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감자 천주학 - 성호학파를 가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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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감자 천주학 - 성호학파를 가르다
  • 송성섭
  • 승인 2021.05.04 13: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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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부르는 소남 유동규]
(9) 소남가(邵南家)와 천주학
인천의 잊혀진 실학자, 소남(邵南) 윤동규(1695~1773) 탄생 325주년를 맞아 [인천in]은 소남의 삶과 업적을 총체적으로 조명하는 특집기사를 기획해 격주로 연재합니다. 송성섭 박사(동양철학), 인천대 인천학연구원 원재연 박사, 허경진 연세대 명예교수, 3분이 집필합니다.

 

소남 종가에서 보관하고 있던 천주학 관련 문건

 

소남 종가에는 천주학과 관련한 글이 남아 있다. 소남 가문의 사상을 파악할 수 있는 소중한 문건 중의 하나인데, 한국학 중앙연구원에 보관되어 있다. 이번 글은 『성호사설』 및 『성호전집』 그리고 한국학 중앙연구원의 문건을 바탕으로 성호학파 및 소남 가문이 천주학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견해를 추적해 본다.

소남 선생의 학문적 경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호학파에서 소남 선생이 차지하는 위치를 가늠해 볼 필요가 있다. 이우성 교수에 의하면, 성호학파는 크게 중도파와 좌파 및 우파로 분류되는데, 소남 선생은 우파에 속한다. 성호 우파에는 노성층의 온건주의를 견지한 순암 안정복과 순암의 행장을 쓴 하려(下慮) 황덕길(黃德吉) 그리고 성제(性齋) 허전(許傳) 등이 속한다. 이에 반해 소장층의 급진주의를 대표하는 좌파에는 녹암(鹿菴) 권철신과 손암(巽庵) 정약전 그리고 다산(茶山) 정약용이 속하며, 중도파에는 성호 선생의 조카이자 가학(家學)을 대표하는 정산(貞山) 이병휴를 비롯하여 이가환, 이구환 등이 속한다.

이러한 분류에 따르면, 성호학파에서 사칠이기론(四七理氣論)을 둘러싸고 벌인 신후담과 이병휴 그리고 소남 선생과의 논쟁은 오히려 작은 차이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퇴계와 고봉의 논쟁이 성리학 내에서의 견해 차이였듯이, 사칠신편과 중발(重跋)을 둘러싼 신후담과 소남의 논쟁, 이병휴와 소남의 견해 차이도 결국 좌우학파의 분화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이에 반해 성호학파 내에서 권철신과 정약전 및 정약용의 견해는 큰 차이에 해당하며, 이로 인해 성호학 좌파가 성립하게 된 것이다. 녹암(鹿菴) 권철신은 왕양명(王陽明)의 치지설(致知說)이 매우 옳다고 여기어 순암 안정복으로부터 예(禮)를 방기했다는 비판을 들을 바 있다. 그런데 권철신은 양명학뿐만 아니라 천주학마저 받아들임으로써 성호학 우파 및 중도파와는 다른 길을 걷게 되었던 것이다.

소남 선생이 활동하던 시기에 가장 민감한 문제는 서학(西學) 및 천주학이었다. 서학(西學)이 서구의 천문학 및 지리 과학을 포함하는 학문을 뜻한다면, 천주학(天主學)은 이른바 천주를 지존으로 모시는 야소회를 지칭하는 학문으로서 당시 조선에서 뜨거운 감자로 등장했던 학문이었다.

성호 이익은 동양의 천문학이나 지리학에 비해 서학(西學)이 매우 탁월하다는 입장이었다. 성호 이익은 『성호사설』 「천지문(天地門)」에서 “서양의 역학은 중국으로서는 거의 미칠 수가 없다(西國之曆中華殆不及也). 서양이 첫째요, 회회(回回), 즉 이슬람이 그 다음”이라는 입장을 표명하였다. 또한 성호는 족손 휘조에게 답하는 편지(答族孫輝祖, 1752년)에서도 마찬가지 견해를 피력하였다.

