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미도 미군폭격사건 위령비, 역사적 진실 담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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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미도 미군폭격사건 위령비, 역사적 진실 담아야"
  • 백종철 시민기자
  • 승인 2021.08.22 2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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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족, 시민단체, "타지역 위령비와 달리 미군 삭제 등 역사적 진실 외면" 지적
지난 2015년 진행된 월미도
지난 2015년 9월 진행된 '월미도 미군폭력 민간인 희생자 위령제'

 

1950년 9월 10일 발생한 월미도 미군 폭격사건으로 월미도 원주민 100여 명이 희생된 지 71년 만에 이들의 위령비 건립이 추진되고 있는 가운데 이를 추진하고 있는 인천시가 폭격의 주체인 미군을 위령비 문구에서 삭제하고 월미도 사건의 특수성을 지우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어 유족과 시민사회단체들이 반발하고 있다.

월미도 미군폭격사건은 지난 2008년 2월 26일에 국가기관인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에서 미국까지 출장가서 조사한 결과를 담은 진실규명결정서를 발표해 ‘월미도 미군폭격사건’으로 명명되었다. 이는 전국적으로 여러 지역에서 일어난 미군폭격사건 중의 하나이면서 인천상륙작전의 사전 작전으로 수행된 사건이었다.

진실규명보고서의 결론 부분을 보면 가해 주체와 사건의 성격, 그리고 그 잔혹성이 그대로 나타나 있으나, 이는 아직도 인천상륙작전의 신화에 가려져 널리 알려지지 않고 있다.

월미도 미군폭격사건 원주민 희생자들에 대한 위령비 건립은 묻혀 있던 역사적 진실을 인천시민과 후손들에게 알리고 이 사건으로 고통당한 유족과 월미도 실향민들의 실상을 진실되게 알리는 징표가 되어야 한다는 당위성이 있다.

그러나 인천시는 월미도 원주민들에게 월미도 사건의 실체를 가리는 위령비 문구를 반강제로 강요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이에 시민사회단체들은 월미도 미군 폭격사건의 실상과 함께 인천시가 제기하고 있는 위령비 문구의 문제점 그리고 타 지역 미군폭격사건 위령비 건립을 사례를 살펴보며 월미도 미군폭격사건 위령비가 제대로 역사적 진실을 담으로 수 있도록 촉구하고 있다.

 

- 경 과 

진실화해위 <월미도 미군폭격사건 진실규명결정서>(. 결론 및 권고사항(62~64쪽)

결론

. 월미도 거주 민간인들은 한국전쟁 시기인 1950년 9월 10일 인천광역시 월미도 마을에 가해진 미군의 폭격으로 집단희생 되었다. 폭격은 리차드 루블(Richard W. Ruble) 제독의 해병대항공단 제 15항모전단 항공기들에 의해 월미도를 무력화시키는 작전의 일환으로 발생하였다. 항공모함에서 이륙한 해병항공기들(VMF-214, 323)은 95개(tank)의 네이팜탄을 월미도 동쪽지역에 투하하고 기총소사하였다. 이 집중폭격으로 동쪽 지역의 건물, 숲 등과 함께 민간인 거주지도 완전히 파괴되었다.

. 이 사건의 희생자 중 신원이 확인된 사람은 정용구(鄭龍九), 우소시경(禹小時景), 문정숙(文貞淑), 이대수(李大秀), 이종힐, 황태성(黃泰成), 황성례(黃成禮), 황태환, 추성만, 문이만외 10명이다. 실종자 및 남은 가족이 타지로 이동하여 위원회가 신원을 확인할 수 없는 희생자까지 포함하면, 실제 희생자는 100여 명까지로 추산된다.

다. 월미도 미군폭격 사건'은 미군의 인천상륙작전에 선행하여 월미도 점령을 위한 작전계획 하에서 발생했다. 당시 유엔군은 상륙작전을 통해 전세를 뒤집으려했고 월미도는 인민군이 주둔했던 인천의 관문으로서 반드시 무력화시켜야 할 전략적 위치에 있었다.

