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정 넘어 고통의 그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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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정 넘어 고통의 그 시간
  • 김선
  • 승인 2021.04.20 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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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당과 고전읽기 도전하기]
(2)이방인-㊵새벽녘 심장소리
인천in이 송도국제도시에 있는 복합문화공간 서유당과 함께 어렵게만 느껴지던 동·서양의 고전 읽기에 도전합니다. ‘서유당의 고전읽기모임인 하이델베르크모임Jacob 김선(춤추는 철학자), 김현(사회복지사), 최윤지(도서편집자), 서정혜(의류디자이너), 소순길(목사), 이광남(명상활동가)’ 등이 원서와 함께 번역본을 읽어 내려가며 삶의 경험을 나누고 있습니다.

 

두 번째 고전읽기- 알베르 카뮈(김화영 역), 이방인 L’Etranger, 민음사.

: Jacob 김 선

 

 

J'ai couru à la porte et attendu comme un fou dans les oreilles du panneau, mais j'ai entendu son souffle plus tard. Il était surpris comme un chien qui soufflait.

바스락 소리만 나도 문으로 달려가 판자에 귀를 대고 정신 나간 사람처럼 기다리노라면 나중에는 자신의 숨소리가 들려왔는데 그 소리가 마치 헐떡이는 개의 숨결과도 같아서 깜짝 놀라기도 했다.

 

 

단두대에 대해 매우 간단하다는 사실을 뫼르소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계는 그것을 향해 걸어가는 사람과 같은 높이에 설치되어 있었던 것이다. 명백한 사실은 고정적이다. 뫼르소는 마치 누구를 마중 가듯이 걸어가다가 기계와 만나게 된다. 마중 갈 만큼 좋은 만남은 아니다. 그래서 어떤 의미로는 견디기 어려운 노릇이었다. 단두대를 향해 올라간다든가 승천한다는 쪽으로 상상력이 뻗어 갈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과 상상력이 동시에 작용하고 있다. 그런데 그 점에 있어서까지도 사실이 모든 것을 짓눌러 버리는 것이었다. 그저 수치심을 느끼면서, 대단히 정확하게, 목숨이 슬그머니 끊어지는 것이다. 그 이후는 상상의 영역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 밖에 또 줄곧 뫼르소의 머리를 떠나지 않는 것 두 가지가 있었다. 새벽녘과 자신의 상고가 그것이었다. 뫼르소는 스스로 타일러 그러한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럴수록 더욱 생각하는 법인데... 누워서 하늘을 바라보며 거기에 정신을 쏟으려고 노력했다. 하늘은 초록빛으로 변해 갔다. 저녁이었다. 뫼르소는 생각의 방향을 돌리려고 또 애를 쓰는 것이었다. 생각의 방향을 바꾸려는 그의 노력이 애처롭다. 뫼르소는 심장이 뛰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평소 심장 소리를 의식하지 않고 살아가다 언젠가 의식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오래전부터 자신을 따라다니던 그 소리가 멎어 버릴 수 있으리라고는 아무리 해도 상상이 되지 않았다. 상상 너머의 얘기라 상상이 되지 않는 것이다. 그래도 이 심장의 고동 소리가 자신에게 들리지 않을 순간을 생각해 보려고 애썼다. 그러나 헛수고였다. 새벽녘 또는 자신의 상고라는 것이 거기에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현실이 상상의 힘을 잠재우고 있다. 참으로 에너지 소모가 클 것 같다. 뫼르소는 마침내 자신의 마음을 억누르려고 들지 않는 것이 가장 현명한 일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들이 새벽녘에 온다는 것을 뫼르소는 알고 있었다. 불안한 새벽이다. 결국 뫼르소는 밤마다 그 새벽을 기다리며 지낸 셈이다. 누구나 그렇듯 갑자기 당하는 것을 뫼르소는 언제나 싫어했다. 자신에게 무슨 일이든 생길 때면 거기에 대한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 편이 더 나았다. 그 때문에 뫼르소는 마침내 낮에만 조금 자 두었다가 밤에는 꼬박 새벽빛이 천장 유리창 위에 훤히 밝아 올 때까지 꾹 참고 기다리게끔 되었다. 심장을 계속 뛰게 할 유일한 행동이다. 이 행동은 더욱 세분화 되어 변할 것이다. 가장 괴로운 때는 그들이 보통 그 일을 하러 오는 때라는 것을 자신이 아는 터인 그 의심쩍은 시각이었다. 불안이 불안을 증폭시키는 고통의 시간이다. 자정이 지나면 뫼르소는 기다리며 지켜보고 있었다.

