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한 아들과 딸을 바라보는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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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한 아들과 딸을 바라보는 시선
  • 최원영
  • 승인 2021.07.20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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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영의 책갈피] 제9화

 

 

아들과 딸이 결혼할 나이가 되면 부모는 으레 걱정이 큽니다. 자식들이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똑같은 내 자식이지만 아들과 딸을 바라보는 시선에서는 차이가 납니다.

인터넷 자료 중에 재밌는 사례가 하나 있습니다.

친구 사이인 두 부인이 만나 수다를 떨고 있다.

 

한 부인이 물었다.

“네 아들은 어찌 지내니?”

“가엾게 지내. 불행한 결혼을 했어. 내 며느리는 집안 일엔 손도 까딱하려 들지 않아. 요리건, 빨래건, 바느질이건, 청소건 할 것 없이 모두 내버려 두고는 오직 침대에서 잠이나 자고 책이나 뒤적거려. 그 불쌍한 녀석은 제 아내를 위해 침대까지 아침 식사를 가져다줘. 넌 이런 사실을 믿을 수 있겠니?”

“안됐구나. 네 딸은 어때?”

‘딸 아이는 행운이야. 그 애 남편은 천사 같아. 자기 처에겐 집안 일을 하나도 시키질 않아. 요리며 빨래, 청소 따윈 하인들이 다 해주고, 남편은 그 애를 위해 침대까지 아침 식사를 날라다 준다고. 그래서 딸애는 온종일 잠이나 자고 책이나 뒤적이고 살아.’

 

어때요? 많이 들어보신 이야기지요? 이렇게 우리는 ‘나’ 중심적으로 사유하고 판단하며 살아갑니다. 그렇게 해서 형성된 ‘왜곡된 판단’을 마치 ‘사실’이라고 믿기 때문에 때로는 서운해하고 화를 내면서 살아가는지도 모릅니다.

《인생을 아름답게 사는 작은 이야기》(이도환)에 과거와는 전혀 다른 스승의 모습을 보고 어떻게 곡해하는지를 알 수 있는 좋은 사례가 나옵니다.

 

깨달음 얻기 위해 순례를 떠난 제자들이 10년 만에 다시 스승을 방문했다. 그러나 스승의 얼굴을 보자마자 인사도 안 하고 나왔다. 옛 모습이 아니어서다. 온갖 사치스러운 물건에 둘러싸여 있었다. 실망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검소하고 금욕적이라고 소문난 다른 스승을 찾아갔다. 소문대로 그는 검소해서 자신의 소유라고는 입고 있던 낡은 옷이 전부였다.

예의를 갖춰 인사를 올리며 말했다.

“스승님의 엄격하신 생활방식이 존경스럽습니다. 전에 저희가 따르던 스승님은 이제는 구도자의 길을 포기하신 것 같아요. 비단옷에 온갖 보석으로 몸을 치장하고 있습니다. 아마 세상의 유혹에 넘어가신 것 같아요. 이제 새로운 스승님의 가르침을 받으려 합니다.

저희를 받아주십시오.”

스승이 말했다.

“그대들 판단은 틀렸노라. 보석과 비단옷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비단옷과 보석이 특별히 필요 없는 것이기에 그걸 추구하지 않는 것뿐이지, 그런 것들 자체가 나쁜 것이기에 멀리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것은 우리 구도자들에게 싸워서 이겨야 할 적도 아니고, 없애 버려야 할 무서운 물건도 아니다. 그저 보석은 보석이고, 비단옷은 비단옷일 뿐이다. 다만 그것 때문에 진리를 깨우치는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경계할 뿐이다. 그것 때문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다면 사치스러운 물건에 둘러싸여 있거나 아니거나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뜻이다. 너희가 따르던 그분은 사치스러운 물품에 둘러싸여 있어도 영향을 조금도 받지 않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마찬가지로 내가 이렇게 엄격하고 금욕적인 것은 내가 이런 삶을 살아야만 그런 것에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그대들은 내가 슬퍼하는 이유를 이제 알겠는가?”

