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의 매립 - 인천을 둘러싼 산업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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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의 매립 - 인천을 둘러싼 산업시설
  • 편집부
  • 승인 2021.05.06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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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추홀 시민로드 역사를 거닐다]
(1) 물의 도시, 미추홀 - 김용하 / 인천도시연구소 소장
인천in은 미추홀학산문화원이 진행하는 지역인문강좌 ‘미추홀 시민로드 역사를 거닐다’를 10회에 걸쳐 요약해 싣습니다. 이번 강좌는 미추홀 근·현대 역사를 개괄하는 한편 ‘공간과 사람이 만든 미추홀의 생태’를 주제로 지역에 대한 인문지리적 접근을 통해 실제적인 이론과 담론을 학습합니다. 5월6일부터 7월8일까지 매주 목요일 10강이 이어집니다. 첫번째 강좌는 '물의 도시, 미추홀'을 주제로 김용하 인천도시연구소 소장이 진행합니다.

 

 

- 미추홀(彌鄒忽) = ‘물의 도시’(?)

인천은 삼국시대 때 ‘물골’이라 불렀다. 즉, 물(水) + ㅅ + 골이었는데, 이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 미추홀(彌鄒忽)이다.(최재용 設)

이를 다시 풀어보면, 인천은 '바다(갯벌)의 도시'로 설명할 수 있다. 인천 앞다바는 그만큼 조수간만 차이가 커 개벌이 많았으며, 해안선의 굴곡도 복잡했다.

 

- 고지도와 현대지도에서 보는 해안 경관

인천 앞바다를 볼 수 있는 우리나라 고지도는 대동여지도(1861년)가 있으며 이후 1910년 일본제국, 1917년 조선총독부 이름으로 나온 지도가 있다. 이를 토대로 보았을 때 지난 100여년간 인천의 해안선과 연안의 섬들은 엄청난 변화를 보인다.

 

대동여지도에 볼 수 있는 인천지역 해안선과 섬들
대동여지도(1861년)에 볼 수 있는 인천지역 해안선과 섬들

 

1910년대와 1950년대 지도를 비교했을 때 주안염전, 북성지구, 제2축항, 조선염업, 용현·학익 공장, 송도유원지, 남동염전이 새로 눈에 띈다. 1937년 수인선 협궤열차가 개통했으며, 이 시기 일제의 전쟁(군수)에 필요했던 소금을 수탈했다.

인천 연안의 섬 47곳 중 26개 섬은 일부가 매립(또는 다리로 이어짐)됐고, 12개 섬은 완전 매립됐으며 현재 9개 섬만이 남아 있다. 현존하는 섬은 물치도(작약도), 소암도, 외암도, 매도, 호도, 정도, 세어도와 세어도 남측의 소다물도, 대다물도 등 9개다. 월미도, 소월미도는 다리로 이어져 육지와 하나가 된 경우로 1974년까지 섬으로 존치했다.

중구 항동에 있던 사도(沙島)와 분도(糞島)는 각각 인천항 제1선거(갑문) 제2도크 공사로 없어졌다. 동구 만석동 묘도(猫島)는 동일방직 북측 삼미사 주변지역에 위치해 60년대까지도 괭이부리로 불려왔는데 1910년대 공유수면매립으로 내륙화되었다. 미추홀구 용현동 토지금고 남측 대동창고 자리에 있던 원도(猿島-낙도로 표기됨)와 제2경인고속도로 입구에 있던 소원도(小猿島)도 흔적도 없이 매립됐다.

연수구 옥련동 아암도는 송도해안도로 건설로 내륙화되고, 남동구 고잔동 대원예도(遠禮島)와 소원예도는 남동공단에 편입됐다. 서구 오류동의 명도, 륙도, 뉴도, 율도는 검단 오류농장에 편입되거나 경계지가 되었고, 소율도는 동아매립지로 들어갔다. 서구 경서동 거첨도, 복숭아섬, 승도, 토도(토끼섬), 길무도 등은 수도권쓰레기매립지로 편입되거나 경계지로 육지화되었다. 역시 경서동의 청라도, 문첨도, 소문첨도, 이도, 일도, 장금도 등은 동아매립지, 청라 개발 등으로 사라졌다. 서구 원창동 율도, 소도, 자치도 등은 발전소 부지 등으로 편입됐다.

해안선도 크게 줄어들 수 밖에 없었다. 1987년 기준 해안선의 변화(인천통계연보)만 보더라도 1981년 103.8 km이던 것이 1984년 76.5 km로 27.3 km나 줄었다.