자신의 귀가 일찍이 그처럼 많은 소리를 들어 본 적이 없었고 그렇게도 조그만 소리를 분간해 본 적이 없었다. 인간이 예민할 수 있는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그 시기 동안 줄곧 뫼르소는 어지간히 운수가 좋았다. 왜냐하면 발소리가 한 번도 들리지 않았다. 사람이란 아주 불행하게 되는 법은 없는 거라는 엄마의 말이 기억날 정도다. 하늘이 빛을 띠고 새로운 하루가 자신의 감방으로 새어 들 때 형무소 안에서 뫼르소는 엄마의 말이 맞는다는 생각을 했다. 왜냐하면 발소리가 들려와서 자신의 심장이 터지고 말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소리와 심장은 운명공동체가 되어버린 것이다. 바스락 소리만 나도 문으로 달려가 판자에 귀를 대고 정신 나간 사람처럼 기다리노라면 나중에는 자신의 숨소리가 들려왔는데 그 소리가 마치 헐떡이는 개의 숨결과도 같아서 깜짝 놀라기도 했다. 극도로 긴장하고 있는 절박한 한 인간의 숨소리를 스스로 듣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자신의 심장은 터지지 않았고 뫼르소는 다시 한 번 스물네 시간을 벌게 되는 것이었다.

 

처형6일전 (조너슨 라티머 저/ 문영호 역/동서문화사, 2003)
처형6일전 (조너슨 라티머 저/ 문영호 역/동서문화사, 2003)

 

처형 전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계획하는 <처형전6일> 주인공과는 사뭇 다르다. 뫼르소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기다리는 것 밖에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낮 동안에는 줄곧 상고 생각이었다. 뫼르소는 자신의 성찰로부터 최대의 효력을 얻으려고 노력했다. 뫼르소는 늘 최악의 경우를 가정하곤 했다. 상고 기각이 바로 그것이었다. 자신은 죽을 수밖에 없고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죽는 것은 분명했다. 최악의 상황을 그대로 받아 들이는 것이다.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없다는 것도 인정한다. 결국 서른 살에 죽든지 예순 살에 죽든지 별로 다름이 없다는 것을 자신도 모르는 바 아니었다. 그 어떤 경우에든지 당연히 그 뒤엔 다른 남자들 다른 여자들이 살아갈 것이고 여러 천년 동안 그럴 것이니까 말이다. 세상은 나의 죽음과 상관없다는 점이며 그것보다 더 분명한 것은 없다는 것이다. 지금이건 이십 년 후건 언제나 죽게 될 사람은 바로 자신이라는 그러한 추론에 있어서 좀 거북스러웠던 것이 있었다. 앞으로 올 이십 년의 삶을 생각할 때 자신의 마음속에 느껴지는 저 무서운 용솟음이었다. 그 용솟음을 억제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도 이십 년 후에 어차피 그러한 지경에 이르렀을 때에 자신의 생각이 어떠할까를 상상함으로써 눌러 버린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죽는 바에야 어떻게 죽든 언제 죽든 그런 건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명백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뫼르소는 자신의 상고 기각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가장 솔직하고 현실적인 상황 인식이다.

첫 번째 생각 후에 비로소 뫼르소는 두 번째 가정을 생각해 볼 권리로 자신에게 그렇게 하도록 허용할 수가 있었다. 그 두 번째 가정이란 특사를 받는 것이었다. 물론 너무나 기쁜 생각이다. 기상천외한 기쁨으로 눈을 찌르며 튀어 오르는 그 피와 육신의 격정을 진정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 유일한 곤란한 점이다. 열심히 그 부르짖음을 억누르고 타일러야만 했다. 첫 번째 가정에 있어서 자신의 단념이 더욱 타당한 것이 되려면 이 두 번째 가정에 있어서도 뫼르소는 태연스러워야만 하는 것이었다. 태연할 수 없는 자신을 알기에 노력해서라도 두 번째 가정이 일어나길 바라는 마음이 절절하다. 자신이 그럴 수 있을 때에는 한 시간쯤 가라앉은 마음을 유지할 수가 있었다. 이 마저도 뫼르소에게는 상당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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