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하 - 천험(天險)의 거센 물살 역사를 낳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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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하 - 천험(天險)의 거센 물살 역사를 낳고
  • 장정구
  • 승인 2021.08.24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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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하천이야기]
(43) 염하와 다리 - 장정구 / 인천시 환경특별시추진단장
김포 문수산에서 바라본 염하와 강화대교

 

염하(鹽河), 강화와 김포 사이의 물길을 이르는 말이다. 글자 그대로 짠강이다. 숭어, 새우, 깨나리, 황복, 장어 등 물고기들이 물을 따라 어떤 때는 물살을 거슬러 오간다. 수도권 쓰레기들이 인천 앞바다로 흘러드는 길목으로 요즘 새롭게 주목받는다. 조선시대 경상, 전라, 충청 삼남 지방의 세곡미를 운반하는 배들이 센 물살과 암초에 수많이 난파된 험난한 뱃길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강하구가 접경지역으로 틀어막히면서 염하를 오르내리는 배들은 볼 수가 없고 강화 더리미포구와 초지진선착장, 김포 대명포구의 어선 몇 척이 물때에 맞춰 그물을 내렸다 올렸다 할 뿐이다.

 

석맥(石脈)이 물속에 옆으로 뻗어서 마치 문턱과 같고 가운데가 오목하다

이중환의 택리지』 「팔도총론경기편에 언급된 손돌목 이야기이다. 손돌목 아래 남쪽부터가 서해 큰 바다라 소개하며 배들이 손돌목 밖에서 밀물(滿潮)이 되기를 기다렸다 염하를 지나는데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배가 깨진다고 설명하고 있다. 김포시 대곶면 신안리 언덕 위 염하가 내려다보이는 곳에는 손돌묘가 있다. 전설에 의하면 왕이 피난길에 염하를 건너는데 갑자기 물살이 빨라지고 위태로워지는 것을 보고 뱃사공의 목을 벴다. 뱃사공은 죽으면서도 바가지를 물에 띄우고 그것을 따라가라 했고 뱃사공 말대로 하여 안전하게 염하를 건넜다. 왕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뱃사공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장사를 지냈는데 이 뱃사공이 손돌이다. 매년 음력 1020일경 부는 바람을 손돌바람이라고 한다는 내용이다. 암튼 염하의 손돌목은 좁은 물길로 빠른 물살로 인해 침몰 사고가 빈번했던 곳임에는 분명해 보인다.

광성보에 위치한 손돌목대와 용두돈대

 

1627112, 후금(청나라) 군대가 언 압록강을 넘었다. 침략한 지 불과 열흘 만에 평양에 도착했다. 인조는 강화도로 몽진 길에 올랐다. 정묘호란이다. 강화는 고려와 조선 시대 임금님이 피난하는 보장지처(保障之處)였다. 해안가를 따라 보와 진, 돈대 등 방어시설들이 지금도 곳곳에 남아있다. 염하를 따라서도 월곶진과 갑곶진, 용진진, 용당돈대, 화도돈대, 오두돈대, 광성보, 용두돈대, 덕진진, 초지진 등이 위치한다.

강화로(江華路)는 한양에서 한강을 지나 강화도로 이어지던 간선도로다. 서대문에서 아현고개를 넘어 양화진에서 강화까지 이어진 옛길이다. 조선시대에 한반도를 방사상으로 연결하던 도로 가운데 제6로에 해당한다. 김포구간은 대략 지금의 48번 국도와 비슷했을 것이다. 신경준의 도로고(道路考)에 따르면 강화로는 명칭이 경성서저강화로제육(京城西抵江華路第六)’이며 한성에서 한강을 건너 양화진-철곶천-양천-악포교-김포-백석현-통진-갑곶진-강화를 거쳐 교동도까지 이어지던 길이다. 인조는 정묘호란 때 이 길로 강화 몽진길에 올랐을 것이고 병자호란 때는 이 길이 막히면서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다.

 

조선시대 지도들을 보면 염하를 건널 수 있는 곳은 두 곳이었다. 손돌목과 성동나루. 통진을 거쳐 강화로 가는 나루가 성동나루이고 건너편이 강화 갑곶진이다. 성동나루 뒤로 문수산성이 있다. 1872년 통진부 지도에는 성동나루 잔교가 문수산성 성문에서 염하로 쭉 나와 있다. 성동나루는 조선초기 박신에 의해 선착장에 석축로가 축조되어 1920년경까지 사용되었다 한다. 석축로는 지금도 남아 있다. 천연 요새인 손돌목의 광성보는 바다에서 한강으로 진입하는 입구로 염하를 건너 강화로 가는 또 하나의 루트였다. 지금은 강화대교와 초지대교, 두 다리를 이용하여 염하를 건넌다. 염하의 거센 물살을 아는 사람은 어부뿐이다.

효종 4(1653), 월미도에 행궁을 설치했다. 지금은 흔적을 찾을 길이 없으나 행궁의 위치는 월미도 동쪽 해안에 있던 임해사터라 전한다. 병자호란을 겪은 조선은 강화로 갈 수 있는 다양한 길을 개척하려 했다. 강화도는 보장지처였고, 황해로 나아가는 교통의 중심이었고 개경과 한양으로 향하는 수로의 관문으로 국방의 요충지였다.

 

1997년 강화군 갑곶리와 김포시 월곶면을 연결하는 새로운 강화대교가 개통되었다. 이에 앞선 1969강화대교가 건설되었는데 그 전에는 사람도 버스도 성동나루에서 만조가 되기를 기다렸다가 나룻배로 염하를 건넜다. 2002년에는 우여곡절 끝에 강화군 길상면과 김포시 대곶면을 연결하는 염하를 가로지르는 두 번째 다리인 초지대교가 개통되었다. 2014년에는 강화도와 교동도를 잇는 교동대교가, 2017년에는 강화도와 석모도를 잇는 석모대교가 개통했다. 또 영종도에서 강화를 잇는 남북평화도로계획도 있다. 남북교류가 활발해지면 강화는 또 교통의 중심지가 될 것이다. 예전에는 배를 타야만 했다면 도로와 다리 등 자동차 중심이라는 것이 다를 뿐이다.

 

1872년 통진부 지도의 염하의 뱃길 지도
1872년 통진부 지도의 염하의 뱃길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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