 

해안선 비교(현대, 70년대, 일제강점기)_역사지리정보db
해안선 3중 비교(현재, 1970년대(분홍색), 일제강점기(파랑색))

 

- 도시계획에서 바라보는 바다

해안선을 경계로 갯벌은 잠재적 토지 개발의 대상이었다. 세종대 국가전략연구소는 지난 2012년 일명 ‘광개토 프로젝트’라는 것을 제안했다. 경기만 일대 10억평을 매립해 부지를 확보, 외국인 투자를 유치하고 분양 수익을 제2의 국민연금으로 하자고 제안한 적이 있다.

당시만해도 갯벌은 자연이 아니라 개발의 대상이었다. 도시적인, 개발의 관점에서 바다를 활용해야 했다. 기존의 육지를 부지로 개발하는 것보다 갯벌은 깔끔한 직선 도시로 개발이 용이했으며 보상비 없이 이익이 나는 일이었다.

1981년 인천이 인구 100만 도시로 성장했다.(40년 후인 지금 300만이 되었다) 이 즈음 송도 신도시와 서구(청라) 앞바다 등 대규모 매립을 통한 인천도시 장기 종합발전 계획이 움텄다.

매립의 이유(용도)를 살펴보면, 개항기는 인천 연안 매립지를 도시용지로 썼다. 일제 강점기에는 염전, 공업용지로, 1960년대 들어서는 주로 공업용지로, 70년대는 항만시설로 매립지를 이용했다. 

1980년대 들어 식량 자급자족이 강조되면서 농업용지(동아매립지)로, 또 99올림픽을 앞두고 서울 난지도 쓰레기매립지의 대체부지(수도권매립지)로 계획됐다. 이와함께 대기업, 공사의 공업용지로도 계속 매립됐다. 90년대는 항만시설, (전력)발전용지, LNG인수기지 등 기피시설이 그리고 2000년대는 공항용지로 대거 매립됐다. 원래 공유수면 매립지는 20년간 용도를 변경할 수 없도록 법제화했으나 이 마저 10년으로 완화됐다.

100년 이상 갯벌을 매립한 결과 인천의 바다는 수도권매립지, 경인운하 시설, 영종대교, 인천국제공항, 청라국제도시, 북항, 인천제철, 남항, 송도유원지, 남동공단, 한국화약(현재 한화아파트), 송도국제도시, 인천신항 및 국제여객터미널, LNG인수기지 등 산업시설(일부 아파트단지)로 둘러싸여 바다를 쉽게 볼 수 없는 도시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현재도 영종대교 좌우로(운염도 앞) 해양수산부가 준설토 매립으로 관광지로 추진하는 영종 1,2 투기장이 있다. 각각 4천164㎡, 3천161㎡ 규모며 인접해 인천시가 추진하는 3천905㎡까지 합하면 여의도 면적의 4배인 1만1천230㎡에 이르는 바다가 이미 매립되거나 추진되고 있는 실정이다.

 

- 갯벌 매립과 사라진 수산 자원

국립환경과학원 조사(2004)에 의하면 서해안 지역은 조석작용이 탁월하여 간석지, 염습지, 포켓비치 등의 고유한 경관 형성되고 있으며, 해안사구와 하구역이 넓게 발달해 있다. 그러나 해안 개발로 인해 자연경관 질이 급속히 저하하고 있다고 보고하고 있다.

주로 간척 및 매립에 의해 간석지와 염습지 등의 생태적 점이지대(漸移地帶)가 격감하고 있다는 보고다.

우리나라 서해의 해안선은 드나듦이 심해 '물의 도시', 바다와 갯벌의 도시'로 알려져 왔으나, 1910년대에 비해 고유 해안경관의 특징을 상실해 왔다.

실제, 1910년대에 비해 해안선이 1,400 km(약40%) 줄고, 굴곡도 크게 감소하여 직선화가 진행하고 있는 것을 지도에서 쉽게 알아볼 수 있다.

1930년대 인천부 조사에 의하면 인천 연안에서 조개잡이로 바지락, 맛조개, 가무락조개(모시조개), 대합을 낚시로는 볼락, 장어, 농어, 감성돔, 양태, 문절망둑, 숭어 등을 잡았다고 전하고 있다.

고깃배가 드나들던 북성포구도 해양수산부의 준설토 투기로 7만㎡가 매립되고 있으며, 소래포구도 매립돼왔다. 낙섬사거리 제2경인고속도로가 시작하는 용현갯골도 매립될 예정이다.

인천 최대 규모의 갯벌 매립은 54㎢(약 1600만평) 규모의 송도국제도시다. 이 규모는 부천시 와 맞먹는 규모다.

 

'미추홀 시민로드 역사를 거닐다' 강좌 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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