“천문(天文)과 지리(地理)를 살피는 기수(器數)와 계기(械機)의 정교한 수준은 중국에서 소유하지 못한 것들일세. 대지를 두루 돌아다니면서 혼개(渾蓋)의 이치를 미루어 밝혔네. 역법(曆法)은 천년의 일지(日至: 동지와 하지)를 빠짐없이 미루어 기록한 것으로, 백년이 지나더라도 털끝만큼도 어긋남이 없네. 내가 애완(愛玩)하는 것이 이것들에 있다네.”

 

 

소남도 예수회 선교사 페르비스트(Ferdinand Verbiest)가 북경에서 1672년에 저술한 지리서 『곤여도설(坤輿圖說)』 뿐만 아니라, 양마락(陽瑪諾, Emmanuel Diaz. Junior)이 저술한 『천문략(天問略)』과 이탈리아 선교사 민명아(閔明我, Philippus Maria Grimardi)가 제작한 『방성도(方星圖)』 등의 서양 천문 서적을 성호에게서 빌려 필사하여 읽을 정도로 서학(西學)에 밝았다.

그런데 천주학(天主學)에 대한 성호의 견해는 서학과는 사뭇 달랐다. 성호는 이마두(利瑪竇), 즉 마테오 리치(Matteo Ricci)가 지은 《천주실의》 발문〔跋天主實義〕에서 “그 학문은 오로지 천주(天主)를 지존(至尊)으로 삼는데, 천주란 곧 유가의 상제(上帝)와 같지만 공경히 섬기고 두려워하며 믿는 것으로 말하자면 불가(佛家)의 석가(釋迦)와 같다.”고 평하였다. 그렇다면 성호는 무슨 이유로 천주학이 불교와 같다고 본 것인가? 그것은 바로 윤회설이었다.

《천주실의》 발문에 의하면, 윤회설은 옛날 서국(西國)의 폐타와랄(閉他臥剌), 즉 피타고라스가 백성들이 거리낌 없이 악을 행하는 것을 통탄하여 윤회설(輪回說)을 만들어 내었는데, 그러한 윤회설을 석가가 계승하였으며, 한나라 명제(漢明帝) 때 불교가 수입되면서 윤회설도 중국에 전해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마두(利瑪竇)가 극로로 비판한 것은 불교의 윤회설이었다. 즉 불교의 윤회설을 비판함으로써 천주학을 위한 자리를 마련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성호가 입장에서 보면, 천주학은 피타고라스가 만들어 낸 윤회설과 천당⸱지옥설이 결합해 낸 산물에 불과하다.

“이렇게 따져 보면 서양의 교화가 생겨난 연유도 대략 이해할 수 있다. 생각건대, 서양의 풍속도 차츰 투박하게 변해서 그 길흉의 인과응보에 대해 점차 믿지 않게 되었을 것이다. 이에 천주경(天主經)의 가르침이 생겨났는데, 그 처음엔 중국의 《시경》과 《서경》의 말씀 같은 데 불과하였으나 사람들이 오히려 따르지 않을까 염려하였으므로 곧 천당과 지옥의 설을 보익하였다가 지금까지 전해진 것이다. 그 후의 여러 가지 신령한 기적은 바로 저들이 말한 대로 마귀가 사람을 속인 소치에 불과하다.”

인과응보. 착한 사람은 복을 받고, 악행을 저지른 사람은 벌을 받게 되어야 권선징악의 윤리가 성립하게 된다. 그런데 도리어 갖은 수를 써가며 부덕한 방법으로 부를 축적한 사람이 벌을 받기는커녕 떵떵거리며 산다면, 사람들은 날마다 선을 행하지 않고 악을 행하기 위해 발버둥 칠 것이다. 그래서 피타고라스가 생각해 낸 것이 윤회설이었다. 악행을 저지른 자가 설령 현세에서 벌을 받지 않다라도 결국은 벌을 받아 윤회하게 된다는 것이다.