라. 당시 미군은 월미도 동쪽에 민간인 밀집 주거지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러나 미군은 상륙작전에서 인민군의 예상치 못한 반격으로 자국 군인에게 큰 피해가 초래될 수도 있다는 판단 하에 모든 불확실성을 없애려는 작전 개념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 또한 9월 13~14일 함포사격작전의 사전작업으로 인민군의 방어시설을 숨겨주는 은폐물을 없애려는 것이 폭격의 주요 목표였다. 따라서 미군은 다수 민간인 거주지를 포함한 월미도 동쪽 전체를 집중폭격 했다.

. 미군의 월미도 폭격에 대한 군사적 필요를 인정하고 적을 기만해야 할 군사적 필요가 컸다고 하더라도, 폭격이 전 폭격지점 선정에서나 폭격 중 식별할 수 있었던 민간인들에 대하여 그들의 희생을 줄이려는 조치가 취해질 수 있었다. 하지만 월미도 폭격의 경우 그러한 노력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확인되지 않는다. 민간인 희생을 줄이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도 없이 월미도 전체를 무차별 집중폭격하고 육안으로 식별 가능한 고도에서 주민에게 기총소사까지 한 것은 국제인도법, 전쟁법의 민간인 면제규범에 의한 민간인 구별의 원칙, 비례의 원칙에 위반된 작전이라는 비난을 면할 수 없다.

. 월미도 주민들은 거주지가 인천상륙작전의 성패의 핵심지역이 되면서, 민간인 면제규범에 의한 보호를 받지 못하고 전쟁의 혹독한 피해를 입었다. 그 후에도 월미도가 군사기지로 되면서 유족과 거주민은 50년이 넘도록 고향으로 되돌아가지 못하는 큰 고통을 겪고 있다.

 

한편 진실화해위는 사건의 역사적 진실을 위와 같이 보고하는 것과 함께 아래와 같은 권고조치를 대한민국 정부와 인천시에 권고했다.

 

권고조치

. 권고조치

1) 미국과의 협상 권고

한국정부는 미국정부와 적극 협상에 나서서 이 사건을 한·미간에 공동조사하거나 피해자에 대해 공동으로 책임을 지는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을 권고한다.

2)위령사업의 지원

신원이 알려지지 않은 희생자들을 포함하여 모든 희생자의 넋을 기리는 위령비를 세우고 그 넋을 위로하는 위령사업을 지원하는 등의 상징적 화해

3)월미도 원주민의 귀향 지원

월미도 원주민들은 섬의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전쟁기에 특별한 희생을 당하였다. 생존한 월미도 원주민들은 간절히 귀향을 원하고 있다.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주민들의 요구에 부응하는 합당한 조치를 취할 것을 권고한다. 또한, 해당 지방 자치 단체를 통해 월미도 주민을 지원할 수 있는 화해조치를 강구하도록 정부에 권고한다.

 

. 법적·제도적 정비조치

1) 가족관계등록부 작성 및 정정

사건 조사과정에서 확인한 바에 의하면, 많은 희생자의 사망일자가 오기되어 있었고, 일부 희생자의 경우 멸손 등의 이유로 사망신고조차 되어 있지 않았다. 이번 진실규명이 이루어진 후, 가족관계등록부의 정정이 가능하도록 조치해야 한다.

2) 공식기록에 등재

해당 지역의 시지(市誌)를 비롯한 정부의 공식 기록물에 해당 사실을 올바르게 등재하여, 국민들이 미군에 의한 월미도 주민의 희생 사실 및 전쟁의 비참한 실상을 인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3) 외교적 노력 및 군인 대상 교육

정부는 전시 상황에서도 민간인 보호가 실효적이 되도록 국제사회의 외교적 노력에 적극 동참해야 하며, 또 국제법 정신을 함양하기 위한 교육이 군대는 물론 각종 학교교육에서 적극적으로 시행되도록 하여야 한다.

 

이에대해 인천시는 월미도 원주민귀향대책위 한인덕 위원장과 안병배 인천시의원, 이희환 월미도장기민원조정위원 등이 참석한 자리에서 아래와 같은 문구를 제안했다.

 

한국전쟁 월미도 민간인 희생자 위령비

 

이 위령비는 한국전쟁 당시 무고하게 희생된 100여명의 월미도 민간인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고 삶의 터전이 전쟁의 전략적 요충지가 됨에 따라 혹독한 피해를 입은 분들에 대한 역사적 사실과 전쟁의 실상을 후대에 알리고자 건립하였다.

