관아 건물은 동헌과 객사였고, 그 외 군관청 건물에는 문학면 파출소가 들어섰다. 파출소로 사용되던 군관청은 1955년 화재로 인해 소실되었다. 학교 교사로 쓰이던 동헌과 객사는 광복 이전까지만 해도 원래의 위치에 원형을 유치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6.25전쟁 이후 건물의 위치와 형태가 변형되었다. 학생 수가 늘어나면서 기존의 건물로 수용하기 힘들어졌고, 교사를 신축하기 위해 건물을 옮겨야 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객사의 좌, 우 익랑이 없어졌고, 객사가 동헌 뒤쪽으로 옮겨져 옹색한 모습이 되어버렸다.

 

1924년경 부천공립보통학교 제2회 졸업식 사진에서 보이는 객사 건물
1924년경 부천공립보통학교 제2회 졸업식 사진에서 보이는 객사 건물

 

보존과 활용의 사이에서

인천광역시 지방유형문화재 제1호 인천도호부 관아는 1918년 이래 지금까지 문학초등학교에서 관리하고 있다. 1970년대까지는 교실과 도서실 등으로 활용되었으나, 이후로는 문화유산의 보호 차원에서 일반인은 물론 학생의 출입도 금지하고 있다. 관아 건물이 학교 내에 위치하고 있어 인천도호부 관아를 관람하기 위해선 학교 정문을 거쳐야 한다. 수업에 지장을 줄 수 있는데다 최근 학생들의 안전을 위해 학교 출입이 까다로워지면서 관람이 여의치 않다. 어렵사리 정문을 통과했다고 해도 울타리로 가로막혀 있는데다 입구는 다시 자물쇠로 잠겨있어 그저 외부에서 관아 건물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처지다. 그러다보니 지방유형문화재 제1호 인천도호부 관아가 문학초등학교 교정에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시민이 대다수이며, 그나마 이 사실을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시민들도 2001년 재현된 인천도호부 관아로 발길을 돌리고 있다.

 

학교 담장과 울타리에 갇혀 있는 인천도호부 동헌과 객사
학교 담장과 울타리에 갇혀 있는 인천도호부 동헌과 객사

 

지난 2월 계양구에서는 계산동에 위치한 인천광역시 지방유형문화재 제2호인 부평도호부 관아의 전용 출입구를 조성하고 관람로를 정비해서 시민들이 부평초등학교 정문을 거치지 않고 관아 건물과 어사대 등의 문화유산을 자유롭게 관람할 수 있도록 했다. 부평도호부 관아 역시 문학동 인천도호부 관아와 마찬가지로 부평초등학교 교정에 위치해 있어 시민들의 관람이 자유롭지 못했던 것을 개선한 것이다. 더 나아가 건물 내부에도 부평도호부의 역사와 관아 관련 유물을 전시하여 관람객의 출입을 허용했고, 코로나 상황이 호전되면 문화유산 해설 서비스도 실시할 계획이라 한다. 접근성을 개선하여 주민들이 문화유산을 조금 더 친숙하게 느낄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문화유산을 바라보는 행정의 시선이 조금이나마 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화유산은 그 지역의 역사와 전통을 담고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그 보존을 위해 노력하고 이를 후손에게 온전하게 물려줄 의무가 있다. 그런 탓에 지금까지 우리나라 문화유산 행정은 활용보다는 보존에 방점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보존에 신경 쓴 나머지 자칫 박제가 되어버린다면 외려 사람들이 점점 문화유산을 외면하는 이유가 될 것이다. 아무리 훌륭하고 가치가 있는 문화유산이라 해도 우리 곁에서 멀리 있다면 그 소중함이 반감되는 것은 아닐까? 담장으로 겹겹이 쌓인 채 엄격하게 보존되고 있는 인천광역시 제1호 지방유형문화재 인천도호부 관아를 보면서 보존과 활용의 경계에 서있는 우리 문화유산을 다시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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