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해협을 지키던 천연 요새, 광성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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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해협을 지키던 천연 요새, 광성보
  • 허회숙 시민기자
  • 승인 2021.08.27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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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기획] 처절했던 광성보 전투를 기억하며

 

8월 23일은 더위가 멈춘다는 처서(處暑)였다. “처서에 비가 오면 천 가지 곡식에 해롭다”는 속담이 있는데 처서부터 며칠간 비가 왔다. 지난 여름은 더위가 유난스러웠다. 거기에 델타변이 코로나까지 겹쳐 답답한 마음을 한층 더 해주는 마스크까지 쓰고 버텨내느라 온 국민이 지쳤다. 이제 좀 시원해지나 했더니 태풍 ‘오마이스’가 남해안에 상륙하여 강풍과 비바람을 몰고 왔다. 그나마 큰 피해 없이 지나간 것이 다행이다.

잔뜩 흐린 처서(處暑)날 아침, 강화군 불온면 덕성리 833번지에 자리하고 있는 광성보를 찾았다.

 

 

예전의 조그마한 성곽의 모습은 흔적도 없고 멀리서도 안해루(按海樓)의 위세가 당당하다.

넓은 주차장도 두 개나 잘 정비되어 있다. 코로나로 입장료를 받지도 않으면서도 통행로를 열어 놓아 쾌적하게 잘 닦아놓은 산책로를 따라 관람할 수 있었다.

사적 제 227호인 광성보는 강화 해협을 지키는 중요한 요새로 강화 12진보의 하나이다.

처음 이 곳에는 고려가 몽골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하여 강화도로 천도한 후에 돌과 흙을 섞어 해협을 따라 길게 성을 쌓았다.

바다를 잘 지켜 어루만진다는 안해루(按海樓)에서 시작하여 용두돈대, 손돌목돈대, 광성포대, 강성돈대 등 여러 포대와 돈대까지 둘러 볼 수 있다.

 

 

조선시대 광해군 때에 헐어진 데를 수리하여 다시 쌓았으며, 1658년(효종9)에 강화유수 서원이 광성보를 설치하였다. 그 후 숙종 때에 (1679)에 완전한 석성으로 축조하였다.

 

 

이곳은 1871년 신미양요 때 가장 치열한 격전지였다. 그 해 통상을 요구하며 강화해협을 거슬러 올라오는 미국 극동함대를 초지진, 덕진진, 덕포진 등의 포대에서 일제사격을 가해 물리쳤다. 그러나 4월 23일 미국 해병대가 초지진에 상륙하고, 24일에는 덕진진을 점령한 뒤 여세를 몰아 광성보로 쳐들어왔다. 이 전투에서 조선군은 열세한 무기로 분전하다가 포로되기를 거부하고 몇 명의 중상자를 제외하고 전원이 순국하였다. 이 때 파괴된 문루와 돈대를 1976년에 복원하였다.

또한 당시 전사한 무명용사들의 무덤과 어재연 장군의 전적비 등도 보수⸳ 정비하였다.

 

 

요즈음은 코로나 사태로 잠정 중단되고 있으나 보통 때에는 문화관광 해설도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점심시간을 제외하고 1시간 간격으로 진행한다고 한다.

성문으로 들어서자마자 넓은 광장이 펼쳐지고 바로 앞으로 강화도 앞바다가 한눈에 들여온다. 시원한 바람과 바다 풍경으로 가슴이 탁 트인다.

 

 

우리 5천년 역사에서 6,00여회 이상의 외침을 당했으니 전국 어디엔들 그 상흔이 없으련마는 이 곳 강화는 특히 구국항쟁의 혼으로 외세를 물리친 기억이 생생한 곳이다. 사실 부귀영화는 지배층인 양반 계급만의 몫이었던 시절, 핍박받고 천대받던 상민, 천민들이 마지막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나라를 지키겠다고 항쟁을 한 그 정신의 뿌리는 무엇일까?

 

 

신미양요 때 광성보 전투에서 승리한 미군은 아무도 승리한 그 전투를 기억하고 싶어 하지 않는 너무도 처절한 전투였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총알이 떨어진 조선군이 칼로 저항하자 칼을 든 팔을 베어버렸다. 한쪽 팔이 떨어져 나간 그는 다시 성한 팔로 칼을 들고 덤볐다. 그마저 내려치자 쓰러져 입으로 물려고 덤비더라. 그 모습은 인간이라기보다 아귀에 가까웠다. 생각하기도 무서운 처참한 전투였다”

지금도 우리 민족의 DNA 속에 면면히 흐르고 있는 민초들의 애국심과 구국의 일념은 어디에서 연유된 것이었을까?

그 당시 우리나라의 지도층이 바르게 해외 정세를 파악하고 올바른 개방 정책으로 나라를 이끌었던 들 36년간의 망국의 한은 없었으리라.

 

 

지난 8월 15일 우리의 광복절 아침에 아프간 미군 철수와 수도 카불이 탈레반에 의해 점령되었다는 외신이 전해졌다. 그 곳을 탈출하려는 난민들로 아비규환이 연출된 공항의 모습에서 6.25 동란 시 흥남 철수작전 때의 우리 피난민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베트남이 파리평화협정과 미군 철수와 함께 무너지자 116만명이 보트피플이 되어 세계의 바다를 떠돌던 모습이 보인다.

 

 

캄보디아가 공산주의 크메르루즈 정권에 무너지면서 천만 이상의 양민을 참혹하게 학살한 ‘킬링필드’의 장면들이 떠오른다.

아프간에서 무참하게 학살되는 포로와 여성들의 모습은 베트남 함락 후 월맹에 의해 처형당한 성직자. 공무원, 학생들 모습의 데자뷰이다. 패망 직전까지 베트남에서도 사이공 대학생들이 미군철수와 평화협정을 주장하며 시위를 별였으나 월맹군은 이들부터 처단했다.

 

 

마치 조선 말기처럼 자국의 이익을 위하여 얽히고설킨 요즈음의 국제 정세가 어지럽다.

우리 선조들의 구국의 얼이 맥맥히 살아 숨쉬고 있는 광성보를 한시간여 둘러보는사이 마음에 차오르는 희망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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