(신원이 확인된 희생자)

정용구, 우소시경, 문정숙, 이대수, 이종힐, 황태성, 황성례, 황태환, 추성만, 문이만 외 100명

2021. 9. 00

인천광역시

 

- 쟁 점

이 초안에따르면 월미도에서 민간인 희생자가 왜 발생했는지, 민간인들은 누구이며 가해자는 누구인지를 알 수 없다. 그리고 한국전쟁이라는 포괄적인 명칭을 사용함으로써, 인천상륙작전의 사전작전으로 이루어진 미군 폭격사건은 은폐되는 문제점을 갖고 있다.

이 문구에 대해 유족 대표로 한인덕 위원장은 월미도의 원주민들이 희생된 사건이므로 민간인원주민으로 바꾸어 달라고 요청하였다. 이희환 위원은 한국전쟁 당시 인천상륙작전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미군의 사전폭격으로 무고하게 희생된이라는 문구를 추가로 삽입하는 것이 역사적 진실을 담는 것이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인천시는 윗선에서 미군을 삽입하는 것이 부담스럽다는 지적이 내려왔다거나, 갈등이 생길 소지가 있으니 위령비 문구는 위와 같이 하고 별도의 안내판을 설치하여 미군 폭격 등의 사실을 자세히 기술하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해왔다고 대책위 등은 설명하고 있다. 이에 추후 다시 협의하는 것으로 진행됐다.

그러나 이후 시는 아무런 연락이 없는 상태에서 위령비 제막이 한달 남짓 남은 8월에 들어 한인덕 위원장에게 더 이상 문구를 고치면 위령비를 세우지 못한다거나, 모 단체의 압력이 있다는 등으로 한인덕 위원장의 요구를 더 이상 들어주지 않으면서 아래와 같은 문구를 제작자에게 이미 의뢰하였다고 하였다.

위 위령비 문구는 인천시 보훈과가 처음 제안했던 문구보다도 더 개악돼 있다고 대책위는 밝혔다. 월미도 미군폭격사건의 전쟁범죄 행위를 일체 제거했을 뿐만 아니라 6.25전쟁 당시 북한의 남침에 의한 전쟁을 조기 종식시키기 위해 실시된 연합군의 인천상륙작전 중 월미도에서 희생된 민간인의 넋을 기리기 위해라고 표현함으로써 월미도 미군폭격사건이 불가피한 사건이며 인천상륙작전의 전승을 기리는 문구를 탈바꿈했다는 것이다.

100여 명의 월미도 원주민들의 죽음이 여전히 신원이 불명한 민간인으로 기록돼 있다. 월미도 미군폭격사건을 겪은 이후 월미도 원주민들은 고향마을이 군사기지가 되면서 고향마을로 아직도 돌아가지 못하고 있기에 사건의 특수성으로 보아 원주민으로 기술하는 것조차 인천시는 반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인천상륙작전은 빛과 어두움이 있다. 월미도 미군폭격사건은 바로 인천상륙작전의 전승 속에 가리워졌던 월미도 원주민들의 무자비한 희생이 있었다는 점을 드러내는 사건이다. 이를 역사에 제대로 기록해야 억울하게 희생된 원주민들의 죽음을 진정 위령할 수 있다는 것이다.

 

타 지역 미군폭격사건 위령비의 사례들

다른 지역의 미군폭격사건으로 인해 발생한 희생자들의 위령비는 다음과 같이 건립되었다.

전북 익산, 1950년 이리 미군폭력사건, 2000.10.28 제작 

                                     <1950년 이리 미군폭력사건 위령비>

 

충북 영동, 노근리 미군양민학살사건, 2002.09.09 제작

"미군은 인민군이 두려워 그들을 죽였고 우리는 미국이 두려워 그들의 진실을 외면했다."

                                           <노근리 미군양민학살사건 위령비>

 

경북 예천, 미군 산성동 폭력사건, 2010.06.24 제작

"한국전쟁(1951.01.19)중 미군 오폭

                                                  <산성주민 희생자 위령비>

 

경북 포항,  포항미국폭격사건, 2015.05.06

<포항 민간인 희생자 위령비>

 

경북 구미, 구미 형곡동 미군폭격사건, 2016.08.04 제작

                                            <구미 형곡동 민간인 희생자 위령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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