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땅에서 나그네로 살아가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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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땅에서 나그네로 살아가는 삶
  • 김호림
  • 승인 2021.06.17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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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칼럼] 김호림 / 자유기고가

 

 

흔히 역사는 승자들이 쓴 그들의 이야기라고 한다. 이 말은 역사적 사실이 왜곡될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미국의 역사 교과서에도 침묵하는 고통스러운 과거의 금기가 있다. 이 금기를 깬 사람 중의 하나가 국부인 벤자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인데, 그는 ‘야만적인 삶을 맛본 유럽인은 우리 사회에서 살 수 없다’라고 인정했다. 그는 인디언들에게 붙잡혔다가 풀려난 ‘문명화된’ 백인 남녀들이 왜 변함없이 숲속으로 다시 도망갈 좋은 기회를 잡고 싶어 하는지에 대해 설명했다.

이 현상을 네덜란드 출신의 사상가이자 저널리스트인 뤼트흐르 브레흐만(Rutger Bregman)은 그의 저서인 ‘휴먼카인드’(Humankind, A Hopeful History)에서 이렇게 말한다. “식민지 주민들은 수백 명씩 황야로 도망쳤으나 그 반대의 현상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누가 그들을 비난할 수 있을까? 식민지 주민들은 인디언으로 살면서 식민지 농부와 납세자보다 더 많은 자유를 누렸다. 여성에게는 그 매력이 훨씬 더 컸다. ‘우리는 원하는 만큼 여유 있게 일할 수 있었다.’ 이는 그들을 구출하기 위해 파견된 동료들로부터 숨어있던 한 식민지 여성이 한 말이다. 또 다른 사람은 프랑스 외교관에게 ‘이곳에는 주인이 없어요. 나는 내가 원하면 결혼하고 내가 원하면 다시 독신으로 될 수 있어요. 당신의 도시에서 나만큼 독립적인 여성이 단 한 명이라도 있나요?’라고 이야기했다.”

왜 그 여인은 원주민사회를 동경했을까? 인디언 사회는 여성적 가치가 중심을 이루는 사회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 사회에서는 여성의 지위가 높아 가정과 살림은 여성과 어른 들의 몫이고, 결혼 상대를 정하는 것도 순전히 여성의 몫이었다고 한다. 여성이 태어나면서부터 완전한 존재로, 신성한 존재로 여겨진 것은 내부에 ‘생명의 불꽃’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편 남자들도 그러한 신성을 유지하기 위해 벌판에서 산에서 위대한 신령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아 자기 공동체를 위해 자기 정체성과 사명감을 받으려는 노력을 부단히 수행한다는 것이다.

이제 그들의 보편적인 삶과 자연에 대한 태도가 어떠했는지를 알아보자. 그들은 자연이 주는 지혜를 깨닫고, 그 깨달음이 가리키는 대로 자연과 하나가 되어, 그 질서에 순응하며 순박하게 살아온 것으로 보인다. 그 예로, 1854년 북아메리카 서북부에 거주하던 두와미시 족과 수쿠아미시 족의 인디언 추장인 '시애틀'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알 수 있다. 그들이 대대로 살아온 땅인 오늘의 워싱턴주를 매수하겠다고 제의한 미합중국의 프랭클린 피어스 대통령에게 보낸 다음과 같은 답장에서 볼 수 있다. 당시 피어스 대통령은 추장 시애틀의 편지에 깊은 감명을 받아 이 지역을 그 추장의 이름을 따서 '시애틀'이라고 명명했다고 한다.

세상의 어느 누가 쓴 시나 잠언보다 지혜롭고 애잔하게 울림을 주는 ‘시애틀’ 추장의 답장 편지 요점을 소개하면 이러하다. ‘우리는 왜 이곳에 있는지의 이유를 당신들이 알아야 한다. 당신들은 이곳에서 무엇을 하려고 하는가? 그대들은 어떻게 하늘이나 땅의 온기를 사고팔 수 있는가? 우리는 땅의 한 부분이고 땅은 우리의 한 부분이다. 당신들의 탐욕을 이해할 수 없다. 당신들은 초원의 짐승을 마구 죽였다. 짐승 없는 세상에서 인간은 무엇인가? 만물은 서로 맺어져 있다. 당신들이 이 땅에 온 이후 우리에게 남은 것은 삶이 아니라 생존해야 하는 문제이다. 이 땅이 우리 조상의 뼈이고 우리 종족의 삶으로 충만했던 곳임을 그대 아이들에게 가르쳐주라.‘