 

맞습니다. 비싼 차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명품 옷을 입고 다닌다고 해서 그 사람이 허영에 들뜬 사람이라고 판단해선 안 됩니다. 다만 우리가 지녀야 할 태도는 비싼 차와 명품 옷이 우리 자신의 인격을 결정짓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자각하는 것입니다.

성급히 판단하면 사실을 왜곡하기가 쉽습니다. 일단 판단이 서면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행위를 스스로 합리화해서 그것이 기정사실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행동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가 없습니다.

《카네기 인간관계론》에 어느 흉악범의 고백이 나옵니다. 정상적으로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은 흉악범의 고백을 이해하기가 어려울 겁니다.

 

1931년 5월 7일 뉴욕에서 애인 집에 숨어있던 흉악한 살인범인 크로울리가 150명의 경찰에 의해 체포됐다. 그는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포위 중에 ‘관계자 여러분에게!’라는 제목의 편지를 썼다.

‘피로에 지쳐있기는 해도 내 가슴속에는 온화하고 다정한 마음이 있다. 그것은 어느 누구에게도 해를 주지 않는 부드러움이다.’

살인 사건이 발생하기 전, 그는 애인과 자동차 안에서 애무를 했다. 경찰이 와서 ‘운전면허증을 보여달라.’는 말에 권총을 발사했다. 그리고 경찰의 권총을 빼앗아 다시 한번 발사했다.

그는 전기의자에 의한 사형선고를 받았다. 싱싱교도소의 사형수 감방에 도착했을 때 그는 말했다.

“이것은 내가 사람들을 죽였기 때문에 받는 형벌이다.”라고 말하지 않고, “나는 나 자신을 지킨 것뿐인데 이 꼴이 되었다.”라고 말했다.

 

미국 제일의 악명 높은 갱단 두목인 알 카포네의 말이다.

“나는 내 생애의 황금기를 전부 사회를 위해 바쳤다. 그런데 내가 얻은 것은 차가운 세간의 시선과 비난, 그리고 범죄자라는 낙인뿐이었다.”

 

흉악범의 이런 변명을 여러분은 이해하실 수 있나요? 아마 이해하지 못하실 겁니다. 그런데 저들은 저렇게 생각합니다. 아니, 저런 마음으로 살았다고 스스로가 믿고 있습니다. 바로 자기합리화가 만들어놓은 왜곡된 믿음입니다.

저자는 싱싱 교도소의 소장인 루이스 로즈의 말을 전합니다.

싱싱교도소 수감자 중에서 자신을 악인이라고 여기는 사람은 거의 없다. 자신을 선량한 일반 시민과 같다고 여기며 자신을 합리화한다. 자신이 왜 금고를 털 수밖에 없었는지, 왜 방아쇠를 당길 수밖에 없었는지를 그럴듯하게 말한다. 그럴듯한 구실을 마련하거나 억지 논리를 내세워 자신의 반사회적 활동을 정당화하려고 시도하며 자신이 억울하게 갇혀 있다고 주장한다.

누구나 자신이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믿고 살아갑니다. 정말 옳은 일을 하는 사람이나 악한 일을 하는 사람들 모두 말입니다. 자신이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야 그렇게 행동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생각하게 만드는 과정에서 자기합리화가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자신의 행동이 정당했다고 스스로 합리화시키는 것이 사람의 본능이라고 하면, 방송을 시작하면서 예로 든 결혼한 아들과 딸의 모습을 보면서 의도적으로라도 이렇게 판단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며느리에게 헌신적인 아들을 보고는 ‘내 아들은 참 좋은 신랑이다’라고 여기고,

딸에게 헌신적인 사위를 보고는, ‘내 사위는 참 좋은 신랑이다’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똑같은 상황을 마주하면서 이렇게 생각을 긍정적으로 해석하면 행복이 조금 더 다가오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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