플라톤도 『파이돈』에서 혼을 보살피기보다는 몸을 보살피기 위해서 살았던 사람들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즉 먹을 것이나 마실 것들과 관련된 즐거움들, 또는 성적인 즐거움에 대해 갈망하는 삶을 살았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이러한 사람들은 사후에 신체적(물질적)인 것의 욕망으로 해서 다시금 몸 속에 묶이어 갇히게 되는 삶을 떠돌게 되는데, 폭식, 난폭함, 주색(酒色)에 탐닉하고 이에 대해 잘 대처하지 못한 자들은 나귀들과 그런 짐승들의 부류로 윤회하고, 불의(不義)와 참주 정치 그리고 강도 짓을 선호했던 자들은 이리들과 매들 그리고 솔개들의 부류 속으로 윤회하며, 이들 중에서 평민적이고 시민적인 훌륭함(덕)을 닦은 이들은 어쩌면 시민적이고 유순한 부류로, 즉 꿀벌들이나 말벌들 또는 개미들의 종족으로, 아니 그뿐만 아니라 같은 인간의 종족으로 다시 윤회하게 된다는 것이다.

성호는 이러한 윤회설에 천당⸱지옥설이 결합한 결과가 천주학이라고 보았다. 즉 천주학의 천당⸱지옥설은 윤회설의 또 다른 버전으로써 착한 사람은 천당 가고 악한 사람은 지옥에 떨어지니, 현세에서 천주의 말씀을 믿고 따라야 한다는 설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유학자인 성호가 보기에, 비록 천주학이 불교의 윤회설을 비판할지라도, 기실 천당⸱지옥설 또한 윤회설과 궤를 같이하며, 불교나 천주학이나 모두 미덥지 못하다는 것이다.

소남 선생(1695~1773)이 천주학에 대해 쓴 글은 아직 발견하지는 못하였다. 다만 소남 종가에는 천주학과 관련한 글이 두 편 남아 있다. 소남 가문의 사상을 파악할 수 있는 소중한 문건 중의 하나인데, 한국학 중앙연구원에 보관되어 있다. 이 글에 신유(辛酉)라는 연도가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1805년 즈음에 작성된 것으로 보이며, 순조 때 대사간(大司諫)을 지낸 오정원((吳鼎源)과 극배(克培)의 이름이 등장한다. 아마도 이 문건은 소남 선생의 증손자인 윤극배(尹克培: 1777~1839)가 쓴 것으로 추정된다. 이 글에서 안정복은 서양학을 배척하였다고 언급하고 있으며, 대사간 정원((鼎源)은 서양학을 무부(無父), 무군(無君)의 측면을 비판하고 있다.

무부(無父), 무군(無君)은 『맹자(孟子)』에 나오는 용어이다. 춘추전국시대에 성인이 도가 쇠퇴하여 제후들이 방자하게 되고, 선비들이 괴이한 학설을 남발하여 양주와 묵적의 학설이 천하에 가득차게 되었을 때, 이들의 사상을 비판하기 위하여 맹자가 사용한 용어가 바로 무부, 무군이다. 내 몸에서 터럭 하나를 뽑아 세상을 구제할 수 있더라도 그러하지 않겠다는 것이 양주의 위아(爲我)설이고, 남의 어버이를 내 부모보다 먼저 사랑하고 이롭게 해야 효행이 천하에 가득차게 된다는 것이 묵자의 겸애(兼愛)설인데, 이로부터 모든 제왕을 무시한다는 무군(無君)과 내 부모를 등한시한다는 무부(無父)의 비판을 받게 된 것이다. 유학의 측면에서 보면, 천주학은 무부(無父), 무군(無君)의 사상이며, 국가와 가족의 근간을 해치는 것이기에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사상이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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