이 편지에서 ‘시애틀’ 추장은 그들이 자기 땅에서 자연과 함께 기뻐하며, 즐겁게 살아왔음을 의연하게 알려 준다. 그 땅을 사려는 백인들에게 분명하게 물어볼 것이 있다고 말한다. 그 땅을 사서 무엇을 할 것인가의 궁극적인 물음이다. 즉 어떤 가치를 창출하려고 하는지, 그리고 그 가치는 그들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느냐는 목적론적 물음이다. 그다음 거룩한 땅이 과연 매매의 목적물이 될 수 있는지를 묻는 종교적이고 철학적 질문이다. 왜냐하면, 인디언 원주민들은 그 땅과 일체이며, 그 땅 위의 모든 생명체가 형제요 한 가족이기 때문에, 전혀 사고파는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이유이다. 그리고 자연과 함께 그 아름다움을 누리기보다는, 자연을 단지 그들의 탐욕을 만족시킬 대상으로 삼는 자들의 생각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논리이다. 과연 인디언 후손들은 이 ‘시애틀’ 추장의 당당하고 명쾌한 논리를 단지 정신적 승리라고 인정하는지? 아니면 패자(敗子)의 의연한 지혜로운 잠언으로 기억할까? 그러나 어찌하랴, 무력한 그들은 자신의 생활 터전이며 혼이 담긴 땅을 어쩔 수 없이 팔게 되었고, 자기 땅에서 나그네로 살아가는 삶을 살았으니!

어찌 보면 그들뿐 아니라 우리 모두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아가는 여행자들이다. 시애틀 추장의 이 편지는, 잠시 머물 곳을 마치 영원히 소유할 것처럼 땅과 거주할 처소의 가격에 집착하는, 오늘의 우리 모습을 되돌아보게 하는 성찰의 아포리즘으로 보인다.

이처럼 유럽 식민지 문명과 아메리카 원주민사회의 참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무엇이 문명이고 야만인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야만의 영어 어원 ‘barbarian‘은 고대 그리스에서, 그들이 사용하는 말을 쓰지 않는, 이방인을 가리키는 ‘barbaros’에서 기원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야만이란 어휘는 문화의 수준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말이다. 흔히 인류의 문명발달을 이야기할 때 수렵 채취사회에서 농경정착사회로 발전하여 도시국가를 이룩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농경이 시작되자 경작을 위한 인간의 노동 고통은 수렵시대보다 그 강도(强度)가 더 심해졌다고 한다. 지난 2세기 동안 삽시간에 상황이 너무 좋아져서 그동안 인간의 삶이 얼마나 혹독했는지를 잊어버렸기 때문이라고 비평가들은 문명의 역기능을 설명한다.

이같이 문명은 인류에게 항상 선(善)이었고, 순기능만을 해오지 않았을 것이다. 구약에서도 보면 노아 홍수 이후 인간은 동방으로 옮겨가 메소포타미아지역의 시날 평지에서 성읍과 높은 바벨탑을 건설하여 온 지면으로 흩어지기를 거부하는 모습을 볼 수 있고, 소돔과 고모라에서 타락한 문명 생활을 즐기는 악한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들은 결국, 하나님의 진노로 다시 흩어지고, 멸망 당하는 운명이 되었다.

가끔 인디언의 기도문을 읽을 때마다 그들의 몸에 밴 침묵이 주는 지혜를 생각해본다. 그들의 정제된 언어에서 진실과 아름다움을 본다. 그들의 언어는 눈보라의 무게를 견디지 못할 잎들이 어머니 대지 품으로 돌아가듯 부드럽고 가볍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의 언어는 무겁다고 한다. 말과 행위가 다른 사람은 그 사회에서 불명예스럽게 여겨지기 때문이고, 침묵이 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그들은 몸과 마음과 영혼의 절대적이고 완전한 균형의 증거인 침묵의 힘을 신뢰한다. 그리하여 항상 평온을 유지할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침묵은 장차 어머니가 될 여성이 반드시 지켜야 할 생활의 규칙이라고 한다. 그들은 실로 천의무봉(天衣無縫)의 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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